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고대문명 발상지 인도
인도의 찬란한 빛이 나를 일깨우고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인 인도 땅에 내린 시간은 한글날 밤 10시경이다.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Indira Gandhi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하니 우리 영사관의 무관과 인도의 연락장교가 우리를 친절하게 맞이해 주어 인도 육군성에서 마련해 준 전세 버스 편으로 호텔로 향했다. 여기도 태국처럼 영국의 영향으로 차량이 좌측통행을 하고 있다. 길이 매우 넓고 가로공원이 퍽 인상적이다. Taj Intercontinental Hotel 현관을 안내하는 시크교도의 당당한 체구와 터반 아래로 탐스럽게 기룬 멋진 수염이 인도에 왔다는 느낌을 준다. 호텔 안은 서구인들의 출입이 많아 보인다.
공군대령인 이종관 무관의 스케쥴 안내와 더불어 유의사항은 물은 반드시 미네랄워터만 먹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배탈로 인도여행을 망치게 된다는 경고다. 인도인은 마셔도 괜찮은 물이라도 한국인이 먹으면 배탈이 나는 것은 물에 들어 있는 세균에 대한 저항력이 없기 때문이란다. 소위 물의 신토불이(身土不二)인 셈이다.
공원으로 둘러싸인 호텔 창으로 인도의 찬란한 해살이 비쳐와 눈을 뜨게 한다. 타골이 노래한 ‘동방에서 온 나’에게 인도의 빛이 나의 의식을 일깨워 준다.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그때부터 신음하던 모든 약소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준 Korea에서 온 나에게 오늘의 인도에서 무엇을 배울 것 인가를 재촉하는 듯……
각기 독특한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델리」
「델리(Delhi)」는 기원 전 1200년 「마하바라타」시대부터 세워진 고대 도시이다. 12세기말부터 이슬람교도가 인도를 지배하면서 델리에 왕조를 세웠으며 16세기에 들어와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아그라」로 수도를 옮겼으나 제5대 「샤자한」이 다시 「델리」로 왕도를 이전하여 「무굴제국」이 풍요와 평화를 누렸던 16-17세기에 가장 번성했으며, 1857년 영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서 인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 도시였다. 영국이 1600년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1690년에 「캘커타」에 거점을 확보하여 인도 경영을 위한 준비를 진행해 오다가 여러 서구열강의 세력 중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면서부터 「델리」는 영국의 인도 지배의 심장부가 되었다.
「델리」는 각기 독특한 개성을 가진 두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무굴제국」의 황제 「샤자한(Shah Jahan)」이 조성한 도시「샤자하나바드(Shajahanabad)」가 자리했던 북쪽의 「올드 델리(Old Delhi)」지역은 이슬람 문화의 색채가 강한 곳으로 아름다운 모스크와 성, 사람들로 붐비는 오래된 「바자르(Bazaar, 재래시장))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곳이다.
남쪽의「뉴델리(New Delhi)」지역은 영국이 식민지 지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만든 곳으로 영국인의 합리주의에 입각한 그들의 이상적인 도시 상을 만들려는 흔적이 보인다. 도로보다 몇 배 넓은 가로공원과 교차로마다 우회전(우리나라의 좌회전에 해당 됨)을 P-Turn으로 처리하여 차량의 흐름을 막히지 않게 처리하였다. 각종 관공서가 있으며 정부청사마다 돔형을 도입하여 위압적이고 웅장하게 만든 것은 일본이 총독부 건물의 돔형을 이곳에서 배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올드 델리에서는 시민들의 생활이 이루어지고 뉴델리에서는 인도의 전체를 움직이는 행정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도시를 움직여가는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무한한 잠재력 가진 경제대국
한반도의 열다섯 배나 되는 329만㎢의 인도에 사는 인구는 9억 3,422만 명이라는 공식통계를 제시하고 있으나 10억이 살고 있는 나라라고 보면 된다. 21세기 중에 중국의 인구를 초과하여 세계 최대의 인구 보유국이 될 것이라고 Paul Kennedy는 전망하고 있다. 인구조절정책으로 강제적으로 불임시술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다산을 지지하는 힌두교의 전통적인 관습 때문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강제적인 불임술이 힌두교 국수주의자들의 강한 반발의 경험을 체험하고부터는 인구증가 억제를 위한 켐페인을 벌여 오면서 다소 효과를 거두고 있다. 과거 ‘두 명이나 세 명이면 충분’에서 ‘우리 둘 우리의 둘’의 슬로건에서 ‘하나가 즐겁다’로 악의 없는 슬로건으로 접근하고 있으나 과연 성공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1인당 국민소득은 317달라에 불과하나 빈부의 격차가 심하여 10%인 1억은 매우 잘 사는 중산층을 형성하고 있어 잠재력이 매우 큰 시장이란 생각이 든다. GNP규모도 2,850억달라로서 아시아에서는 일본, 중국, 한국 다음으로 가는 제4위의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은행이 평가한 구매력을 기준으로 하면 미국, 중국, 일본, 독일 다음으로 세계 5위에 이르는 ‘잠재경제대국’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구소련이 붕괴한 후 1991년 7월부터 라오정부가 경제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서방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미국, 일본, EU 등 서방국가들과의 경제통상 관계 강화에 중점을 두는 한편 러시아와도 경협 증진을 기초로 한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인도의 경제개발 정책은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 기본정치이념과 자조(Self-Reliance)라는 산업정책의 기본원칙은 유지하면서 개혁의 속도와 폭간에는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점진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대우가 자동차 조립공장에 투자를 하여 1500cc 소형승용차를 생산하고 있으며 내년부터 800cc와 1000cc 국민차를 출하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대자동차도 「타밀라」에 조립공장을 신축하고 있으며 가전 3사도 인도에 진출하고 있다. 미국, 영국, 독일도 자동차공장을 신축하고 있다.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면서 사회주의 정책을 펴온 인도는 50년간 800cc인 「마루티 스즈끼(Maruti Suzuki)」 한 가지 모델만 생산하여 싫증을 느낀 소비자들이 대우자동차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10억 인구가 식량을 자급자족하고도 남아서 중동지방으로 수출 하는 인도의 미래는 인접한 중국과 필적할만한 대국임에 틀림없다.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인도는 직업 관료제의 확립과 군부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여 왔기 때문에 식민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한 나라로서는 유일하게 의회 민주주의가 정착한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국가로 발전하였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연방정부는 25개의 주정부와 7개의 연방직할시를 두고 있으며 지방자치제가 매우 발달하여 국민회의당이 실권을 하고 군소정당이 연립내각을 구성하는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국민생활은 안정된 편이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주지사(Governor)가 주정부의 수반이나, 주 의회의 다수당에서 지명하는 주 수상(Chief Minister)이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으며, 연방직할시는 대통령이 직접 관할하고 있다.
1990년 4-5월에 실시한 제11대 총선에서 국민회의당이 참패를 당하고 힌두이즘을 표방하는 인도 인민당(BJP)이 제1당으로 부상하여 바제페이(Vajpayee) 수상내각이 출범하였으나 하원의 신임을 받지 못해 13일 만에 퇴진을 하고 국민-좌파연합(National Frong-Left Front)이 주축이 되어 13개 군소정당이 결집한 연합전선(United Front)을 형성하고 국민회의당의 지지를 얻어 가우다(Deve Gawda) 수상정부가 6월 1일 출범하였다. 국민회의당의 지지를 받고 출범한 가우다 수상내각은 국민회의당이 지지를 철수함으로서 무너지고 1997년 4월에 구즈랄(Gujral) 수상의 현 내각이 출범하였다. 경제개방을 추구하는 Tamil Manila Cogress당과 사회주의 경제이념을 가지고 있는 공산계열 정당 등 이질적인 정당들의 연합체인 현 내각으로서는 주요 정책 결정을 과감하고 신속하게 추진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자주국방을 위해 핵 보유한 인도 국방정책
중국과 파키스탄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는 인도의 군사력은 114만 5천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금년도 국방비는 GNP의 2.9%인 100억달라를 확보하여 자주국방 10개년 계획(Plan 2005)을 추진하고 있다.
1974년에 12KT급의 원폭 핵실험을 실시한 인도는 핵 비확산조약(NPT)에 대해서 5개 핵보유국의 핵무기 독점과 수직적 핵 확산에 대한 차별적인 조약을 반대하고 있으며, 인접국인 중국과 파키스탄의 핵무기 보유에 대한 군사 전략적 고려에서 ‘핵능력은 보유하되, 핵무기는 보유하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을 표명하고 있으나, 발전용 원자로 다섯 기와 군사용 실험원자로 네기, 그리고 재처리 시설 등 열 개의 핵시설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 의회 보고서에 의하면 핵폭탄 50개를 제조할 수 있는 프로토늄 300kg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도는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94년 2월에 사정거리 2,500km의 중거리탄도 미사일의 발사 실험에 성공하였으며, 사정거리 150-250km의 지대지 미사일도 실전에 배치를 완료하였다. 위성 탑제용 로켓 실험발사도 성공한 군사 분야의 과학기술이 매우 발달한 국가이다. 우리나라도 인도의 인공위성을 이용할 계획이라는 대사의 설명이다.
파키스탄과 분리되면서 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이주를 시켰으나 아직도 인도 내에 11%의 회교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북부지방의 카쉬미르에는 회교도가 많아 파키스탄과의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분쟁지역에 유엔에서 평화감시단을 파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안충준 소장이 이 감시단의 사령관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독립 50주년을 맞아 UN안보리 상임이사국 가입 노려
금년으로 독립 50주년을 맞이한 인도는 10월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내방이 있었으며 내년 1월에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엔의 회원국 수가 증가한 세계정세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안보리 운영의 민주화를 통한 유엔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탈냉전시대의 세계질서에서 비동맹운동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개발도상국과 선진국가간의 지도적 중간역할을 수행하면서 과거의 비동맹운동권내의 입지를 유지하면서 범세계적 회교국과의 관계를 증진시켜 회교권이 파키스탄에 편중되지 않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73년도에 남북한과 동시에 수교를 한 인도의 남북한 정책은 등거리 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나, 80년도 후반까지는 인도의 친소정책으로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으나, 91년부터 경제개방정책을 수행하면서 북한과의 실질적인 관계는 미미하여졌으며, 우리나라와 협력관계에 역점을 두는 정책으로 수정하였고, 1993년 9월에 인도의 Rad 수상이 한국을 방문하고 1996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하여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우리나라의 유엔 안보리 이사국 진출을 지지하였으며 북한의 핵문제에 있어서도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에 있다.
경제적으로도 1992년부터 3년간의 수출 신장율이 62.8%, 수입증가율이 10.7%이며 1994년말 의 총 투자액이 1백만불을 넘고 있는 미국, 영국 다음으로 세 번째의 투자국으로 경제적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잠재력이 큰 경제대국으로서의 우방국이라는 인식을 다시 해야 할 국가이다.
많은 나라의 유학생을 받아들인 인도 국방대학원
10월 10일은 공식방문으로 스케쥴이 꽉 짜인 날이다. 한국 대사관을 방문하여 최대화 대사와 한재철 공사, 그리고 이종관 무관으로부터 인도의 정세와 국방관계의 설명을 들었다. 96년의 총선에서 집권당이 패배하고 14개 정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한 정치적으로 불안한 나라이나 인도 국민들의 민주의식과 자유의식이 매우 발달하여 자연스러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사회적 계급제도가 엄격한 캬스트제에서 현 대통령이 최하위의 계층인 불가촉천민 출신이라는 것만 보아도 인도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작년 12월에 부임한 최 대사는 우리나라 투자기업의 착공과 준공식에 참석하는 일이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라면서 대한항공에 이어 아시아나가 금년부터 취항하여 관광객과 경제인들의 방문이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교민은 상사주재원이 대부분으로 델리에 500명, 뭄바이(Mumbay 봄베이)에 500여명을 비롯하여 1,500여명이 상주하고 있으며, 최근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유학생은 150-200여명으로서 철학을 비롯한 인문과학분야 전공이 많다고 한다. 최근 델리대학에 설치한 한국어과는 경쟁이 치열한 인기학과로서 한국과 인도와의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 영주권을 가진 우리 교민은 국제결혼을 한 세 가족과 반공포로 세 가족이 1954년부터 정착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인도의 대사관도 국위에 알맞게 잘 지었으며 관저와 정원도 잘 가꾸어 방문객을 흐뭇하게 해 주었다. 시원스러운 가로공원에는 신성한 대접을 받는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으며, 덩치 큰 흰 소 한 마리가 멋을 부리며 도로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니 차들이 모두 피해간다. 마치 성곽처럼 붉은색의 Sand Stone으로 견고하게 지은 국방성을 방문하여 단장과 지도교수, 연구장과 무관 그리고 사진촬영을 위해 이진혁 대령과 내가 공군 부참모 차장, 육군 부참모 차장, 해군인사부장를 접견하고 일행들은 그동안 국방차관보의 국방에 관한 브리핑을 들었다. 경제협력과 관련이 있는 재무성과 상무성을 방문하여 인도의 경제개혁 정책에 대해서 브리핑과 토의를 하였다. 특히 상무성을 방문하였을 때는 예정에 없던 상무장관이 직접 참석하여 인도와 한국의 경제협력에 대해서 토의를 하여 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찬은 국방대학원 식당에서 원장이 주최하는 인도 고유의 식사를 하였다. 태국 음식처럼 우리 입맛에 잘 맞아서 즐거운 오찬이었다.
국방대학원의 입교생은 각 군에서 가장 우수한 군인을 선발하여 교육을 시키고 있으며 졸업과 동시에 사단장으로 배출하는 특전을 베풀고 있다고 원장이 강조를 한다. 한국에서도 이계호 육군대령이 입교를 하여 대학원생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키고 인도를 열심히 배우면서 국제화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더 많은 군인을 이 대학원에 보내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도와 각국에서 온 유능한 간성들과의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저녁에는 육군회관에서 육군정보본부장(육군중장)이 주최하는 리셥션에 참석하였다. 체격이 다부지게 생긴 터번을 쓴 시크교도인 SK Sethi 본부장은 우리들을 환대해 주었다. 만찬은 대사관저에서 한정식 부페로 모처럼 김치와 부침, 그리고 정원에서 재배한 배추와 상추에 제법 쫄깃한 쌀밥으로 포식을 하였다. 관저의 내부는 우리의 한국화와 붓글씨, 대사의 처제가 그린 서양화, 우리의 집기들을 멋스럽게 장식을 하여 한국의 멋을 잘 살린 대사 부인의 실내장식에 대한 솜씨가 돋보였다.
‘사랑의 도시’ 「아그라」를 찾아서
도착 3일째 되는 11일 오전 9시 20분 「델리」의 국내선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240km를 날라 40분 만에 「아그라(Agra)」 공항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본 「델리」와 「아그라」사이에는 경지정리가 잘된 한없이 넓은 평원이 계속되었다. 공항에는 공군소령인 안내장교와 현지 관광안내원이 우리들을 맞이해 주었다. 두 명의 헌병이 오트바이를 타고서 뒤에 탄 헌병이 붉은 깃발을 흔들면서 우리 일행을 에스콧트 해주어 인상적이었다.
우리들은 Taj View Hotel에 여장을 풀고 먼저 「아그라성(Agra Port)」 관광에 나섰다. 「무굴제국」의 제3대왕인 Akbar가 시작하여 제4대왕인 Jahan Giri를 거쳐 손자인 Shah Jahan대에 완공한 성벽높이 20m, 성곽 둘레 2,500m의 붉은 사암(沙岩)의 거대한 성을 관람하기 위해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성문을 지나 성안에 들어서니 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건물은 모두가 붉은 색의 사암이다. 두 번째 문루에는 국왕이나 귀빈을 환영하기 위한 연주대도 있고 국왕이 일반 백성들의 탄원을 듣기위한 홀도 마련되어 있어 마치 이조시대의 신문고를 통해서 백성의 소리를 듣던 그런 제도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성곽 남쪽으로 난 조망대에 서니 「야무나(Yamuna)」강 우안에 자리 잡고 있는 「타지마할(Taj Mahal)」이 2km의 「야무나 강」을 넘어 환상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야무나 강」에 비친 그림자와 더불어 더욱 영롱한 모습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황홀케 한다고 한다.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곳 「아그라 성」에서 먼저 보아야 그 건축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고 한 어느 건축가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7년간 이곳에서 아들에게 감금되어 사랑하는 아내의 무덤을 보면서 생애를 마친 ‘샤자한의 한(恨)’이 아직도 이 성안에 떠돌고 있는 듯 하다.
성안 중정에는 어느 영국인 총독의 무덤이 오만하게 자리를 차지하여 오히려 초라한 모습이 조화의 미를 깨고 있으나, 인도인들은 그들을 지배한 이 무뢰한을 그대로 두어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있는지? 아니면 그들의 인생관처럼 모든 것을 역사에 맡겨 버리고 상관을 하지 않는 것인지?
우리가 관람할 수 있는 「아그라 성」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2/3를 인도 육군이 주둔하고 있어 이 위대한 유적이 제 모습을 드러내려면 인도의 국력과 유적을 사랑하는 문화적인 수준이 더 나아져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그라 성」을 떠났다.
위대한 사랑이 위대한 작품을
오후에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가 큰 「타지마할(Taj Mahal)」의 관광에 나섰다. 「무굴제국」의 제5대왕인 「샤자한」이 열다섯 번째의 아이를 낳다가 죽은 둘째 부인을 위해 만든 위대한 사랑의 무덤이다. 그의 아내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은 왕보다 두 살 아래이며 17년간의 결혼생활을 하면서 열네 명의 자식을 낳아 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왕이 지어준 그녀의 애칭인 Mumtaz Mahal의 의미는 ‘Mum은 사랑’ ‘Taz는 왕관’ ‘Mhahl은 궁전’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왕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녀는 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죽기 전에 왕에게 세 가지 소원을 유언으로 남겼다. 첫째 재혼하지 말 것, 둘째 자기가 죽으면 특별한 무덤을 만들어 줄 것, 셋째 자식들을 잘 키워줄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샤자한」은 아내의 소원대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었다. 「무굴제국」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나라의 인원을 동원하였다. 주 건축가는 이란의 「이사 칸(Isa Khan)」이 담당을 하고 불란서, 이태리 등 유럽의 건축가를 초빙하였으며 22,000명의 인부가 인도는 물론 중앙아시아에서도 동원되었다고 한다. 대리석은 「아그라」에서 1,000리(400km)나 되는 「라자스탄(Rajastahan)」주의 「자이풀(Jaipur)」에서 조금 떨어진 「마르크라나(Markrana)」에서 운반하였다고 하니 「무굴제국」의 강대한 국력과 왕의 아내가 남긴 유언에 걸 맞는 무덤을 만들려는 집념을 알 수 있다.
「타지마할」은 무덤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크고 화려하고 짜임새 있게 만들어진 건축물로서 인류가 만들어낸 세계 7대 불가사의 작품 중의 하나로서 인도를 상징하는 「무굴제국」의 걸작품이다. Main Gate 밖의 넓은 광장 주변에는 일반 평민들의 휴식처와 방이 있고, Main Gate를 들어서니 좌우에 지체 높은 방문객을 위한 방이 마련되어 있고 정원 너머로 우유 빛처럼 우아한 74m 높이의 돔형 「타지마할」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아름다운 조형미를 뽐내고 있다. 「타지마할」의 우측에는 영빈관을, 좌측에는 사원을 좌우 대칭으로 붉은색 사암으로 지어 흰 대리석의 「타지마할」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주변에 세운 네 개의 뾰족 탑(Tower)은 높은 「타지마할」에 안정감을 주면서도 약간 외부로 기울어지게 설계 제작되어 지진이나 천재지변으로 탑이 무너져도 「타지마할」이 손상되지 않게 한 것은 당시의 문화적 수준을 보여주는 치밀함을 엿볼 수 있다.
「타지마할」의 관람은 신을 벗거나 덧버선을 신고 올라가야만 한다. 석공의 위대한 손길이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피부처럼 곱게 다듬은 대리석 위를 걷는 범부의 발길이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정교하게 깍은 돔의 천정에 있는 대리석 스크린을 통해 은은하게 비치는 햇빛을 받으면서 「샤자한」의 모조석관이 그의 아내와 함께 나란히 놓여 있다. 그 바로 밑 지하에 실제의 무덤이 있으나 일반인은 관람할 수가 없다.
「타지마할」의 뒤에는 「야무나 강」이 「샤자한」의 죽은 아내에 대한 연민과 아들에 대한 분노가 함께 흐르고 있는 듯 오염된 강물이 한없이 느리게 흐르고 있다. 정문을 향해 서니 정문과 「타지마할」의 중심을 축으로 하여 좌우 대칭으로 된 정원과 구조물이 안정감을 주는 완벽한 예술작품임을 느끼게 한다. 이 위대한 불휴의 예술품을 남긴 조각가는 이 보다 더 좋은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건물 완공 후에는 그의 손을 잘라버렸다는 비정함의 스토리가 내려오고 있다. 정문 위에 있는 스물두개의 작은 돔은 「타지마할」을 22년(1632-1653년)에 걸쳐 지었음을 상징한다.
「샤자한」은 아내를 위해 건립한 흰 대리석의 「타지마할」과 대조를 이루는 검은 대리석으로 「야무나 강」 건너편에 자기가 묻힐 「제2의 타지마할」을 지으려고 했으나, 셋째 아들인 Auranzeb에게 왕권을 찬탈당하고 「아그라 성」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7년간의 유배생활의 한을 안고 1666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그의 사랑하는 아내의 곁에 묻혔다.
「샤 자한」왕자를 낳은 기념품 화테푸르 시크리
10월 12일 8시 30분 폐허의 도시인 「화테푸르 시크리(Fatehpur Sikri)」를 향해 출발했다. 한 시간 동안 인도의 농촌풍경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넓은 평야에 반듯하게 정리된 농지에는 트랙터가 작업을 하고 있었으며 2차선의 아스팔트 도로에는 마차와 트랙터가 사람과 짐을 나르는가 하면, 샤리를 입은 여인네가 머리에 사탕수수를 이고 나르는 현대와 원시가 뒤섞인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화테푸르는 무굴제국의 제3대왕인 Akbar 왕이 예언자에 의해서 기다리던 아들을 낳은 기념으로 1569년에 착공하여 1574년에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기념품인 것이다. 그때 낳은 왕자가 「샤자한」인 것이다.「니우밧트 카나」성문을 들어서니 일반 알현장과 귀빈 알현장, 크와라 궁전, 5층으로된 판치마할 궁전, 회교사원인 Mama Masjid가 있다. 무슬림 국가인 무굴제국의 Akbar 왕은 흰두교의 왕비를 맞아들여서 왕자를 낳았기 때문에 이 성을 축성하면서 회교식이 아닌 힌두교식 건물을 세운 독특한 성이다. 폐허가 된 이 성은 도읍으로 정한지 14년만에 물이 부족하여 궁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1588년에 다시 「라호르」로 천도를 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폐허의 도시로 남아 있게 되었다.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여 축성한 도읍지를 14년밖에 사용하지 않고 폐허로 만들어버린 Akbar 왕의 실정도 문제이지만 도읍까지 옮기면서 탄생을 축하받은 왕자가 그 유명한 「타지마할」을 건립한 「샤자한」이다. 탄생 때부터 축성과 인연을 맺은 「샤자한」은 재위 중에 아그라 성을 완성하고 죽은 아내를 위해 22년간(1632-1653년)「타지마할」을 건립하였으며,「타지마할」을 건립하는 기간인 1639년부터 10년간 또 델리에 「붉은 성(Red Fort)」를 축성하여 도읍을 다시 「델리」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그의 무덤인 「제2의 타지마할」을 건설할 계획을 하였으니 국력의 소진과 축성에 동원된 백성으로부터의 원성이 얼마나 컸으랴! 그러니 아들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아그라 성」에서 유배생활을 당하는 업보를 치르게 되었나 보다.
귀로에 인도 농촌의 실상을 보고
아귀같이 달라붙는 잡상인들을 뿌리치고 버스에 올라 「화테푸르」를 뒤로하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오는 길에 길가에서 ‘재주는 곰이 하고 돈은 인도인이 먹는’ 곰의 억지 트위스트를 보고는 길가의 어느 농촌에 들렸다. 낯선 사람들에 호기심을 가진 동네 아이들이 몰려든다. 농가에는 젖을 짜는 물소가 있고 울타리안의 우물가에서는 아낙네가 빨래를 하는 모습이 퍽 평화스럽다. 집 뒤에 있는 밭은 이 동네의 화장실이다. 마침 먼 곳에 뒤를 보는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인도의 농촌에는 별도의 화장실이 없다. 모든 공간이 화장실인 셈이다. 집의 구조를 들여다보니 헛간처럼 생긴 곳에 허름한 나무침상이 있는 곳이 사랑방이요 울타리안의 부엌 옆에 놓인 침상이 안방인 셈이다. 겨울이 없는 따뜻한 기후이니 벽과 난방시설이 필요 없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 밑 땅바닥에 나무 침상을 놓으면 그것이 바로 방인 것이다. 간단한 농기구와 살림에 필요한 몇 가지 도구들만 걸려있고 TV나 전자제품은 물론 가구다운 가구들은 눈에 띄지 않고 옷걸이로 쓰는 횟대와 괘짝이 몇 개 보이는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살이의 모습이다.
잠뱅이만 입은 아이들, 담배를 열심히 피우는 노인, 「사리」로 몸을 감고는 있으나 꽤재재한 여인들 모두가 피부색이 까맣고 억센 농민들의 생활은 구차스러워 보이지만 그들의 표정은 환하고 밝게 보인다. 그들은 가난을 탓하지 않고 현재의 주어진 여건에서 낙천적으로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공수특전단에서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환대하기 위해서 출근한 사단장을 비롯한 장교들과 오찬을 즐겁게 나누고는 오후 3시 40분 「아그라 공항」을 이륙하였다.
무슬렘의 힌두왕국 정벌 기념탑 꾸탑 미나르
이종관 무관은 우리들을 위해 자투리 시간이라도 활용하여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보여주어 인도를 이해시키려는 모습에서 그의 성실함을 읽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안내를 받은 곳이 무슬림의 첫 번째 왕인 「꾸탑 우딘(Qutab-ud-din)」이 마지막 힌두왕을 패배시킨 후 무슬림의 승리를 기념하고 왕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착공한 「꾸탑 미나르(Qutab Minar)」에 갔다. 뉴델리의 남쪽 15km 지점에 있는 이 탑은 높이 73m, 하단부의 직경이 15m, 상단부의 직경 2.5m의 5층 석탑으로서 인도에서 가장 높은 탑이며 세계적인 경이로운 작품이라고 인도인들은 자랑을 한다. 착공을 한 Qutab 왕은 1층만 완성하고는 사망하여 나머지는 그의 사위이자 후계자인 「일투트미쉬(Iltutmish)」에 의해 완공되었다. 다섯층으로 이루어진 이 탑은 발코니가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다섯층 가운데 3층까지는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4-5층은 대리석과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1368년에는 「페로즈 샤 코틀라」가 꼭대기 층을 해체하여 두층을 더 쌓은 후 둥근 지붕을 덧붙임으로써 150년 만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 지붕은 1803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훗날 1829년에 영국인 기술자 「메이져 스미스」가 무굴 양식의 둥근 지붕으로 교체했으나 이 등근 돔이 전체 탑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1848년에 제거되었다. 제거된 돔은 현재 정원에 있다. 마치 일제시대에 지배민족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경주의 석굴암을 보수한다고 일인들이 섣불리 손을 대어 귀중한 문화재를 손상시킨 것과 흡사한 사례가 이곳 인도에서도 발생한 것이다.
이 「꾸탑 미나르」보다 두 배나 더 큰 탑을 만든다고 Qutab의 후계자중의 한사람이 건설하다가 그 후 완성가치가 없다고 중단하여 기초부문만 인근에 남아 있는 Alai Minar를 보니 무굴제국의 지배자들은 만용에 찬 욕심 많은 건축가들만 있는 듯 한 생각이 든다.
탑 앞에 있는 「쿠와톱 이슬람 마지드」 광장에는 5세기경에 흰두왕 「찬드러 바르마(Chandra Varma)」가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해지는 높이 7.2m의 철 기둥이 하나 서있다. 쇠기둥에 새겨진 여섯 줄의 「산스크리트」문자에 의하면 이 쇠기둥은 원래 「비하르」에 있는 「비슈누(Vishnu)」사원 마당에 「굽타 왕조」의「찬드라굽타(Chandragupta)」2세를 기념하여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철 기둥은 16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녹슬지 않는 100%에 가까운 순도의 쇠기둥으로서 고대 힌두인들의 주조기술의 신비로움을 지금의 과학자들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 쇠기둥에 등을 대고 양손을 뒤로 돌려 감싸면 모든 소망을 이룬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보호책을 만들어 두어 접근이 어렵게 되었으니 우리의 소원을 빌어보지도 못하고 이 위대한 유적지와 하직하였다.
350년의 지배자 영국의 흔적들
「뉴델리」에 있는 모든 것이 지배자 영국이 남긴 흔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911년 캘커타에서 뉴델리로 수도를 옮겨서 신축한 정부청사와 지금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고 있는 총독의 관저가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즈파트」를 사이에 두고 「인디아 게이트」 반대편에 있는 대통령궁은 뉴델리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는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이다. 이 건물의 착공은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었으며 인도에서도 민족주의 운동이 한창 고양되고 있었지만 영국은 대영제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이 웅장한 건물을 뉴델리 한가운데 세웠던 것이다. 마치 일본이 광화문을 헐고 조선왕조의 궁궐인 경복궁 앞마당에 총독부를 세웠듯이. 「루덴스」경이 무굴 양식과 서구의 건축양식을 잘 조화하여 설계를 하여 1929년에 완공하여 당시의 총독 관저로 사용하였다. 철거된 중앙청처럼 구리로 만든 거대한 돔이 위세를 자랑하고 있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의 크기와 같은 면적인 330에이카에는 340칸의 방을 갖춘 건물과 130ha의 무갈 정원과 골프장도 갖추고 있어 대통령은 가끔 외교관을 초청하여 골프를 즐긴다고 한다.
「하버드 베이커(Herbert Baker)」가 설계한 정부청사는 라즈파트를 가운데 두고 남쪽과 북쪽으로 세워져 있다. 우리들이 방문한 재무성은 북쪽에 있으며 남쪽 건물은 외무성이 있다. 두 가지 색조의 웅장한 사암 건축물은 고전주의 양식과 무굴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원주기둥의 둥근 건물인 국회의사당도 1921년에 착공하여 1927년에 준공한 상하원이 사용하는 인도 민주주의의 전당이다.
「라즈파트」동쪽 끝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9만명의 인도 병사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일어난 북서부 전선 작전과 1919년 「파키스탄」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인도 병사들을 위한 위령탑인 「인디아 게이트」가 있다. 1921년에 착공하여 10년 만에 완공한 이 탑의 벽면에는 전사한 병사들의 이름을 새겼으며, 1970년에는 이들의 영령을 위안하고 기리는 뜻에서 ‘영원의 불꽃’을 켜두고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세계 최고(最古)의 전통의상 ‘사리’
아그라에서 델리로 가는 비행기에서 두 딸과 한 아들을 가진 40대 여인과 동석을 하였다. 붉은색의 우아한 「사리」를 입고 이마에는 붉은 「삔디」를 찍은 부유한 집안의 주부로 보였다.
불교의 발상지이면서 불교가 없는 나라, 다수의 힌두인들이 소수의 무슬림에게 지배당한 나라, 보름달 속에서 떠오르는 타지마할의 완벽한 아름다움, 죽음과 삶을 함께 포용하는 갠지스 강, 복잡함과 빈곤으로 뒤섞인 도시의 골목, 다양한 종족간의 얽힘, 인도는 너무나 다양함을 함께 지닌 나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혼돈 속에서도 하나로 특징지어지는 것은 인도인들의 모습이다. 오랜 세월동안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던 이들의 깊은 정신세계와 변함없는 인도 여성들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인도인을 상징하는 것 중에 가장 인도적인 것은 인도 여성들의 전통적인 의상인 「사리(Saree)」일 것이다. 사리는 인도의 대표적인 전통이며, 현존하는 세계의 가장 오래된 여성의상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어깨를 지나 허리를 감싸며, 배꼽을 살짝 내놓으면서 길게 감아 내리는 이 화려한 색상의 천은 인도 여인들의 우아함을 상징하고 있다. 천이 지닌 독창적인 색조와 무늬는 오랜 세월동안 원래의 형태를 지켜왔으며, 무더운 기후에 알맞게 시원스러우며 극성스러운 모기떼로부터 잘 보호해 주는 훌륭한 기능과 매혹적인 고유 의상으로서 현재도 인도 여인들의 일상 의복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날 일반적인 사리의 착용법은 허리에서 시작하여 어깨를 감고 나머지를 머리에 쓰든지 어깨 너머로 늘어뜨리든지 하는 형식이 있는데, 신분과 장소, 지방에 따라 특색 있게 입음으로써 각각의 모양에 따라 미묘한 느낌을 표현한다. 천의 재질은 면과 실크가 주종을 이루며, 혼방의 직조물도 있는데 식물에서 얻는 진한 원색의 천연 염료는 이러한 자연 섬유와 어울려 화려하면서도 깊은 색상을 창출해 낸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시원스러운 눈과 오뚝 선 코를 가진 매혹적인 인도 여인을 더욱 매혹적이게 하는 것은 「사리」와 함께 「삔디」를 빼놓을 수 없다. 시원스럽게 큰 눈과 윤기 나게 검은 머리카락, 반듯한 얼굴의 윤곽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이 양 눈썹 사이 이마 한가운데의 빨간 동그라미 삔디도 인도 여성의 대표적인 화장법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혼례식 때 신부의 이마에 동그랗게 화장하는 ‘꼰지’와 같은 「삔디」는 힌두교에서 성스러움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원래 결혼한 여자만이 하였으나 최근에는 처녀들도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가끔 애용한다고 한다.
연수를 마치고
상하의 나라, 낙천적인 삶의 지혜를 가진 국민들, 친절하면서도 자존을 지키는 범접하기 어려운 의연함을 가진 두 나라의 연수에서 우리들은 많은 것을 배웠다. 동남아의 중심축이 되고 있는 태국과 서남아 지역의 강대국인 인도는 한국의 대외정책과 경제발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며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로서 풍부한 자연자원과 더불어 우리나라와의 협력과 동반자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할 국가임을 확인하였다.
유익한 인도 연수를 위해 스케쥴을 짜고 섭외를 해준, 특히 부인이 직접 만든 솜씨로 인도를 떠나는 날 마지막 만찬까지 베풀어준 이종관 인도 무관을 비롯한 양국의 대사와 관계관들의 헌신적인 협조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전원이 해외연수를 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주신 이호승원장님과 대학원 관계관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민태식 연구장의 뒤를 이어 마무리를 잘 해준 서만식 연구장을 비롯한 성일환 간사, 총무부장을 맡아 뒷바라지를 해준 김치원 대령, 비행기 탈 때마다 보따리를 챙기느라 긴 다리를 더욱 바쁘게 쫒아 다닌 유연도 화물 부장, 가는 곳마다 분위기에 맞게 즐거운 스케쥴을 마련해 준 오세인 여행․관광부장, 사전 자료조사와 연수보고서를 준비하느라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를 짜내며 고생한 박성화 학술부장을 비롯하여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낯선 풍물과 연수과정을 담느라 남보다 몇 배나 뛰어다닌 정이기 국장과 이진혁 대령은 보고용 비디오 편집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간결하게 보고를 하여 칭찬을 받은 신태복 대령, 사진을 정리하여 나누어준 조충구 대령을 비롯하여 모든 단원들의 협력이 돋보이는 연수였다. 물론 단장과 지도교수의 퍽 넓은 지도력 덕분에 더 알차고 보람 있는 성과를 거두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연수보고를 마치고 해단식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의 나라를 함께 연수한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기 위해서 1년에 한번씩이라도 만나자는 제안에 우리 모두가 찬성하였다. 해단식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을 위한 모임이라 기뻐하면서 즉석에서 기금을 마련하고 서동헌 국장을 사무총장으로 선임하였다. 대덕신사유람단 단장의 역할을 잘 수행한 공적으로 모든 단원의 신임을 받아 추천된 것이다.
‘City of Love’라는 Agra의 캐치 프레이스에 걸 맞는 ‘Love of Agra’를 우리들 모임의 이름으로 제안하면서 연수기를 마친다.
상하의 나라 태국 인도 연수기
∙제국주의 외침을 막아낸 태국
∙찬란한 고대문명 발상지 인도
∙연수기간 : 1997. 10. 6 - 13(9일간)
∙단 장 : 윤종호 교수
∙지도교수 : 이은득 교수
∙연수자 명단(20명)
민태식 서만식 김치원 성일환 박성화
신태복 이선우 최지홍 서진현 허병일
서동헌 정이기 오세인 조충구 이진혁
정시식 유연도 임재인 민원식 박재원
∙리포트 : 정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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