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해외여행기

사진으로 보는 실크로드(1.양릉·비림)

是夢 2008. 11. 25. 00:11

 

 

사진으로 보는 실크로드(1.양릉·비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것 중의 하나가 여행이다. 여행은 미지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비하는 사전준비도 철저히 하게된다.

모든 준비는 예견되는 일에 국한되므로 예견치 못한 뜻밖의 사건에 대한 대비는 그 상황을 극복할려는 의지와 순발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의외의 사건을, 특히 말도 통하지않고 풍습도 생소한 외국의 오지(奧地)에서 당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뜻밖의 사건을 당할 때는 당황하고 난감하지만 결과가 좋턴 나쁘던 간에 어떤 형태로든 해결되기 마련이고,

헤치고 나오는 과정이 힘들었던 만큼 뇌리에 각인되는 흔적이 크게 남게되고,

흔적이 큰 만큼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새김질하게 된다.

이번 실크로드 답사는 대체적으로 당초 계회대로 잘 진행이 되었지만 현지의 열악한 사정으로 몇가지 예견치 못한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 일행들이 당황하고 초조해 했으나,

인내를 가지고 슬기롭게 잘 대처하여 지금 돌이켜 보면 오히려 그 사건들이 화제가 되어 고난을 함께 극복한 대견스러움에 더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 실크로드 답사에서 사진을 통해서 보고 느낀점을 일별(一瞥)하고 몇가지 예견치 못한 사건들을 기록하여 답사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에게 제공하고자 한다.

 

서한(西漢) 경제(景帝)의 양릉(陽陵) 

협서성(陝西省)의 서안(西安)은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다.

서안은 주(周)나라의 무왕이 세운 호경(鎬京)에서 비롯되어 한(漢)에서 당(唐)에 이르기까지 13개의 왕조가 2,000년에 걸쳐  수도로 정한 역사적 도시 장안(長安) 이다.

그런만큼 서안에는 역사적 유적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발 닿는 곳이 모두 역사적 의미가 담긴 유적들이라 역사책에 나오는 사건과 얽힌 유적만 찾으려 해도 달포는 더 머물러야겠지만 밤 늦게 도착해 하루밤 자고 오후에는 다음 행선지로 떠나야 하는 답사 일정으로서는 서너 곳을 선택해야만 한다.

서안의 으뜸 답사지로는 진시황릉의 병마용갱을 꼽아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진시황릉이 아닌 한의 3대 왕인 경제의 능인 양릉을 찾았다.

서안에서 1시간여 걸리는 함양시 정가현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는 길에 세계4대문명 발상지의 하나인 위하강(渭河江)을 보는 감회도 잊을 수 없다.

1)붉은 카펫과 꽃으로 단장한 양릉 입구(2008. 10. 26 촬영) 

경제의 양릉입구를 꽃으로 장식하고 붉은 카펫을 깔아 품격을 높이는 조경은 아마도 이번 북경올림픽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단장의 일환으로 보인다.

계단 뒤로 보이는 얕으막한 언덕처럼 보이는 곳이 경제의 능이며 맞은편 동쪽에 황후릉이 있다. 서안을 중심으로 펼처진 분지에는 산이 없는 평야지대이지만 곳곳에 크고 작은 언덕이 있다.

마치 함지박을 엎어놓은 듯한 언덕은 왕릉이거나 귀족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2)18호 굴에서 발굴한 도용의 모습(2008. 10. 26 촬영) 

양릉의 용갱은 동서 길이 320m, 남북 길이 300m로 면적이 96,000㎡ 에 이른다. 지금까지 발굴한 4개의 용갱에서 300개이상의 도용(陶俑)이 발굴되었는데 누워있는 도용의 키는 62cm 정도이며, 진시황릉의 실물크기인 도용이 서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3)용의 근접촬영한 모습(2008. 10. 26 촬영)  

양릉에서 발굴된 모든 도용에는 팔이 없고 팔이 달려야할 곳에 구멍이 나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재질의 팔을 끼운 것으로 보이지만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4)진시황릉의 실물크기의 서있는 도용(2007. 8. 22 촬영)  

 

5)전시장에 진열된 남녀 도용(2008. 10. 26 촬영)

 

 6)전시장에 진열된 기마상(2008. 10. 26 촬영)

 

7)양릉을 답사하는 독일인들(2008. 10. 26 촬영) 

양릉을 찾는 외국 답사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양릉을  찾은 독일인들 뒤로 보이는 언덕같이 보이는 것이 경제의 황후릉이다.

경제의 능이 정상부위가 일직선에 가까운 반면 황후릉은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서체(書體)의 보고 비림(碑林)

서안 비림박물관은 1087년 중국 북송 때 설립한 약 9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박물관으로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등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명필들의 서체를 비롯하여 중국역사상 진귀한 비석 3,500여점을 소장하고 있는 중국 고대서법예술의 보물창고이다.  

 

                                     1)비정의 현판 글씨는 청나라의 대신 임칙서의 글씨이다(2008. 10. 26 촬영)

임칙서는 1839년 광동의 아편무역의 단속을 명령받고 영국상인들의 아편을 압수하여 소금물에 녹여 바다로 흘러보내고 아편상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강경수단을 써서 아편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2)당 현종이 유가의 경전 효경에 주해를 붙인 효경문(2008. 10. 26 촬영) 

공자와 증자가 효도에 관해서 문답한 것을 기록한 것이 효경(孝經)으로서 유교경전중의 하나이다.

치국의 근본이 효(孝)임을 강조한 효경을 현종이 주해하여 여기에 비석으로 세워,

그것도 비림박물관의 중심에 가장 크게 세운 것은 매우 아이로니칼한 일이라 생각된다.

현종은 아들의 아내를 가로챈 임금이다.

경국의 미색인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이다. 양옥환은 현종의 18번째 아들 수왕의 아내였다.

양옥환을 보고 반한 현종이 수왕에게 "효도란 부모가 원하는 것을 알아서 하는 것이다." 

전제군주의 말은 법이요 칼이다.

아내라도 바쳐서 효도라는 미명으로 목숨을 보존해야하는 것이 생존의 법칙이다.

수왕은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아내를 바친다.

생존법칙에 충실한 그는 효자도 아니요 지아비의 자격도 없는 비굴한 인간이었다.

결국 그는 변방으로 쫓겨났으며 현종은 황음에 빠져 나라를 기울게 했다.

황제는 후안무취라던가?

아들의 아내를 효라는 명분으로 빼앗고도 효경을 주해해서 천추만대에 전하도록 비석으로 남겼으니 현종은 그 아들에게 마음에서 진심으로 울어 나오는 효를 바랐을까?

아니면 권력의 힘에 억눌린 비굴함을 즐기는 것을 효라고 해석했을까?  

 

                                                                   3)72세에 쓴 안진경의 서체(2008.10.26 촬영)  

안진경이 44세와 72세에 쓴 비가 나란히 서 있어 장년기의 웅장한 필체와 노년기의 완숙한 필체를 비교할 수 있게 해서 서체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자료가 된다.

 

      4) 조조의 포로로 있으면서 현덕에게 그려 보낸 관운장의 두 그루 대나무그림(2008. 10. 26 촬영)

조조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두 그루의 대나무에 자신은 변함없이 현덕 주군을 섬기겠다는 충성을 맹세한 서한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비록 조조에게 굽은 대나무처럼 굽히고 있지만 마음은 곧추선 대나무처럼 그렇지 않다는 자신의 지조를 그린 그림"을 조조는 알아보지 못하고 유비에게 보내게 했으나, 유비는 관우의 이 그림을 보고 동생의 마음을 알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5)소장한 비석의 서체와 화폭을 탁본하는 모습(2008. 10. 26 촬영)

전문으로 탁본을 하는 사람이 명작들을 정성드려 탁본한 것을 박물관 매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6)비림을 찾은 젊은 외국인이 스스럼없이 카메라앞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2008. 10. 26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