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해외여행기

히로시마, 시마네현 관람기

是夢 2006. 7. 26. 15:49
 

히로시마, 시마네현  관람기


                                             鄭  時  植(대구시 서구 부구청장)


  늦잡은 휴가를 아들과 함께

  4대 지방선거를 치르고 곧 이어 민선시장의 취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정을 펼치려는 의욕적인 새 시장의 시정에 대한 열정으로 모든 직원이 긴장한 가운데 업무보고와 새로운 시책 개발 등 분주한 나날을 보내다가 7월 하순 서구 부구청장의 중책을 맡게 되어 업무파악 등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여름 한더위를 다 보내고,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잠시 틈을 내어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아내는 3학년 담임을 맡아 여름방학에도 보충수업으로 쉴 틈이 없었으니 10월 상달 입시준비에 여염이 없는 제자들을 두고 어찌 늦게 얻은 남편의 휴가 파트너가 되어줄 수 있겠는가?  귀하게 얻은 휴가를 어디서 누구와 보낼까 고심하다가 대구공항에서 히로시마로 전세기가 뜬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 일정에 맞추기로 하고 교사임용 순위고사 준비를 하고 있는 아들과 동행하기로 마음먹고는 哲이의 동의를 구해냈다.

  부자가 홀가분한 기분으로, 그러나 부자간의 외국여행이 처음일 뿐만 아니라, 철이 든 후부터는 부모와 같이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자식들의 습성 때문에 평소에도 함께 여행 할 기회가 없어 이번 여행이 부자간에 서로를 이해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10월 13일. 김포에 계류 중인 비행기가 안개로 인해 예정보다 두 시간이나 늦어진 12시 5분에 이륙하여 1시경에 히로시마공항에 착륙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일본은 잘 정리된 농토에 윤기 나는 농가의 지붕이 풍요로운 인상을 주었으며, 잘 가꾸어진 푸른 산에는 말라죽은 나무들로 갈색 모자이크된 임상이 지난  여름의 극심한 가뭄의 흔적인가 보다.

  통관과정에서 구급약으로 가져간 우황청심환(집에서 제조한)을 세관원이 마약으로 의심하였는지 꼬치꼬치 케 묻기에 뭐라고 해야 할지 설명이 어려워 난처해 하다가 필담으로 해명을 하는 동안 안내원이 와서 해결하는 해프닝을 가진 후 일본에 입국하였다.


최초로 원폭 투하된 히로시마

  쥬고쿠(中國)지방의 중심도시인 히로시마(廣島)는 2차대전을 종전으로 이끄는데 결정타를 준 인류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도시로 기억하고 있다. 군국주의가 세계를 제패할려는 잘못된 야심을 무산시키고 일본 본토를 점령하는데 소요될 시간과 연합군의 인적 물적 희생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선량한 일본국민의 희생도 줄인 전략적인 군사계획이었다. 그러나 원폭으로 인한 가공할만한 위력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파괴력과 민간인의 희생을 가져와 핵에 대한 인류의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를 마련한 도시라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B29에 실려 온 한 개의 원자폭탄으로 순식간에 초토화된 시가지. 그러나 지금은  인구 114만의 평화도시로 부흥하여 세계인류평화를 위해 공헌하는 물과 초록과 문화의 도시를 전개하고 있다. 히로시마 북쪽을 둘러싸고 있는 ‘히지산’에서 발원한 오타강(太田川) 하구 삼각주에 펼쳐진 물의 도시의 기원은 400년전, 전국시대의 무장 데루모토가 갈대가 우거진 수향(水鄕)지대에 히로시마성(廣島城)을 축성함으로서 성시(城市)가 이루어져 간척으로 시가지를 확장하였다. 1889년에 시제(市制)가 시행된 후 매립과 주변 마을과의 합병으로 시가지를 확장하여 현재는 동서 약 35km, 남북 약35km, 면적 740.18㎦에 이르고 있는 정령지정도시(1980년 지정)가 되어 1994년에는 아시안 게임을 치른 국제도시로 발 돋음 하고 있다.  

  시가지를 6개의 강이 완만히 흘러 세토나이카이(瀕戶內海)로 들어가는 ‘물의 도시’로 불리는 히로시마는 옛날부터 수운을 이용한 축성과 도시건설이 이루어졌으며 1889년에 축항한 우지나항은 군항으로 개항하여 청일전쟁 당시 대본영이 자리 잡아  막강한 일본해군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후에도 무역항으로 발달하여 1932년에 히로시마항으로 개칭하였다. 2차대전 당시 원폭 투하의 목표가 된 것도 중공업을 중심으로 발달한 히로시마의 군수산업을 파괴하여 일본의 전쟁 수행능력을 약화 시키는데 있었다고 한다.


바다위에 떠 있는 이쯔구(嚴島)신사  

히로시마에서 유람선으로 10여분이면 닿는 미야지마(宮島)섬에 내리니 꽃사슴이 관광객을 반갑게 마중한다. 선창에서 신사로 가는 길은 마사를 깔아 바닷바람과 함께 자연스러운 정취가 물씬 풍긴다. 신사는 오목하게 들어간 만(灣)의 갯뻘에 건축하여 밀물이 되면 바다물이 건물의 마루아래까지 잠겨 버려, 마치 바다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용궁전(龍宮殿)의 아름다움은 일본 3경중(三景中)의 하나라고 자랑 할만 하다. 특히 석양의 햇살이 멀리 바다의 입구를 지키는 ‘토리이’(鳥居:우리나라의 홍살문에서 유래된 ‘天’의 변형으로서 신사를 상징하는 붉은 색의 일주문)를 넘어 잔잔한 파도에 비치어 만들어 지는 은빛 파문은 세토나이카이의 매력을 담고 있다.

  신사가 있는 이 섬에서는 ‘얘기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전통 때문에 산부인과가 없으며 무덤도 없다고 하는 성스러운 섬으로 추앙되고 있어 일본 사람이면 평생에 한번은 이 신사에 참배를 하고 싶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는데도 사람들이 자꾸만 몰려들고 있다. 신사주변으로 흘러드는 냇물이 동네를 지나오는 개울인데도 우리나라의 심심산골처럼 맑은 물을 보고 자연을 보존하려는 일본인의 노력을 배우게 된다. 

 

  평화기념공원과 원폭 피해 한국인 위령탑 

  10월 14일 새벽, 哲이와 함께 ‘평화 기념공원’ 관광에 나섰다. 가는 길목에 있는, 청일전쟁 당시 대본영이 자리를 잡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히로시마성이 400여년의 역사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에 데루모토가 축성한 이 성은 1945년 8월 6일 원폭투하로 붕괴되었으며 현재의 망루는 1958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망루에는 그림병풍과 미술공예품 등, 히로시마의 역사와 성시의 건립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고 하나 볼 시간을 갖지 못했다.

  평화기념 공원 북쪽 아이로이다리(相生橋) 옆에 있는 ‘원폭 돔’은 원폭이 폭발한 중심지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었던 당시 히로시마 산업장려관의 피해를 입은 상태를, 일본인은 물론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원형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보존하고 있는 원폭피해의 증거물인 셈이다. 5-6층 정도의 철근콘크리트 건물 원형의 돔 형태를 가진 지붕은 철근만 앙상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돔을 받치고 있는 건물의 벽체는 멀리서 보아 상흔을 볼 수가 없으나, 없어진 창틀과 연결된 건물의 벽체가 심하게 부서져 마치 2,000년 전에 건설된 로마의 원형극장을 보는 것 같은 몇천년이 흘러간 폐허의 느낌을 주는 원폭의 참상을 실감케 하였다.

  혼카와(本川)와 모토야스카와(元安川) 사이의 삼각주에 자리 잡고 있는 평화기념 공원은 폭심지(暴心地)에 인접하여 피해가 매우 심했던 곳으로 원폭이 투하된 ‘운명의 날’ 이래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는 수많은 기념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평화기념 자료관에는 ‘운명의 날’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핵무기가 없어지는 그날까지 불타오르는 평화의 불꽃, 원폭사망자의 명부를 넣어 둔 원폭위령 비, 학교 또는 각종 직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위령 비, 평화를 기원하는 관음보살상 등, 온통 원폭피해자의 넋을 위로하고 인류의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여행 온 학생들이 인솔교사의 설명을 듣는 자세도 흐트러짐 없이 진지하고 엄숙하다.

  평화기념 공원에서 혼카와다리(本川橋)를 건너면 오른쪽에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북이  받침에 용머리를 한 커다란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이 평화기념 공원 밖으로 밀려나와 1970년에 건립된 ‘원폭 피해 한국인 위령탑’이다. 2,000여명의 원한 맺힌 한국인이 원폭투하로 귀중한 목숨을 잃었으나 그들의 넋을 달래려는 한국인과 한국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시(廣島市) 당국은 평화기념 공원 내에는 설치 할 수 없다는 고집으로 이렇게 공원 밖으로 밀려나 있다는 것이다.

  원폭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이 다시는 이런 원폭의 피해가 없기를 기원하는 공원에, 원폭으로 사망한 원혼을 위로 하려는 간절한 소망을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공원 내에 위령 비를 세우지 못하게 하는 그들의 옹졸함으로 보아 이 공원이 ‘평화기념 공원’이라기보다는 ‘전쟁반성공원’으로 개명을 해야만 되지 않을까? 하는 회의를 가지게 된다. 왜 원자폭탄이 일본 땅에 투하되게 되었는지에 대한 반성 없이, 원폭이 투하되기까지 한국을 비롯한 중국인, 동남아인, 미국인 등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 이상의 피해를 입혔는지를 그들은 반성해 보지도 않고, 오직 가만히 있는 그들에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여 일본인들만이 피해자가 된 것처럼, 원폭피해의 결과만을 가지고서 ‘미국은 가해자요, 일본은 피해자’라는 논리를 펴면서 그들만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인 것처럼 세계를 향해 호소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조금도 반성하거나 달라진 데가 없는 일본인, 특히 지금도 한국의 지배와 태평양전쟁을 정당화 하려는 망발을 서슴없이 않는 일본의 정치 지도자에게 실망을 하였다.

  아시안 게임에서 평화기념 공원에 1등으로 골인한 황영조 선수의 쾌거가 원혼이 된 동포의 넋을 달래는 최대의 경사였으리라 생각하면서 죽어서도 ‘조센징’의 차별을 받는 영혼을 위해 위령탑 앞에 깊이 고개 숙여 명복을 빌었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시마네현(島根縣)

전세기로 대구에서 히로시마에 도착하여 이틀 밤을 묶은 것은 시마네 현을 둘러보기 위한 경유지에 불과하였다.

  이번 여행의 주된 목적지인 시마네 현은 어떤 곳인가를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이 관광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개략적으로 책자와 안내원의 안내를 종합하여 요약해 본다.

  시마네 현의 인구는 80만이 조금 안되며, 면적은 6,706㎦로 대구의 7배가 넘는 일본국토의 1.8%로서 임야가 78.3%를 차지하는 산이 많은 지방이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스키로 유명하며 여름은 해수욕으로 이웃 현에서 많이 몰려오고 있다.

  경상북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마네 현은 경상북도와 1989년부터 자매  결연을 맺어 교류의 길을 트고 있으며 양 행정기관에서 사무관급 공무원을 파견하여 상주시키고 있다.

  시마네 현은 동부를 ‘이즈모(出雲)’, 서부를 ‘이와미(石見)’, 섬들로 된 ‘오키(隱岐)’라는 세 지역으로 대별된다. 이즈모 지방은 역사가 깊은 이즈모다이샤(出雲大社)가있으며, 또한 쇼군(將軍)의 일족이 영주로서 지배한 기간이 길었던 관계로 전통과 혈통을 중히 여기는 보수적 기질이 강한 편이다. 현청이 있는 마쓰에(松江)의 영주인 후마이코(不昧公)는 차도(茶道)를 시민들에게 장려하는 등 문화적 수준을 높이는데 힘써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여 왔다.

  이와미 지방은 지리적 요인으로 현외(縣外)지역과 경제교류가 성했던 때문인지 변화에 대한 대응력이 있으며 명치유신이 일어났을 때에는 중앙정부에 진출하여 철학이나 문학 등 문화적으로 활약한 인재도 배출되었다. 쯔와노(津和野)는 그 무렵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거리 모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오키 지방은 8세기부터 유배지로 지정되어, 신분이 높은 사람, 정치범이 유배생활을 한 지역으로서 전통문화에 한반도 문화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으며 웅대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풍부한 낙원의 동해의 섬 지방이다. 


고대 한국인의 자취가 물씬 나는 시마네

  시마네 현 해안에 밀려들어오는 쓰레기 속에는 한글이 쓰여 진 라면봉지, 요쿠르트병, 샴프용기 등이 섞여 있다고 하니 한반도와 시마네 현을 잇는 바닷길을 짐작케 하는 증거물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를 안내한 JTB의 구달회(具達會)씨의 설명도 포항에서 부유물을 띄우면 시마네 현에 와 닿는다는 실험결과가 나왔다는 이야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 바닷길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리 없으니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延烏浪)과 세오녀(細烏女)의 이야기도 이 바닷길에 얽힌 설화의 한 토막이라고 짐작이 간다. 해초를 따러 바다에 나간 연오랑 앞으로 이상한 바위 하나가 다가와 연오랑을 태우고 바닷길을 따라 일본으로 데려가 버렸고, 일본인들은 연오랑을 왕으로 추대한다. 그 바위는 남편을 찾으러 바다로 나온 세오녀 마저 일본으로 데려오고, 다시 만난 부부는 왕과 왕비로 삼았다는 스토리는 시마네 현을 방문한 필자에게 시사하는바가 크다. 고대의 한반도인이 일본에 표류하였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건너가 일본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문화의 흐름을 알 수 있으며,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은 그 시대에 조류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는 뱃길을 터득하여 문물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시마네 현의 고대문서인 ‘이즈모 풍토기(出雲風土記)’에도 신라왕자 아메노히보코(天日倉)가 등장하고 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 아메노히보코는 일본으로 도망친 아내를 찾아 일본 땅을 밟은 것으로 돼있다. 고대의 한반도인이 연오랑이든 신라왕자든 간에 그들이 내린 곳은 지금도 한반도의 음료수 병이 흘러드는 이곳 시마네 현이라는 사살을 확인할 수 있다.

  시마네 현 한가운데 앞 바다에 카라시마(韓島)라고 하는 조그마한 섬 하나가 떠있는데 시마네 사람들은 이 섬을 고대 한국인들의 도래지라고 믿고 있다고 한다.  ‘카라’는 ‘가야’의 일본 발음이라고 한다. 카라시마에서 가장 가까운 오타시(大田市)의 카미시라기 신사(韓神新羅神社)가 있다. 이 신사의 현판에는 ‘韓’과 ‘新羅’가 명기되어 있으며, 오타시의 이웃에 있는 다이사쵸(大社町)의 히노미사키 신사(日禦岐神社)안에 있는 카라쿠니 신사(韓國神社)가 ‘韓國神社’의 현판을 달고 한국여행객을 맞이하고 있다.

  마쯔에시(松江市) 현립도서관에는 ‘조선인견문기’ 등 한국배의 표류기록을 담은 책들을 볼 수 있어 우리나라의 동남해에서 표류하면 시마네 쪽으로 흘러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여행 중에는 이러한 우리의 선조들의 발자취가 물씬 나는 유적을 밟아 보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웠으나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180년 역사를 가진 화지(和紙)의 고장 쯔와노(津和野)

  10월 14일 9시경 히로시마를 출발하여 시마네 현 서쪽 변방에 자리 잡고 있는 700년의 역사를 가진 쯔와노(津和野)로 향했다. 히로시마북I.C로 진입하여 쥬고쿠자동차도로(中國自動車道)를 타고 서쪽으로 경쾌하게 달리는 버스의 차창 밖으로 보이는 울창한 삼림(森林)이 일본의 산림정책을 짐작케 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강원도 오지를 달리는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로 산세가 비슷하나 그 품속에 자라고 있는 임상(林相)은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임상은 강원도 오지의 질 좋은 적송의 천연림을 제외하고는 경제적 가치가 지극히 떨어지는 잡목림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일본의 산은 편백이나 삼나무, 적송 등 경제적 가치가 큰 수종을 인공으로 조림하여 산에서 생산되는 부가가치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산림정책도 과거의 헐벗은 산에 옷을 입히는 사방사업은 성공하였으나, 그 다음 수종개량을 해야 하는 단계에서 주춤하고 있어, 국토의 70%가 임야인 산의 생산성을 높이는 과감한 정책의 전환을 해야 할 시기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까울 뿐이다. 일본은 산에 엄청난 임목축적량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자국의 나무는 벌채 이용을 자제하고 외국에서 값싼 원목을 수입하고 있다고 하니 그들의 원대한 임업정책을 짐작할 수 있다.

  자동차전용도로를 육일시(六日市)I.C에서 빠져나와, 일원경(日原町)을 거쳐 일본의 전형적인 산촌을 40km정도 달려 목적지 쯔와노 에 닿았다. 강호시대(江戶時代)의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산간마을 쯔와노는 소경도(小京都)라고 불릴 정도로 7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고도(古都)이다.

  쯔와노의 3대 명물은 종이’와 ‘신사 ’그리고 ‘카톨릭 성지’유명한 곳이다. 관광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늘어선 중심가에는 종이 제품을 진열한 상가와 종이 제조과정을 보여주는 시설, 직접 종이를 만드는 시범도 보여주고 있으며 조그마한 종이 박물관도 있어 종이의 산지임을 강열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관광명소뿐만 아니라 고속도로의 휴게소도 각기 다른 특색 있는 상품을 진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관광지에서 판매하는 관광 상품이 어느 곳이든 똑 같으며 고속도로의 휴게소도 전국이 동일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는 값싼 중국 제품이 관광 상품의 대열에 끼어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 서글픈 현상을 본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가는 곳마다 다른 상품을 판매하는 것은 일촌일품(一村一品)운동과 일본국민의 향리를 사랑하는 마음과 가업을 계승하는 전통이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상품만을 판매하기 때문이 아닌가? 나름대로 진단을 해본다.

  관광 상품 가게에 들어서니 종이로 만든 다양한 종류의 제품이 진열되어 있다. 종이로 만든 크고 작은 각종 인형, 규격과 색깔이 다른 화선지, 종이류의 각종 선물로 가득 차 있다. 이 지역이 종이 특산품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종이의 원료인 양질의 닥나무가 생산되기 때문이며, 화지(和紙)생산 18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2000여년전부터 종이를 생산한 우리나라에는 이곳 쯔와노와 같이 종이산지로서 내놓을 만한 곳이 있는지 견문이 좁은 탓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WTO시대의 우리 농민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여기에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팔공산 성전암에서 20년을 기약하고 산문 밖 출입을 금하고 불도에 전념하고 계시는 철웅 스님에게 드릴 선물로 화선지 두 권을 샀다.

  다이꼬다니 이나리신사(太鼓谷稻成神社)는 일본의 5대신사의 하나로서 일본 각지에서 참배객이 모여들고 있다고 한다. 신사 마당에 서있는 거대한 소나무(赤松)는 신사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듯 정중한 대접을 받고 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박해를 받은 나가사끼의 카톨릭 신자들이 유배된 이곳 쯔와노는 동양의 쟌 다크라고 불리는 고니시 유끼나와(小西行長)의 양녀인 오다 쥬리아(그녀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온 한국인이라고 함)와 인연을 맺은 곳으로서 마을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고풍을 담은 아담한 성당이 카톨릭 성지의 명성을 지키고 있다.

  중견무사촌인 도노마찌 도리는 산간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을 끌어 들여 식수로 사용했다는 맑은 물에는 비단잉어가 평화를 구가하면서 1년에 120만명의 관광객을 이곳 산골로 불러들이고 있다.

우리 일행도 이 쯔와노에서 1박을 할 계획이었으나 일요일이라 일본 국내관광객의 사전 예약으로 숙소를 구할 수 없어서 다시 히로시마로 돌아갔다.


  신(神)들의 고향 이즈모다이샤(出雲大社)

10월 15일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이즈모(出雲)와 마쯔에(松江) 가기위해 일찍 서둘렀다.

  시마네현(島根縣)에서 발간한 한글판 안내 판프렛의 제목이 ‘신들의 고향 시마네’라고 되어 있다. 왜 신들의 고향인가? 그 이유는 이즈모다이샤 때문이다. 일본에는 옛날부터 음력 10월을 ‘간나즈키(神無月)’라고 하여 ‘신이 없는 달’로 부르고 있다. 이는 일본에 있는 모든 신들이 이즈모다이샤에 모여 회의를 한다는 전승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즈모지방에서는 ‘신이 있는 달’ ‘가미아리즈키(神有月)’라 부르고 있다.

  이즈모신사(出雲大社)는 200년 전인 1744년에 번주(蕃主)인 마쯔히라(松平)가 재건한 일본의 5대신사중의 하나로서 짚을 굵게 꼬아 신사 건물 출입구에 달아놓은 둘레가 8m, 길이가 19m나 되는 거대한 ‘시메나와’의 위용이 신사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인연을 맺어주는 신인 오쿠니누시노미코토(大國主命)를 모시는 이 거대한 이즈모다이샤(出雲大社)에는 음력 10월이 되면 일본 전국에 있는 800만이나 되는 각종 신들이 모여 선남선녀의 짝을 지어주는 행사를 주제하기 때문에 전국에서 결혼을 희망하는 남녀가 모여 들어 10월에는 참배객이 넘쳐 전국에서 참배객이 가장 많은 신사의 하나라고 한다.

  이 신사는 일본 신사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이며, 정치에 의한 규제가 있었던 시대에도 유일한 예외로 취급되었다. 참배도로 입구에 있는 일본 최대의 도리이(鳥居)는 1915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경내에 있는 정원수에는 소원 성취를 비는 부적이 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달려 있어, 일본사람의 의식에는 신과 항상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동해의 길잡이 히노미사끼(日御崎) 등대

  이즈모평야(出雲平野)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이즈모시(出雲市)는 이 지방 출신의 이와쿠니 시장이 민선시장으로 취임하여 ‘행정은 최대의 써비스 산업’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경영행정을 도입하여 일약 세계에 알려진 유명한 인구 6만여명의 자치도시로서 우리나라의 지방공무원들이 많이 찾아가서 지방자치의 모습을 배워오고 있다. 나도 시청을 방문하여 행정의 일면을 보고 싶었으나 짜여진 스케쥴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직 관광객의 일원으로서 충실할 수  밖에 없었다.

  이즈모시에서 40여리 떨어진 바다로 돌출한 시마네 반도의 끝,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위치 : 북위 35도 25분 51초, 동경 132도 37분 54초)에 동양최대의 히노미사끼 등대가 있다. 등대 높이 43.6m, 해발 19.7m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등대는 명치 36년 4월에 프랑스인에 의해서 건설된 백색 원형의 석조로서, 외면은 석조(石造)이나 내면은 벽돌(煉瓦)로 되어 있다. 광도 46만칸데라로서 빛이 도달하는 거리는 21해리로서 약 39km에 달하여 동해를 지나는 배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이 히노미사끼 등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해안의 경관이 수려하며, 후로온천(不老溫泉), 히노미사끼 신사 등 유명한 관광자원이 많아 이 일대가 다이센오키(大山隱崎)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등대관광을 위한 주차장, 선물 가게, 음식점, 숙박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우리 일행의 일부가 이곳에서 하루 숙박을 하였다.

 

  신지코 호반에 자리잡은 마쯔에시(松江市)

  일본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온천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히노미사끼 관광을 마치고 이즈모시의 서쪽에 있는 고료온천(湖陵溫泉)을 찾았다. 온천장은 우리나라에서 새로 개발된 온천보다는 시설이 뒤떨어지고 있으나 그렇게 붐비지 않고 주변 환경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료온천은 온천 탕의 문을 밀고 나가니 신서호(神西湖)의 아름다운 정적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이국의 정취를 한껏 즐길 수가 있었다.

  이번 여행의 주빈인 대구의 각 여행사 사장을 초대한 시마네 현의 공식 만찬이 기다리고 있어 나도 전직 관광 업무를 담당한 국장이었다는 배려로 그 초대의 대상이 되어 온천을 간단히 마치고, 아들과 헤어져 시마네 현에서 보낸 직원의 안내로 시마네 현청이 있는 마쯔에시(松江市)의 일본 전통식당으로 갔다. 시마네 현에서는 관광 업무를 담당하는 상공노동부 부장과 과장, 직원 그리고 경상북도청에 1년간 파견되었던 직원, 시마네 현에서 채용한 한국인 여자직원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대구체육계의 원로이신 박만태 선생께서 동행하여 우리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유창한 일본어뿐만 아니라 체육을 통해서 오랜 교류가 있어 시마네 현에 많은 지인(知人)을 가지고 있으며, 경상북도와 자매결연을 맺게 된 과정과 그 후의 교류역사를 잘 알고 있어 시마네 현 직원들과의 의사소통이 아주 친숙하게 이루어졌다.

  일본정식의 메뉴가 답답할 만큼 소량으로 나와 처음에는 먹는 것 같지 않아 게 눈 감추듯 나오는 대로 먹어치워 음식 재촉이 나올 정로 감질났다. 일본맥주인 ‘기린’과 정종을 가리지 않고 주거니 받거니 권하면서 맛있게 마시다보니 좌석이 무르익어 서툰 대화가 오고 가고 얼큰한 기분에 노래도 부르면서 양 지역의 교류를 위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1시경 아쉬움을 남기고 그들이 마련해준 택시로 인접한 호텔로 갔다.

  새벽에는 늦 잠자는 아들을 깨워 택시를 타고 시가지 구경에 나섰다. 마쯔에시는 신지코 호수와 나카우미(中海) 사이에 걸쳐 있는 호반의 도시로서 히로시마와 같이 ‘물의 도시’로 유명하다. 신지코호에서 나카우미로 흘러드는 대교천(大橋川)이 시가지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대교천을 잇는 다리를 중심으로 신지코 호반에 발달한 도시의 새벽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신지코호는 둘레 55km,면적 80㎦의 담수호로서 大橋, 천신천(天神川)을 통해 나카우미로 흘러서 좌타천(佐陀川)에 의해 동해로 흘러드는데 바다와 표고차가 적기 때문에 호안까지 만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 호수가 좋아 택시로 호반을 돌아 드라이브를 하다가 마쯔에성 주변을 반 바퀴 돌아 300여년전에 건립하여 보존되고 있는 옛 영주인 염견가(鹽見家)의 저택인 무가(武家)저택을 둘러보고는 일반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가를 돌아 호텔로 돌아 왔다. 

  

  370년의 역사를 가진 마쯔에성(松江城)

  10월 16일, 150여명의 마지막 날 관광은 마쯔에성부터 시작되었다. 마쯔에성에 도착하니 청승궂은 가을비가 내린다. 버스마다 어디서 준비하였던지 관광버스 안내원이 우산을 가지고 와 손님들에게 서비스를 한다. 제법 거세게 내리는 비라서 우비가 없으면 관광이 어렵게 되어 미쳐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안내원이 모직물회사의 사장으로부터 호된 꾸중을 듣고 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 안내원 아가씨는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해 한다. 싹싹하고 친절한 일본에서 ‘욱’하는 대구인의 기질을 대하고 보니 세계인이 되려면 이것부터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쯔에성은 1607년 성주 호시오 요시하루가 5년간 축성한 거성으로서 축성 후 한번도 전란 없이 명치유신을 맞이하여 천수각(天守閣)이 남아 있는 귀중한 성곽으로 알려져 있다. 마쯔에성은 외관은 5층이나 내부는 6층이며 높이 30m에 면적은 53,555평이며 천수각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마쯔에번(松江蕃)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제일 윗 층의 망루에서는 신지코를 비롯한 마쯔에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어 오르는데 다소 힘이 들어도 전시품을 관람하면서 꼭 올라 가볼만 하다.

  축성 방법이 우리나라의 축성법과는 사뭇 달라 전문가의 비교 설명을 듣고 싶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성들이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천년을 넘은 고성인 것에 비해 이곳의 성은 도꾸가와 이에야스 이후에 축성한 것으로 문외한의 눈에는 기법이 거칠고 성의 규모가 좁은 것으로 보인다.    마쯔에성 관광을 마치고 나오니 굵은 빗줄기가 가랑비로 바뀌어 노송의 잎이 모처럼 물기를 품고 싱싱한 자태로 우리들을 맞이한다. 


국제화의 노력에 총력을 기울이는 시마네현

  이번 여행의 관광단 모집은 시마네 현이 이즈모(出雲)공항을 국제공항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연인즉 이웃에 있는 돗토리현(鳥取縣)의 요나고(米子)공항과 시마네 현의 이즈모공항을 국제공항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경쟁을 하고 있는데, 두 비행장이 지척에 있어 어느 한 공항만이 국제공항으로 승격이 되고 다른 공항은 국내공항으로 남게 되어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국제공항은 시설과 국제선 전세기 취항실적, 국제선 이용객 수 등 여러 가지 심사에 필요한 항목이 있다고 한다. 이중 국제선의 취항실적과 국제선 이용객 수를 늘리기 위해 먼저 돗토리 현에서 요나고 공항을 이용하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1인당 일화 20,000엔씩 지원을 해주는 유치정책을 수립하고 서울에 있는 관광회사와 협의를 하였으나 관광객 유치에 실패를 하였다고 한다. 시마네 현에서도 곧이어 같은 유치정책을 수립하고 대구에 있는 관광회사와 협의를 하여 첫 관광단이 시마네 현을 방문하게 되어 마쯔에시의 지역 언론이 관심을 가지고 우리 일행의 방문을 크게 보도하였다. 같은 조건이면서 돗토리 현은 실패를 하고 시마네 현이 관광객 유치에 성공을 한 것은 시마네 현이 경상북도와 자매결연을 맺어 오랫동안 교류가 있어 대구시민과 경상북도 도민들의 호응이 있었으며, 대구의 여행사가 이러한 인연으로 시마네 현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한 결과로 보이며 또한 대구공항에서 전세기를 띄우면서 국제공항으로 발 돋음 하기 위한 대구시민의 염원과 일치한 성과라고 생각이 된다.

  시마네 현은 대구 관광단의 전세기를 계속 유치할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시마네 페스티벌 심포지움도 개최하여 한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95년 10월 12일 롯데호텔에서 ‘신화를 통해 본 한일 고대사의 낭만’이라는 테마로 시마네 현 상공노동부 가와카미 마사히로 부장, 나이토 세이츄 시마네 대학 명예교수와 김보현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원장, 김도윤 대가야향토사연구회 대표 등이 참석하여 양 지역의 이해 증진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신지코 호반을 끼고 있는 이즈모 공항은 이미 국제선 청사를 마련하여 두었으며,  이즈모공항의 국기 게양대에는 공항 개설 후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되어 우리 일행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고 있다. 우리들은 이 공항이 곧 국제공항으로 승격되기를 바라면서 대한항공의 전세기로 출국하였다.

  대구에도 국제공항의 염원이 이루어져 2월 9일 일본 오오사카와 1주일에 2회의 정기노선을 띄우는 첫 비행기가 취항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으면서 이 글을 마감한다.  


                                                         1996년 1월 31일


  *이번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신 88관광여행사 대표이사 李壽盛 선배님과 현지에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신 JTB의 아시아여행센타(Asian Tourist Center, Inc.)의 具達會씨를 비롯한 안내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청우회지1996년 4월호(제119호)와 8월호(제122호)에 나누어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