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해외여행기

상하의 나라 태국 인도 연수기(태국)

是夢 2006. 7. 26. 16:14
 

상하의 나라 태국 인도 연수기


鄭 時 植(국방대학원 ’97안보과정)


마음은 쾌청한 날씨처럼

 

  김포공항의 안개를 예측하기 어려워 예약된 첫 비행기를 포기하고 어렵게 구한 출국 전날(10월 5일 일요일) 대한항공편으로 상경하여 수색 하숙집에서 마지막 점검을 하는 여유를 가졌다. 약속된 시간보다 넉넉하게 집을 나서 국방대학원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이르니 부지런한 일행들이 벌써 나와 반갑게 맞이해 준다. 간사를 맡은 성일환 대령이 일행을 점검하고 유연도 대령은 준비한 선물을 챙기고 일행들의 화물에 꼬리표를 달아주느라 부산을 떨다보니 출발시간이 되었다. 단장이신 윤종호 교수가 출장기간중의 교학처장의 직무를 마무리 하고 차에 오르니 9시, 일행 스물두명의 마음은 쾌청한 날씨처럼 밝은 표정들이다.

  귀빈실에서 잠시 휴식을 가진 후 출국수속을 마치고 OZ 321편 Asiana Airline에 오르니 스츄어데스가 친절하게 맞아준다. 육중한 기체가 김포공항의 활주로를 질주하여 하늘로 치솟아 오르니 이제 우리들이 기대하던 해외연수가 -그것도 처음으로 모든 학생이 전원 참석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시작되었다. 

  서울을 이륙한 항공기는 제주도에서 샹하이를 지나 중국 남부지방을 거쳐 베트남의 다낭에서 방콕으로 가는 직항로를 택하여 방콕의 돈 무앙 국제공항에 도착한 현지 시간은 15시 40분이다. 서울과의 시차 2시간을 감안하면 5시간 40분간 날아 온 셈이다. 서해안의 굴곡이 심한 해안선을 따라 제주도의 백록담이 손바닥 만하게 보이는가 싶더니 남지나해의 푸른 바다가 두꺼운 뭉게구름에 가리어 수줍은 듯 잠시 얼굴을 내밀더니 어느 듯 중국대륙의 산악지대가 펼쳐진다.

  아시아나에서 준비한 이은득 교수의 생신 축하 파티가 열려 케이크가 잘려지고 축포가 터지면서 축하의 박수가 요란하다. 쉰 번째의 생일을 기내에서 맞은 것이다.

  인도지나반도를 흐르는 메콩 강의 흙탕물이 뱀처럼 꾸불꾸불 사행천을 이루고 우기가 끝나가는 강 유역은 홍수가 났는지 늪지대에는 황토 빛 물길이 실타래  처럼 얽혀 있다. 밀림 속에 띄엄띄엄 형성된 마을을 잇는 비포장도로가 마치 녹색 캠퍼스에 흰 줄을 그은 듯 연결되어 있다. 그 위를 솜처럼 부드럽고 풍성한 구름이 넓고 넓은 들판을 수놓고 있다.

  경지정리가 잘된 수전지대(水田地帶)가 나타나고, 좁고 넓은 아스팔트길이 서로 교차하는 도로망이 광활한 평야를 수놓고, 사람이 사는 집들의 모자이크도 제법 촘촘해 지는 것으로 보아 방콕이 가까워진 것이다. 착륙 15분전이다. 비행기의 그림자가 잘 다듬어진 골프장을 몇 개 스치는가 싶더니 그 덩치 큰 몸체를 사뿐하게 활주로에 내려놓는다.


제국주의 외침을 막아낸 태국


차오프라야강변에서 태국의 정취를

  

  돈 무앙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태국군 중위가 영접을 나와 입국수속을 도와주어 쉽게 입국하였다. VIP Room에서는 태국 국방대학원의 고문관인 Prayuth 소장과 대외협력실장인 Krisada 대령이 공항영접을 나와 우리 대표단을 맞이해 주었다. 우리 일행이 공항을 나오니 마중와 있어야 할 여행사 직원이 보이지 않는다. 단체여행객 출구가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른 우리들의 잘못이었다. 핸드폰으로 쉽게 연락이 되어 대기한 버스로 안내되었다. 매우 후덥지근한 날씨다. 관광버스가 화려하다. 독일제 벤즈나 일제 버스가 남국의 정취에 맞게 화려한 디자인을 한 바닥이 높은 고급형이다.

  만찬이 준비된 Menam Hotel로 이동하는 가운데 안내원이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면서 열심히 태국에 대한 설명을 한다. 방콕의 교통사정이 아주 좋지 않아서 출퇴근시간대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혼잡이 곳곳에서 나타나 서울보다 사정이 더 나쁜 편이란다. 거리를 누비는 차량은 대부분 일제 조립차량이며 우리나라의 현대자동차도 2년 전부터 현지 조립생산을 시작하여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특히 전자제품은 재고가 없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니 지금의 국내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우울함에 다소 위안이 된다.   

  Menam Hotel은 방콕 시가지를 관류하는 차오프라야 강(Chao Phraya River)변에 자리 잡고 있는 현대식 호텔이다. 차오프라야 강은 흙탕물을 가득 채우고 하류로 유유히 흐르고 있다.  제방도 없이 매우 완만하게 흐르는 강물은 손을 뻗으면 곧 잡힐 듯이 만수를 이루고 있어 홍수기에는 범람하여 시가지를 물바다로 만들 것으로 보이나, 지금이 우기의 끝이라 더 이상 수위가 올라오지는 않는다고 한다.  

  화물선이 육중한 선체를 이끌고 오르내리는 가운데 날렵한 보트와 유람선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며 분주하게 오가는 것으로 보아 이 강이 방콕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석양의 무지개가 차오프라야 강에서 뻗어 나와 이름 모를 사원의 종탑위에 걸려 이국에서 온 우리들을 환영한다.  

  맛의 천국이라고 자랑하는 태국요리에 기대를 하였으나 준비된 Sea Food는 그렇게 풍성하지가 못하여 다소 실망이었으나 그래도 이국적인 맛을 즐겼다. 한국관광객의 입맛에 맞는 요리코너도 마련되어 있어 우리나라 관광객이 얼마나 많이 드나드는가를 짐작케 한다.


거대한 빌딩이 치솟고 있는 방콕의 변화

  

  푸라치 차크리 장군이 침략자 버마(지금의 미얀마)를 물리치고 「차크리 왕조」를 개국하여 차오프라야 강을 따라 세운 방콕은 옛날에는 ‘동양의 베니스’라 칭송 받던 고요한 물의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인구 9백만을 넘는 국제도시로 성장하여 빌딩의 숲을 이루고 있다. 특히 4-5년 전부터 태국의 경제성장을 상징하듯 초고층 빌딩이 죽순처럼 하늘로 뻗고 있으며 이러한 빌딩들은 방콕시 당국의 엄격한 심의를 거쳐 모양이 각기 다른 특징적인 아름다운 모습으로 스카이라인을 형성해 가고 있다. 방콕 시가지 어디에서나 보이는 방콕에서 가장 높은 96층 빌딩을 LG에서 건설 중에 있으며 이러한 많은 빌딩들이 한국의 기술진에 의해 건설되고 있다고 하니, 한국인의 무한한 가능성이 또 한 번 이곳 남국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가슴이 뿌듯해 온다.

  ‘툭툭’이라고 불리는 삼륜차와 오토바이가 마치 곡예를 하듯 자가용과 택시사이를 누비면서 영업을 하고 있는 방콕의 교통난은 고가도로만이 유일한 해결책인 듯(방콕은 저지대로서 기반이 연약하여 지하철 건설이 불가능 함) 동서남북을 연결하고 있으며 지금도 건설현장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서울보다 더 혼잡한 차량의 붐빔에도 불구하고 교통사고가 거의 없을 정도로 운전사들의 양보심이 거리의 평화를 지켜준다고 한다. 체격이 깡말라 성급해 보여도 자기를 낮추고 남에게 양보하는 예의바른 국민임을 이 한 가지 교통질서에서 알 수 있다.


불황속에서도 정치적 민주화는 진행되고

 

  태국의 경제는 최근 2-3년간의 계속된 불황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해 있어 국내외 투자자들의 투자심리 불안이 계속되고, 취약한 금융기관들이 도산위기에 처하고 바트화가 평가절하의 위기에 몰림으로써 금융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Chavalit 내각은 이러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부실건설회사 금융지원, 금융기관 긴급증자, Bath화 변동환율제 채택 등 일련의 대응조치를 취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태국경제를 살리기 위해 지난 8월11일 IMF을 중심으로 한 국제금융지원 167억불(일본, IMF 각40, World Bank 15, ADB 12, 싱가폴, 말레이시아, 호주, 홍콩, 중국이 각 10, 한국, 인니가5억불)을 확보하였으나, 국민의 동요, 기업가 및 야권의 반발이 계속됨에 따라 심각한 정치위기에 몰려있다.

  4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영토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역사를 가진 태국은 항상 다른 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러한 안보상황은 강한 수비력으로 국토와 왕제(王制)를 침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군부의 세력이 막강하였으며, 군사 쿠데타에 의한 군인이 60년 동안 정치의 중추를 이루어 왔다. 1932년 첫 군사쿠데타가 발생한 후 17회의 쿠데타에 22회의 총선을 실시하는 정치적 불안은 경제발전으로 자신감을 얻은 태국 국민들에게 더 이상의 군사독재를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1991년 2월 군부 쿠데타에 대한 92년 5월 대규모 유혈민주항쟁 결과로서 그해 6월 Anand 민선 수상이 취임한 후 태국의 고질적인 쿠데타 정치의 가능성은 상당히 감소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92년 5월 이후 네 차례에 걸친 총선 실시와 총선 때마다 집권당이 교체되는 군소정당의 난립, 다수정당간의 연립내각 구성에 따른 정당간의 이해관계와 갈등으로 연정붕괴 가능성과 정치적 불안정성이 상존하고 있다. 특히 총선 승리를 위한 대규모 금권선거와 집권세력에 의한 집권기간 중 선거자금의 회수와 지지세력 후원을 위한 파행적인 국정운영이 악순환 되어 정국의 불안정성을 가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정치개혁이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다. 부정부패와 금권선거 등 부조리 척결을 위한 정치개혁은 96년 6월 헌법개정을 위한 절차 규정이 개정되어 99명의 헌법기초의회(Constitution Drafting Assembly) 위원을 선출하고, 신 헌법 1차 초안을 마련하여 국회에 제출(97. 8. 15), 9월 27일에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국왕의 재가만 남겨놓고 있다. 개헌안의 주요내용은 소선거구제 및 비례대표제 도입(현 중선거구제), 각료의 하원의원 겸직 불가, 국민의 기본권 대폭 강화, 현 임명제인 상원의 직선, 의회의 예산 집행 등 행정부 견제권 강화, 법원의 독립, 헌법재판소 행정재판소 등 신설, 부패방지위원회 권한 강화, 선거관리 위원회 신설(현 내무부 관리), 고위공직자 재산등록이다.

  96년 6월 선거에서 내각책임제의 수상으로 취임한 현 Gen. Chvalit Yongchaiyudh 내각은 출범초기에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는 듯 하였으나 경제정책의 실패로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고 연정 내 각 정당별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한 의견충돌, 고질적인 내각내의 각료직 쿼타로 인한 비능률 요인이 잠재하고 있어 Chavalit 내각도 장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가가 나돌고 있다.

  신 헌법이 공포 실시되는 명년 3-4월경이 되면 Chavalit 수상도 국회를 해산하고 5월경 신 헌법에 의거한 총선거를 실시할 일정을 제시하고 있어 태국의 정치개혁의 성공여부가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거센 제국주의의 외침을 막아낸 「차크리 왕조」

 

  1238년 크메르 제국의 수코타이(Sukhothai)를 침략하여 태국 최초의 독립왕국을 건설한 「수코타이 왕조」(1238-1378년)에 이어 1350년 수코타이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아유타야(Ayutthaya) 땅에 「라마티 보티1세」가 새 왕조인 「아유타야 왕조」(1350-1767년) 를 건설하고 1378년에 「수코타이 왕조」를 병합하여 태국 전국을 통일, 동남아시아의 대국으로 그 지위를 확보하였다. 이 왕조는 417년 33대에 걸쳐 계승되었으나 1569년 버마 군에 의해 왕도가 함락당하고 15년간 버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나레스타인 왕」의 활약으로 아유타야를 탈환하지만 태국․버마(미얀마)간의 분쟁은 계속되어 양 국민 사이에 미묘한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18세기 문화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한 「아유타야 왕조」도 군사 면에서 쇠퇴하여 1767년 버마군의 침공에 무릎을 꿇었다. 이때 버마군은 아유타야를 철저하게 파괴 약탈하고 궁전․사원을 비롯한 모든 예술품과 기록을 태워버렸다. 이러한 처절한 역사의 교훈을 딛고 일어선 현 「차크리 왕조」는 「아유타유 왕조」를 멸망시킨 버마 침공군을 격퇴하고 국권을 회복한 장군의 가문으로써 국가의 보위를 위해 막강한 군사력을 건설하여 외세를 막아왔다.

  15세기 유럽 제국은 신대륙의 발견 등 새로운 땅을 발견하면서 1450년경 이후 약 2세기 동안 세계의 많은 지역들이 유럽의 지배 하에 들어가 식민지화 되었다. 발견-탐험- 식민지화의 과정을 따라 유럽 국가들은 점차로 세계를 유럽화 하면서 영국은 인도와 버마를 속령으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미국은 필립핀을 스페인으로부터 지배권을 넘겨받아 병합하였으며,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등 아시아 지역도 아프리카와 같이 수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태국의 왕조는 제국주의의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을 지켜온 동남아시아 유일의 국가로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오고 있다

  한반도의 2.3배에 달하는 51.4만㎢의 땅에서, 국왕이 6천만의 태국 국민으로부터 정신적 지주로써  절대권자로서의 추앙을 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외세로부터 독립을 지켜온 능력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스위스에 유학중이던 열 살의 왕위 계승자인 라마 8세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자, 형으로부터 1946년에 승계한 현 라마 9세인 푸미폰(Bhumibol Adulyadej) 국왕은 국민통합의 구심점으로써 태국의 불안한 정치기반을 유지시켜 나가고 있다. 현 국왕은 검소한 생활을 솔선수범하면서 국민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어 더욱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동남아 최초의 항모보유국이 된 태국군

 

  주변의 경쟁세력인 버마, 캄보디아 등과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국가를 형성하고, 「아유타유 왕조」를 멸망시킨 버마 침공군을 격퇴하고 국권을 회복한 현 왕조가 왕실의 적극적인 주도에 의하여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고, 1932년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 전환하는 근대화 과정을 군부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되어 왕실과 군부는 국가 통합 및 국가수호의 광범위한 상징으로서 강력한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 율부린너가 주연인 영화「왕과 나(King and I)」의 모델인 라마4세 「몬쿳 왕」이 서구 식민주의의 압박을 받던 1851년에 즉위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어 국제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함으로써 국권을 보존하였다. 그는 영어와 라틴어에도 조예가 깊은 외교가이면서 일식을 예언하는 과학자이기도 하였으나 말라리아로 사망하였다.

  총병력 28만 3천명과 준군사조직인 5만 2천명의 농촌방위 의용대와 1만 8천명의 국경경비경찰은 2년 복무의 의무병역제를 채택하고 있다. 95년도의 국방비는 총예산의 12.8%인 31억 4천만 달라로서 국민총생산(GDP)의 2.26%에 해당된다. 군사력 건설목표는 최소한의 정규군을 유지하면서 양질의 최신장비를 유지하고 2001년까지 10%인 3만 명을 감축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태국군의 장비는 미국장비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후 중국장비를 대량 구입하여 다양한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노후장비의 교체와 군장비의 현대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국가의 군사력 증가에 따라 군사력 건설을 늦추지 않고 있는데, 97년에는 스페인이 제작한 헬기항공모함을 도입하여 동남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항공모함 보유국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태국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사관학교제도는 고등하교 2,3학년 과정인 2년 과정의 예비사관학교를 거쳐 5년제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상류계층의 자제들과 농촌의 엘리트 젊은이들이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육,해,공,경찰사관학교로 분리 입학하여 교육을 받게 된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나 경찰간부는 모두 선후배 또는 동기로서 동창관계를 맺게 되어 태국사회의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여 태국을 이끌어 가고 있다.

  태국 군인은 계급에 관계없이 만 60세의 연령정년만 적용되어 동기생간의 경쟁은 드물고 선․후배간의 경쟁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장교는 우리처럼 순환보직 개념이 없으며 한 번 보직된 부대에서 거의 모든 군 생활을 마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기별, 병과별, 근무부대별, 교육배경 등에 따라 형성된 다양한 계열에 따라 인사와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상하간의 의사표시는 매우 자유스러우며 하급자에 대한 기합은 거의 없어 군인은 태국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라고 한다. 의무병역제이나 현역 징집 율은 30-40%에 불과해서 입영대상자는 심지 뽑기로 입영을 결정하는 징집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농촌 출신의 젊은이들은 농촌 탈출의 좋은 기회로 보고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으나 도시의 상류사회의 젊은이들은 입영을 회피하고 있는 최근의 현상이라고 한다. 

  태국을 독립왕국으로 지켜온 수호세력인 국군통치권은 국왕이 상징적으로 가지고 있으나 국방장관과 최고사령관이 실질적으로 군사를 장악하고 있다.


언론까지 장악 막강한 영향력 가진 군부

 

  태국에 도착 이튿날 우리들은 총리실 직속기관인 태국경제사회개발기획위원회(NESDB : National Economic Social Development Board)라는 긴 이름을 가진 정부기관 공식 방문길에 나섰다. 마침 출근시간이라 그 유명한 방콕의 교통체증이 우리 일행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다. 에스콧트 하는 헌병 지프차가 약속된 9시에 맞추기가 어렵다고 판단되었는지 중앙선을 넘어 텅 빈 반대편 차선으로 우리가 탄 버스를 유도하여 손살같이 달려 몇 번이나 기다려야 할 신호를 단번에 받아 나간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변화와 마주 달려오는 차와의 충돌이 두려워  가슴을 조였으나 직진신호를 받아오던 차들이 모두 서행을 하면서 저돌해 오는 헌병차를 비켜주는 아량(?)을 베풀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울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나, 이 헤프닝(?)은, 수상이 제청하여 국왕이 임명하는 상원의 과반수가 군 출신 인사라는 것보다 더 실감나는, 군이 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준 것이다.   

  안보와 관련되는 모든 분야에 대해서는 경찰과 행정조직이 육군사령관에게 보고해야 하며, 육군사령관은 아울러 수도권 치안사령관을 겸직하고 수도권일원의 육․해․공․경찰의 모든 전투부대를 지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4대 주요 TV방송국 중에서 시청율이 높은 두 개 방송국을 군이 소유하거나 그 통제 하에 두고 있으며 전국 136개의 라디오 방송국 등 대중선전 매체를 관리하고 있다. 네 개의 개발사단(공병)을 창설하여 농촌지역의 도로건설과  치안, 보건, 농사교육까지도 지원하는 실질적인 대민지원사업을 수행하고 있어 국민의 군에 대한 신뢰가 매우 높다고 한다.

  태국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기인 1961년부터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7차 계획이 작년에 끝나고 올해부터 “제8차 경제사회 개발계획(1997-2001)”을 수립하여 추진하고 있다. Piromsakdi Laparojkit 정책기획자문관은 7차에 걸친 계획이 비교적 성공적이라고 평가를 하면서 8차 계획은 2020년도에 태국의 개발을 완성시킨다는 장기목표를 가지고 현재의 불균형적인 발전현상을 보완하여 균형적인 경제사회로 발전시키면서 경제발전에 따른 사회개발에 중점을 둔 계획이라고 진지한 설명을 해 주었다. 태국도 방콕이 국민총생산의 50%를 점하고 있어 빈부의 격차를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국가의 과제라고 보여 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없는 자」의 불만이 없어 사회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으나 풍부한 자연자원으로 「먹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은 잘 살아보겠다는 목표의식이 없어 발전의 추세가 매우 완만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수준에서 시작한 경제개발 결과가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의 3분의 1에 불과하며 2020년도에 1만2천불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그들의 사회는 매우 여유가 있어 보인다.


미국과 군사협력 상징하는 COBRA GOLD 훈련 매년 실시

 

  1976년 주둔 미군이 태국에서 철수하고 미 군사 고문단(Joint United States Militaly Advisiory Group : JUSMAG)이 잔류하여 무기판매, 합동군사훈련 등의 연락, 조정역할을 하고 있으며, 마닐라 협정(SEATO협약 : 1954년 9월 서명)과 Khoman-Rusk 공동성명(1962년 3월)에 의한 미국의 방위약속이 유효하여 유사시에는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어 있다. 82년부터 미․태 해군연합훈련인 COBRA GOLD 훈련을 태국만 일대에서 매년 실시하고 있으며, 86년부터 육․해․공군이 모두 참가하는 연합․합동훈련으로 발전시켜 미국과의 협력관계가 증진되고 있다.

  아세안 회원국간의 정치,경제,문화,사회분야에 있어서 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나, 인접국과의 정면대결을 회피하기 위한 군사동맹체로의 발전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인니, 싱가폴과의 해․공군 합동훈련과 같이 회원국간의 쌍무적인 군사협력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태,중국관계는 양국이 인지 3국에 대한 정책에 있어 협조체제를 유지하고 중국이 86년 이후 태국 군 장비현대화 계획에 맞추어 중국장비를 염가로 제공하는 등 군사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는 한국전 참전이라는 혈맹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육,해,공군사관생도 교류, 육군과 공군 참모 대학생 교류, 육군과 공군 참모대학 위탁교육, 합참대학 교류, 국방대학원생 교류, VIP교류, 연례 정보,군수회의 실시 등 상호 군사교류를 활발하게 실시해 오고 있다.


옛 친구 집 같은 포근한 국방대학원 방문

 

  의지력이 강해 보이는 공군중장인 찬차이(Chanchai Chanchidchingchai) 국방대학원장의 따뜻한 마중과 현황 브리핑을 듣고 서로간의 관심사항에 대해서 진지한 토의를 가졌으며 방문을 기념하는 선물을 교환하고는 자리를 옮겨 가벼운 리셉션을 가졌다. 국방대학원의 관계자들과 지난 봄 한국을 방문한 단장과 학생들이 함께 어울려 담소를 나누면서 낮을 익히고 서로간의 궁금증을 푸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순수한 태국 음식으로 준비한 오찬도 우리의 입맛에 그렇게 낯설지 않아 호기심을 가지고 나오는 대로 맛있게 먹었다. 테이블마다 서툴지만 서로간의 의사소통에는 별지장이 없어 옛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포근한 오찬이었다. 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강의실과 도서관을 둘러보고는 한국대사관으로 이동하였다.

  우리가 머문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리 대사관이 있다. 방콕에는 대사관 거리가 따로 있어 모든 나라의 대사관이 자국을 상징하는 건축양식과 국위에 걸 맞는 규모를 가지고 모여 있다. 우리 대사관도 시내 중심지 건물에 빌려 있다가 작년에 신축하여 이사를 했다고 하는데 6천여 평의 넓은 대지에 한식 대문과 지붕, 그리고 그 짜임새와 규모가 어느 나라 대사관보다 돋보이는 위용을 보고 우리는 조국의 성장이 자랑스러웠다.

  홍종기 정무참사관과 국방무관으로부터 태국의 일반정세와 군사정세, 그리고 우리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현황을 청취하였다.

  태국은 우리가 어려운 때 파병을 하여 우리를 도와준 혈맹의 나라이다. 1950년 10월 22일 방콕 항을 출발하여 11월 7일 부산항에 도착한 태국군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참전한 국가이다. 육․해․공군과 의료단 총 연인원 15,708명이 참전하여 철원지역의 폭챱 고지전투(Porkchop Hill Battle)에서 태국군 1개 대대가 중공군 1개 사단을 맞아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격퇴한 후 UN군으로부터 「Little Tiger」라는 별명을 받은 용맹한 부대였다. 136명의 사망자와 469명의 부상자를 낸 참전용사들은 한국전 참전협회를 만들어 한․태 우호협력에 기여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전 참전부대인 보병 제21연대(방콕에서 파타야로 가는 길목 80km지점)에 81년 전두환 대통령이 태국을 방문한 후 보내준 한국산 대리석으로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태국 군 참전 기념탑과 똑 같은 모양의 한국전 참전 기념탑을 89년도에 건립하였으며 매년 10월 22일 한국전 참전을 위해 보병 21연대가 출발한 날 21연대의 한국전 참전 기념관에서 기념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정태동 대사로부터 “장기적으로 성장잠재력이 큰 태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는 것이 양국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얻고 대사관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휴양 도시 파타야로 가는 길

 

  공식 일정을 마친 우리들은 파타야(Pattaya)로 향했다. 공식일정을 끝내고 낭만의 도시 파타야로 향하는 일행들의 기분은 홀가분하였다. 차창 밖은 우람한 빌딩을 뒤로하고 남국의 정취를 담아 가슴으로 밀려든다.

  입심 좋은 가이드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들려주어야만 자기의 본분을 다하는 양 시원찮은 마이크로 타국에서의 고달픈 신세타령까지 섞어가면서 이야기를 한다.

  태국의 미인은 동북부지방 출신이라고 한다. 가냘프고 깡마른 보잘 것 없는 태국의 여인상과는 달리 이 동북부지방의 여인은 키가 크며 피부가 희고 허리가 날씬하며 히프가 발달하였으면서도 각선미가 뛰어나 세계의 미인으로 몇 차례나 선발되었다며 특히 이들은 ‘조개가 하늘로 향했다’는 유모아도 곁들인다.

  방콕은 평균 해발이 1-1.5m에 불과하며 기층이 진흙이라서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닦으려면 기초공사를 철저히 해야만 한다. 파타야로 가는 길을 확장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 황토 흙을 가져와 성토를 하고 철근과 콘크리트로 바닥을 다진 후 침하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포장을 하기 때문에 공사기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빨리 빨리 문화’가 배워야 할 대목이다.

  길가에 보이는 농가에는 집집마다 커다란 물통이 많이 보인다. 이 물통은 우기에 빗물을 받아 두었다가 비가 전혀 오지 않는 건기에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한다고 한다. 이 빗물이  건기가 끝날 때까지 썩지 않는 이유를 모른다. 태국의 계절은 우기(5월 중순-10월), 건기(10월-2월), 여름철(2월 중순-5월)로 나누는데 지금부터 건기에 돌입하여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건기가 시작되면 온도의 변화는 크게 느끼지 못하나 건조하여 모든 식물은 잎을 떨어트려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동면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푸르른 열대림에도 낙엽이 진다는 것이다. 상상하기 어려운 계절의 변화가 찾아온다고 한다.  그것을 뒷받침이나 하듯 군데군데 갈대의 은빛 수염이 빛을 발하고 있다.

  길가에는 농지보다는 버려진 땅이 더 많아 보인다. 무언가 심은 듯해 보이나 자세히 보니 아이스케이크 같은 종자가 열리는 ‘부들’이 밭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버려진 땅에는 코브라가 득실거리고 있어 가장 주의를 해야 할 접근 금지구역이라고 한다. 독 있는 코브라에게 물리면 30분 만에 편안히 저승으로 간다고 한다. 물린 후 10분정도 지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20분이 지나면 졸음이 와서 잠들면 영원히 이승으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크레오파트라는 코브라가 담긴 바구니에 손을 넣어 고통스럽지 않고 편안한 안락사를 택했나 보다.

  방콕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10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치앙나이」에서는 뱀들의 전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증거로서 중앙일보(95. 10. 25자) 해외토픽에 난 기사를 강조하면서 킹 코브라와 구렁이 수천마리가 나타나서 생존권을 걸고 전쟁을 치루었으나 무승부로 끝났다고 한다. 그 이유는 태국의 땅꾼들이 이 전쟁소식을 듣고 모두 포로로 생포하였기 때문이란다. 인간은 여기에서도 어부지리를 하였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쇼라고는 하지만   

 

  세계 3대 쇼의 하나라고 자랑하는 알카자르 쇼(Alkazar Show)를 관람하였다. 제법 웅장하고 세련되어 보인 듯 했으나 무대의 셑팅이나 조명과 음향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는 느낌과 출연자들의 연기나 노래도 짜임새가 어색하여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놓기에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선입견 때문일까? 이러한 내 소견에 대해서 가이드는 이 쇼에 출연한 모든 사람들이 여장한 남자들이기 때문에 충분히 세계적인 쇼가 된다는 응수다. 그렇다면 나도 가이드의 주장을 부인할 수가 없다. 출연자들이 모두 동북부지방 출신처럼 키가 큰 미인들이 요염하게 그 자태를 뽐내며 무대를 휘졌고 다니기에 태국에도 저런 미인이 있는가 하고 감탄을 했으니까, 그 아름다운 미모가 여자가 아닌 남자들의 변신이라면 단연 세계적인 쇼임에 틀림없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태국에 도착하는 날 태국의 밤 문화를 즐긴다면서 라이브 쇼를 보러 갔었다. 대부분의 관람객이 한국인과 중국인이었으며 중년 남녀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입장을 하고 있었다. 공연은 시작과 끝이 없이 연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두운 관람석을 더듬거리고 찾아들어가 좌석에 앉으니 분위기가 소란스럽고 어수선하다. 여자의 생식기가 생식기능뿐만 아니라 오락기능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양날 면도칼이 수십 개씩이나 나오고 바나나로 대포를 쏘고 화살을 쏴서 풍선을 터트리는가 하면 붓으로 글씨도 쓰고 담배도 피우는 요술단지 같은 다양한 기능을 발휘하는 데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남녀가 무대에서 성행위를 실연하는 장면이 이 쇼의 크라이막스라고나 할까? 무대의 조명이나 장치가 산만하고 연기를 하는 배우들도 극적인 장면의 연출보다는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때로는 장난처럼 진지함이 부족하여 파리나 런던의 라이브 쇼나 리도 쇼에 비하면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퇴폐행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타락한 쇼에 신혼부부들이 많이 입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하였다. 신혼여행이란 새로운 가정을 꾸미기 위해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지고 서로의 개성을 파악하면서 미래를 설계하고 새로운 세계를 탐미하는 그런 소중한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신비롭고 황홀한 여행이라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부끄러움도 가시기전에 이런 가장 추악스러운 퇴폐문화를 보아서 어찌하겠다는 건가? 이러한 신혼부부가 만들어 갈 새로운 가정과 새로 태어날 2세의 정신건강이 심히 걱정스럽다.


파타야에서 활약한 ‘대덕신사유람단’

 

  알카자르(Alkzar) 극장 부근에 있는 서울식당의 한식 저녁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다. 한식이 이런 형편없는 솜씨로 태국에 시집을 왔다면 나라 망신을 시켜도 톡톡히 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깔끔한 김치 한조각도 제대로 씹어보지 못하고 씁쓰레한 기분으로 시가지를 벗어나 30여분 거리의 해변에 있는 앰버서드 호텔에 도착했다. 객실이 5천개나 되는 거대한 호텔이다. 이번 여행길에 룸메이트의 인연을 맺은 이진혁 대령과 더블베드에 함께 드는 방 배정에도 우리는 다정한 부부인양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의 코고는 소리는 못들은 채 고라 떨어지는 바람에 늘 늦게 잠을 청하는 이 대령이 고생께나 했나 보다.

  이튿날 산호섬 관광 팀과 남국의 잔디밭을 거닐어 보겠다는 골프 팀을 반반으로 나누어 오전 일정을 마치고는 다시 호텔에서 만나 예약된 서울식당을 포기하고 태국의 전통 음식인 ‘수끼’로 가벼운 오찬을 가졌다. 보잘 것 없는 식단이지만 그래도 새로운 음식이라는 호기심은 채워준 셈이다.

  농눅(Nong Noogh) 농장의 민속공연과 코끼리 쇼는 이국적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남국의 정취가 나는 정원도 볼거리가 될 정도로 잘 가꾸었다.

  파타야로 나오는 길에 길거리에 진열된 과일가게에 들려 풍성한 열대과일의 시식회를 가졌다. 과일의 왕이라고 칭송받는 ‘두리앙’은 미색과육에 지독한 냄새가 나 처음 먹기에는 거북스러우나 맛을 들이면 최고라고 한다. 영양가가 많고 정력에 좋다는 소문이 나 우리나라의 관광객이 오면 부인이 억지로 남편에게 먹인다는 일종의 보신과일인 셈이다. 과일의 여왕 ‘망고스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망고’ 긴 호박처럼 생긴 ‘파파야’ 오랜지 모양의 매우 큰 ‘소모’ 등 세계의 5대 과일의 맛을 섭렵하고 야자수 열매인 코코낫의 싱그러운 맛도 보면서 너무나 값싼 과일 파티를 즐겼다.

  저녁도 예약된 한정식을 취소하고 중심지에 있는 식당에 들려 태국의 전통음식을 청하였다. 벽이 없는 사방이 탁 트인 상하의 나라다운 정취가 물씬 나는 상당히 규모가 큰 식당이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은 우리뿐이다. 가운데 있는 홀에는 손님들에게 서비스할 전통음악 공연준비를 하고 있다. 중국음식처럼 종류에 따라 나누어 나오는 요리는 제법 풍성하고 우리 입맛에도 맞아, 곁들인 맥주 맛이 이국의 풍경과 어울려 계획된 만찬보다는 훨씬 정겹고 운치가 있다.

  이제 포식을 하였으니 남은 일은 자유스럽게 태국의 밤 정취를 즐기는 것이다. 서동헌 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즉석 ‘대덕신사유람단’을 조직하여 태국의 풍물 섭렵에 나섰다. 전통 마사지 탐방조인 제1진은 오세인 대령 책임 하에 8-9명이 대거 몰려가 그 동안의 피로를 풀기로 하여 파타야에서 가장 큰 집으로 안내를 하였다. 전통 마사지는 스님들이 환자의 치료를 위해 오래전부터 사원에서 내려온 비법인데 태국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종목이라고 한다. 남은 일행은 다시 시내 중심가에 내렸다. 양쪽으로 가게가 늘어선 시장 통이다. 우리들은 느긋한 마음으로 넓은 길을 누비면서 이국의 풍물에 호기심을 돋우면서 윈도우 너머로 아이 쇼핑을 하다가 박성화, 김치원, 서진현 대령이 노천 스탠드바로 슬그머니 사라진다. 모처럼 이국에 와서 동기생끼리 정 내려고 하는데 눈감아 주기로 하고, 환전상에 들려 용돈을 바꾸었다. 호텔보다 더 많이 쳐준다. 특히 고액 달라 일수록 더 많이 주니 이 또한 즐거운 일이다. 이제 제법 호기가 나서 뒷골목으로 들어가 더 차근차근 살펴본다. 노천 스탠드바에는 서양인들이 혼자서 또는 둘이서 호스티스들과 즐기는 풍경이 여유로워 보인다. 바디 마사지 집이 있다. 단장 인솔 하에 모두 들어가서 값을 흥정하기도 하고 어여쁜 상품 구경도 하다가 뜻있는 몇 사람이 더 깊은 탐구를 하도록 남겨 놓고는 다시 유람단의 호기심을 채우러 떠난다. 이제 제법 걸었으니 피곤하기도 하여 손님이 한적한 스탠드바에 들어가 맥주를 청하였다. 아가씨들은 제법 영어로 의사소통이 된다. 맥주도 나오기 전에 껌팔이, 꽃 파는 아가씨, 구두닦이, 구걸하는 할머니 등 못살게 군다. 이것도 태국의 풍경이다. 적당히 사기도 하고 사지 않고 거절하니 쉽게 물러간다. 그렇게 악착스럽지가 않는 것이 그들의 천성인가 보다. 제법 큰 식당에서는 민속공연으로 이방인을 끌어 들인다. 세 시간이 넘는 유람단의 파타야 밤거리 섭렵의 평가회는 다음 귀국하여 보고회를 가지기로 하고 마지막 남은 단원들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미지의 세계로 사라졌다.


에메랄드 불상에 참배를 하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니 이 대령이 간밤의 연구장 소식을 전한다. 민태식 연구장이 병원에 갔다고 한다. 어제 컨디션이 좋지 않아보였으나 병원신세까지 질줄은 생각지 못했는데 걱정스럽다. 체크아웃을 하고는 모두 병원에 들렸다. 민원식 대령이 호텔의 비상차량으로 급히 병원으로 옮겨 입원을 시키고, 서동헌, 정이기 국장과 윤종호 단장이 병원에서 밤을 세고 지금은 서만식 원장과 허병일 대령이 교대를 서고 있었다. 중환자실로 이송되어 있어 단장만이 면회를 하고는 뿌리분임조원인 신태복 대령이 남고 우리는 방콕으로 향했다. 심근경색증일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이다. 그의 쾌유를 빌면서 남은 일정을 진행하였다.

  악어농장 관람계획을 가장 태국적인 왕궁과 에메랄드 사원 관람으로 변경하였다. 우리들은 먼저 1874년에 건설된 「왓 프라 케오(Wat Phra Keo)」 사원을 찾았다. 이 사원은 차크리 왕조의 수호사원으로서 에메랄드 불상이 안치되어 있어 일명 「에메랄드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양식으로 세워진 모형과 색깔이 대조적인 세 개의 불탑이 사원입구에서 우리를 압도한다. 보석으로 갑옷을 입은 사천왕도 사바세계에서 온 잡귀를 쫒아낼 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다. 탑과 사원과 조각이 황금빛 현란한 원색으로 이글거리는 남국의 태양을 상징하듯 여행자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인파에 밀려 다다른 곳에서 신을 벗고 들어서니 스님이 법회를 집전하고 계신다. 진주조개로 장식된 세 개의 문이 있고 그것을 지키는 여섯 마리의 청동사자상이 서 있다. 건물의 아래 부분에는 뱀을 손에 쥐고 있는 금빛의 가루다(Garuda) 소상(小像)이 늘어서 있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반투명 녹색이 빛나는 벽옥으로 만든 「에메랄드 불상」이 조용히 좌선을 하고 있다. 높이 66cm의 조그마한 법신이 2000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이곳 「왓 프라 케오」 사원에 앉아 있다. 기원전 북인도의 파토나에서 탄생하여 300년 후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으로 옮겼다가 457년 파간 왕이 돌려받아 돌아오는 길에 배가 난파되어 바다 속에 가라앉아버렸으나 파도에 밀려 앙코르 해안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치앙라이」에서 1천여 년 간 석고를 뒤집어쓰고 불탑 속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 날 벼락으로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삼배를 올렸다.

  1782년 차크리 왕(라마 1세)에 의해 세워진 왕궁은 현재는 국왕이 살고 있지 않으며, 국가의 공식행사 때에만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역대 왕들의 대관식을 하는 「두싯 궁전」, 「차크리 왕조」 100주년을 기념하여 라마 5세가 세운 「차크리 궁전」 등 태국의 고대와 근대의 건축양식이 경연을 하는 왕궁과 사원의 화려함과 웅장한 자태에 압도되었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자연자원이 풍부한 나라, 년 간 5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드는 나라, 특히 자긍심과 자신감에 찬 국민들의 발랄한 모습은 이 나라의 무한한 성장 잠재력을 엿볼 수 있었다.

  돈 무앙 공항에서 정이기 국장이 행운을 잡았다. 인디아 에어 라인에서 인도 독립 50주년을 기념하는 방콕-델리간 왕복항공권 복권에 당첨된 것이다. 1,600달라에 해당되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우리 일행의 인도 방문길에 서광이 비치는 기분 좋은 징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