***송연 글***/수상기

자연을 사랑한 유년시절의 친구

是夢 2006. 9. 4. 15:33

자연을 사랑한 유년시절의 친구

내가 대구에 첫발을 디딘 서구 내당동(지금은 중구 대신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지만) 북향집은 큰 형님이 대구에 정착을 하고 이룬 집이다. 나는 이 북향집 첫 번째 나들이에서 외사촌 형과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집을 찾지 못해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다가 남산국민학교 앞에서 나를 찾아 나선 외삼촌에 의해 미아의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내가 다시 부모님의 품으로 갈 수 있게 해준 지점이 남산국민학교였고 그 남산국민학교가 내 배움의 첫 모교가 된 것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대구에서 서쪽으로 40여리 떨어진 달성군 다사면 문양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국민학교 입학을 위해 대구에 미리 이주해서 대구시청에 근무하시던 큰 형님에게 와서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의 부모님이 다 그러하듯 나의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교육열은 인근 마을에 소문이 날 정도로 극성스러워 6남매의 막내인 나를 당신의 품을 떠나보내 대처인 대구로 유학을 보냈던 것이다. 나를 대구로 보내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짐작컨대 부모님이 큰 형님과 상의하여 결정하였겠지만 어머니의 주장에 아버지와 큰 형님이 동의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촌뜨기 중에 촌뜨기인 나의 국민학교 입학을 장황하게 널어놓는 이유는 김종욱 형과의 만남의 인연이 이 남산국민학교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형님들처럼 고향의 학교에 입학을 했더라면 형과의 만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1학년 7반이었고 우리 반의 반장으로 김종욱 형이 선출되었으며 한번도 학급의 개편이 없어서 6년간 같은 반에서 미운 정 고운 정을 나누었고, 줄곧 반장도 도맡아 한 것으로 기억된다. 김 형은 영민하여 학급의 통솔도 빈틈없이 잘 하였으며 학업성적도 첫 번째를 내놓는 일이 없었다고 기억된다. 5학년 때 인근 피난학교에서 전입해 온 장신형(포항 장소아과 원장) 형과 선두를 다투었다고 생각된다. 김 형은 열심히 공부하는 형이 아니고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노는 개구쟁이 형이라고 한다면 장형은 쉬는 시간에도 곁눈질하지 않고 책과 씨름하는 노력 형이라고 기억된다.


김 형의 집이 나와 같은 내당동이었지만 제법 떨어져 있었으나 학교를 마치고 자주 김 형 동내에 가서 놀았다. 그 동내에는 우리 반 친구들도 많았고 동내 인접해 있는 논밭이 우리들의 놀이터였기 때문에 우리들의 천국이었다. 그리고 이웃해서는 화장장이 있어 어린나이에 가끔은 인생에 대한 회의(?)도 느끼는 그런 곳이었다. 김 형의 집은 감나무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형님과 누님, 그리고 동생들이 많았으며 부친께서는 종이상자를 만들어 파는 가내공업으로 많은 자녀들을 공부시킨 장한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2학년 때 6•25가 발발했으며 학교는 군인들에게 징발당하여 우리들은 기와공장이나 서문시장의 빈 공장을 전전하면서 배움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배움의 환경이 최악의 조건이지만 반장인 김 형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우리들을 잘 이끌어 즐거운 교실을 만들어 항상 우리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다가 학교 운동장에 가교사를 지어 다시 학교로 돌아와 본교사는 군인들이 사용하고 우리들은 가교사를 사용하는 주객이 바뀐 그런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산과 들로 책상도 걸상도 없이 흑판을 둘러메고 떠돌아다니면서 공부하던 방황을 끝낸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즐거웠다. 군인들과 함께 쓰는 운동장이지만 전교생이 모여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는 조회도 하고, 가을이면 운동회도 하면서 우리들의 건강을 다지면서 꿈을 길렀다. 운동회 때면 나는 김 형과 함께 400m 릴레이 선수로 출전하여 우리 반의 명예를 걸고 넓은 운동장을 달리곤 했다.

4학년 때라고 생각되는데 새로 지은 가교사 앞의 화단을 조성하기위해서 담임선생님과 함께 앞산 안지랑골에 가서 정원석과 야생초를 채취해서 리야카로 실어와 화단을 만든 적이 있다. 그 먼 곳을 반장인 김 형과 원예반장인 나, 그리고 몇몇 학우들이 선생님을 따라가서 힘들여 가져온 재료들을 이용해 교내에서 가장 멋진 화단을 만들어 교장선생님의 칭찬을 받은 적도 있다.

이러한 일들이 훗날 우리들의 협동심을 키워줬고 공인으로서 큰 과오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6학년이 되면서 담임으로 오신 손수태 선생님은 그 때 우리 반의 성적이 꼴찌의 수준이라면서 급훈으로 “하면 된다 해보자”로 정하고 그 부리부리한 무서운 눈빛으로 스파르타식 교육을 시작하였다. 공부를 잘 하던 못하던 우리들의 손바닥은 매 자국으로 성할 날이 없었다. 그러한 무서운 매질에도 불구하고 입학성적은 꼴찌를 면하지 못해 경북중학교에 입학은 3명에 불과했다. 지금 고등학교의 우열을 서울대학교 입학한 수로 따지듯이 그때 국민학교의 우열은 경북중학교에 입학하는 수로서 평가되었다. 남산학교의 경중 입학생은 30여명으로 남학생이 다섯 반이었으니 한 반에 6명이라야 보통인데 그 절반에 불과하니 그 무서운 담임선생님의 스파르타식 교육성과가 비참하였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그마저도 못 들어갔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러한 부진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3명의 대열에 낀 사람이 김종욱 장신형, 그리고 나였으니 7반의 삼총사가 된 샘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나와 김 형과는 가깝게 지낸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유를 굳이 지금 생각해 본다면, 내가 내당동 북향집을 팔고 대신동에 있는 외삼촌댁에 셋방살이를 하다가 5학년 때 원대동 달성국민하교 뒤에 있는 파밭을 매입해서 새로 집을 지어 이사를 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등하교시 같이 다닐 수가 없었으며, 하교 후에도 거리가 멀어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으며, 3년간 같은 반에 한번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평범한 학교생활을 했지만 김 형은 중학교 때부터 산악활동에 심취하여 토요일만 되면 배낭을 메고 산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나와의 관계는 자연 소원해 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몇 년 전 은사님을 모시고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중학교 때 우리들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들었다. 수업시간에 새 우는소리에 열강을 하시던 선생님께서 이상히 여겨 사실을 확인해본 결과 책상에 넣어둔 잉꼬가 소동의 주인공이었고, 그 선생님은 야단을 치시면서 사유를 물은즉 “잉꼬가 아파서 집에 두고 학교에 가면 죽을 것 같아서 가져와 돌보고 있다”는 답변에 선생님은 더욱 화를 내 꾸짖었다고 수업을 마친 후 교무실에 가서 동료 선생님들에게 하소연을 했는데, 이 이야기를 들으신 이길우(수학) 선생님께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아는 그 학생의 정신이 갸륵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그 선생님을 나무라셨다는 일화를 들었는데 그 잉꼬의 주인공이 바로 김종욱 형이라는 사실을 늦게야 알았다. 이 이야기는 42회 졸업30주년기념문집에 이길우 선생님께서 “어찌 잊으랴!”라는 42회를 회고하는 서사시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그렇게 새를 좋아했고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휴머니스트였다.


김형이 대구고등으로 진학했기 때문에 학교를 달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산악운동에 더욱 몰두하여 대구의 학생산악운동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산에 대한 집념은 그의 사회생활에서도 계속되어 그의 산악운동에 대한 업적은 나보다도 산악인들이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김 원장과의 관계는 중고등과 대학생활, 그리고 사회생활 초반에는 소원하였으나, 나의 아내와 김 원장의 부인 정화숙 교수가 경대 사대 생물학과의 선후배라는 또 다른 인연으로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하여 만나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유년시절의 깊은 정이 되살아나 허물없이 지내고 있다.

그는 아내가 대학교수가 되는데 남편으로서 헌신적인 외조를 하여 일본 유학도 마다하지 않고 보낸 후, 가정을 꾸리면서 두 딸을 잘 키워 지금은 모두 제 갈 길을 갈 수 있도록 박사학위과정을 이수토록 하였으며, 유년시절부터 동물을 좋아해 대학의 전공도 생물학을 선택하여 만년에 박사학위 취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아내와 두 딸의 뒤치다꺼리를 한 후, 미루어 두었던 자신의 학문에 대한 성취욕을 이루고자 시세말로 까만 후배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정진하고 있다.


그가 평소에 1천번도 더 올랐던 팔공산 자락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야생초로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고 좋아하는 개들을 키우면서 퇴직 후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이순의 나이에 자유인이 되면 낙동강의 두루미를 보호하고 관찰하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산타페라는 레저용 차량을 준비하여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내가 아는 김 원장의 관심과 열정은 산악운동에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가 좋아하는 산을 오르내리며 변화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으려는 욕구는 자연스럽게 얻은 취미생활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친구들과 모이면 좌중을 웃겨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유모어 감각,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정신,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판단력,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가 강한 삶의 태도도 산에서 얻은 교훈이라 생각된다.

그의 마지막 소원인 대구의 산악운동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산악박물관을 팔공산에 세우는 일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그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나는 기대한다.


내가 36년이라는 긴 세월을 오직 대구시에서 공직생활로 마감하였다면 김 원장은 오직 대구에서 공사립학교를 넘나들면서 후진을 가르치는 교직생활에 전념해온 대구를 사랑하는 외골수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 외에는 사뭇 다른 길을 걸어왔으나 그는 나보다 더 도전적이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 바르게 살아가려는 올곧은 정신을 나는 존경한다.


이제 김 원장이 후배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정년을 기념하는 문집을 내게 되었다면서 글을 부탁하기에 처음에는 사양하였다가 쾌히 승낙한 것은 국민학교 6년간 같은 반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유일한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졸필을 들어 미숙하나마 잊혀져 가는 일들을 되새겨 그의 정년을 축하하며, 앞으로 자유인으로서 못 다한 일들을 찾아 더 보람찬 생활이 되기를 바란다.


정 시식(대구성서산업단지관리공단 전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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