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해외여행기

히로시마의 한국인 위령탑

是夢 2006. 7. 26. 15:41
 

                  히로시마의 한국인 위령탑


                                                      鄭  時  植(大邱廣域市 西區 副區廳長)

 

  늦잡은 휴가를 아들과 함께

  4대 지방선거를 치르고 곧 이어 민선시장의 취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정을 펼치려는 의욕적인 새 시장의 시정에 대한 열정으로 모든 직원이 긴장한 가운데 업무보고와 새로운 시책 개발 등 분주한 나날을 보내다가 7월 하순 서구 부구청장의 중책을 맡게 되어 업무파악 등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여름 한더위를 다 보내고,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잠시 쨤을 내어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아내는 3학년 담임을 맡아 여름방학에도 보충수업으로 쉴 틈이 없었으니 10월 상달 입시준비에 여염이 없는 제자들을 두고 어찌 늦게 얻은 남편의 휴가 파트너가 되어줄 수 있겠는가?  귀하게 얻은 휴가를 어디서 누구와 보낼까 고심하다가 대구공항에서 히로시마로 전세기가 뜬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 일정에 맞추기로 하고 교사임용 순위고사 준비를 하고 있는 아들과 동행하기로 마음먹고는 哲이의 동의를 구해냈다.

  부자가 홀가분한 기분으로, 그러나 부자간의 외국여행이 처음일 뿐만 아니라, 철이 든 후부터는 부모와 같이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자식들의 습성 때문에 평소에도 함께 여행 할 기회가 없어 이번 여행이 부자간에 서로를 이해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최초로 원폭 투하된 히로시마

  쥬고쿠(中國)지방의 중심도시인 히로시마(廣島)는 2차대전을 종전으로 이끄는데 결정타를 준 인류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도시로 기억하고 있다. 군국주의가 세계를 제패할려는 잘못된 야심을 무산시키고 일본 본토를 점령하는데 소요될 시간과 연합군의 인적 물적 희생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선량한 일본국민의 희생도 줄인 전략적인 군사계획이었다. 그러나 원폭으로 인한 가공할만한 위력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파괴력과 민간인의 희생을 가져와 핵에 대한 인류의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를 마련한 도시라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B29에 실려 온 한 개의 원자폭탄으로 순식간에 초토화된 시가지. 그러나 지금은  인구 114만의 평화도시로 부흥하여 세계인류평화를 위해 공헌하는 물과 초록과 문화의 도시를 전개하고 있다. 히로시마 북쪽을 둘러싸고 있는 ‘히지산’에서 발원한 오타강(太田川) 하구 삼각주에 펼쳐진 물의 도시의 기원은 400년전, 전국시대의 무장 데루모토가 갈대가 우거진 수향(水鄕)지대에 히로시마성(廣島城)을 축성함으로서 성시(城市)가 이루어져 간척으로 시가지를 확장하였다. 1889년에 시제(市制)가 시행된 후 매립과 주변 마을과의 합병으로 시가지를 확장하여 현재는 동서 약 35km, 남북 약35km, 면적 740.18㎦에 이르고 있는 정령지정도시(1980년 지정)가 되어 1994년에는 아시안 게임을 치른 국제도시로 발돋음 하고 있다.  

  시가지를 6개의 강이 완만히 흘러 세토나이카이(瀕戶內海)로 들어가는 ‘물의 도시’로 불리는 히로시마는 옛날부터 수운을 이용한 축성과 도시건설이 이루어졌으며 1889년에 축항한 우지나항은 군항으로 개항하여 청일전쟁 당시 대본영이 자리 잡아  막강한 일본해군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후에도 무역항으로 발달하여 1932년에 히로시마항으로 개칭하였다. 2차대전 당시 원폭 투하의 목표가 된 것도 중공업을 중심으로 발달한 히로시마의 군수산업을 파괴하여 일본의 전쟁 수행능력을 약화 시키는데 있었다고 한다.


  평화기념공원과 원폭 피해 한국인 위령탑 

  10월 14일 새벽, 哲이와 함께 ‘평화기념공원’ 관광에 나섰다. 가는 길목에 있는, 청일전쟁 당시 대본영이 자리를 잡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히로시마성이 400여년의 역사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에 데루모토가 축성한 이 성은 1945년 8월 6일 원폭투하로 붕괴되었으며 현재의 망루는 1958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망루에는 그림병풍과 미술공예품 등, 히로시마의 역사와 성시의 건립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고 하나 볼 시간을 갖지 못했다.

  평화기념 공원 북쪽 아이로이다리(相生橋) 옆에 있는 ‘원폭 돔’은 원폭이 폭발한 중심지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었던 당시 히로시마 산업장려관의 피해를 입은 상태를, 일본인은 물론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원형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보존하고 있는 원폭피해의 증거물인 셈이다. 5-6층 정도의 철근콘크리트 건물 원형의 돔 형태를 가진 지붕은 철근만 앙상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돔을 받치고 있는 건물의 벽체는 멀리서 보아 상흔을 볼 수가 없으나, 없어진 창틀과 연결된 건물의 벽체가 심하게 부서져 마치 2,000년 전에 건설된 로마의 원형극장을 보는 것 같은 몇천년이 흘러간 폐허의 느낌을 주는 원폭의 참상을 실감케 하였다.

  혼카와(本川)와 모토야스카와(元安川) 사이의 삼각주에 자리 잡고 있는 평화기념 공원은 폭심지(暴心地)에 인접하여 피해가 매우 심했던 곳으로 원폭이 투하된 ‘운명의 날’ 이래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는 수많은 기념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평화기념 자료관에는 ‘운명의 날’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핵무기가 없어지는 그날까지 불타오르는 평화의 불꽃, 원폭사망자의 명부를 넣어 둔 원폭위령비, 학교 또는 각종 직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위령비, 평화를 기원하는 관음보살상 등, 온통 원폭피해자의 넋을 위로하고 인류의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여행 온 학생들이 인솔교사의 설명을 듣는 자세도 흐트러짐 없이 진지하고 엄숙하다.

  평화기념 공원에서 혼카와다리(本川橋)를 건너면 오른쪽에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수 있는 거북이  받침에 용머리를 한 커다란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이 평화기념 공원 밖으로 밀려나와 1970년에 건립된 ‘원폭 피해 한국인 위령탑’이다. 2,000여명의 원한 맺힌 한국인이 원폭투하로 귀중한 목숨을 잃었으나 그들의 넋을 달래려는 한국인과 한국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시(廣島市) 당국은 평화기념 공원 내에는 설치 할 수 없다는 고집으로 이렇게 공원 밖으로 밀려나 있다는 것이다.

  원폭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이 다시는 이런 원폭의 피해가 없기를 기원하는 공원에, 원폭으로 사망한 원혼을 위로 하려는 간절한 소망을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공원 내에 위령비를 세우지 못하게 하는 그들의 옹졸함으로 보아 이 공원이 ‘평화기념 공원’이라기보다는 ‘전쟁반성공원’으로 개명을 해야만 되지 않을까? 하는 회의를 가지게 된다. 왜 원자폭탄이 일본 땅에 투하되게 되었는지에 대한 반성 없이, 원폭이 투하되기까지 한국을 비롯한 중국인, 동남아인, 미국인 등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 이상의 피해를 입혔는지를 그들은 반성해 보지도 않고, 오직 가만히 있는 그들에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여 일본인들만이 피해자가 된 것처럼, 원폭피해의 결과만을 가지고서 ‘미국은 가해자요, 일본은 피해자’라는 논리를 펴면서 그들만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인 것처럼 세계를 향해 호소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조금도 반성하거나 달라진 데가 없는 일본인, 특히 지금도 한국의 지배와 태평양전쟁을 정당화 하려는 망발을 서슴없이 않는 일본의 정치 지도자에게 실망을 하였다.

  아시안 게임에서 평화기념 공원에 1등으로 골인한 황영조 선수의 쾌거가 원혼이 된 동포의 넋을 달래는 최대의 경사였으리라 생각하면서 죽어서도 ‘조센징’의 차별을 받는 영혼을 위해 위령탑 앞에 깊이 고개 숙여 명복을 빌었다.   



바다위에 떠 있는 이쯔구(嚴島)신사  

히로시마에서 유람선으로 10여분이면 닿는 미야지마(宮島)섬에 내리니 꽃사슴이 관광객을 반갑게 마중한다. 선창에서 신사로 가는 길은 마사를 깔아 바닷바람과 함께 자연스러운 정취가 물씬 풍긴다. 신사는 오목하게 들어간 만(灣)의 갯뻘에 건축하여 밀물이 되면 바다물이 건물의 마루아래까지 잠겨 버려, 마치 바다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용궁전(龍宮殿)의 아름다움은 일본 3경중(三景中)의 하나라고 자랑 할만 하다. 특히 석양의 햇살이 멀리 바다의 입구를 지키는 ‘토리이’(鳥居:우리나라의 홍살문에서 유래된 ‘天’의 변형으로서 신사를 상징하는 붉은 색의 일주문)를 넘어 잔잔한 파도에 비치어 만들어 지는 은빛 파문은 세토나이카이의 매력을 담고 있다.

  신사가 있는 이 섬에서는 ‘얘기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전통 때문에 산부인과가 없으며 무덤도 없다고 하는 성스러운 섬으로 추앙되고 있어 일본 사람이면 평생에 한번은 이 신사에 참배를 하고 싶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는데도 사람들이 자꾸만 몰려들고 있다. 신사주변으로 흘러드는 냇물이 동네를 지나오는 개울인데도 우리나라의 심심산골처럼 맑은 물을 보고 자연을 보존하려는 일본인의 노력을 배우게 된다. 

 

 


                         * NEWS LLETER(산학경영기술연구원소식 제7권 제59호 19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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