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해외여행기

유럽기행

是夢 2006. 7. 26. 15:37
 

*** 유럽기행(1)***

          국제화를 위한 문화행정 연수

                   

                                      정 시 식(대구시 문화체육담당관)        

  

  서울 올림픽으로 인해 붕괴된 동서간의 갈등대신 치열한 자국의 경제적 이익추구를 위한 무한의 국가경쟁시대로 들어가면서 우리나라도 국제화를 국가시책으로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환경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 지방의 문화예술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에게도 해외연수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문화체육부에서 1992년부터 각시도 문화예술 담당자로 구성한 해외 연수단을 파견하여 세계 각지의 문화시설과 유적지를 답사하여 우리문화의 세계화를 도모하고 선진 문화행정을 배움으로써 지역 문화행정 능력을 높이고 문화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 해외연수를 실시하고 있다.

  새로이 문화행정을 맡은 지 1년 3 개월 만에 이 해외연수의 기회가 나에게 돌아와 세 번 째 해외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첫 번째의 기회도 문화행정과 관련이 있는 대구시 미술협회와 대만의 대중시 미술협회간의 미술교류 전시회에 참가하기 위해 1987년, 대만, 홍콩에 나갈 기회가 있었으며, 두 번째는 1988년 1년간의 장기 교육기간 중 교육 연수차 하와이, 카나다, 미국의 각 도시를 방문 할 기회를 가졌었다.

  요즈음 사업하는 사람이면 한 달에도 몇 번씩 나가겠지만 공직자에게는 한번 나갈 기회도 얻기가 어려운데(근무 부서에 따라 다르겠지만)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진 것은 행운이랄 수밖에 없다.

  

  사전에 통보 받은 계획서를 보고 목적지인 영국의 LONDON, 프랑스의 PARIS, 샤모니(CHAMONIX), 스위스의 제네바(GENEVE), 이태리의 ROMA, NAPOLI, POMPEI에 대한 관련서적을 자료실에서 입수하여  갖다 놓고는 틈나는 대로 읽었다. 그러나 관광에 관련된 자료 이외에는 자료가 부실한데다 그나마 기억력이 쇠퇴하여 출국 전날까지도 별다른 정보가 머리 속에 입력되지 않아 哲이가 가지고 있는 관광 가이드 책 중에서 관련도시 자료를 분책하여 가방에 넣었다. 물론 훼손한 책값을 단단히 지불하였지만 그래도 비행기에서나 필요할 때 볼 수 있는 지침서가 있어 든든하였다.

  필요한 몇 가지 의약품과 옷가지를 챙겨 넣고는 처음 보는 미지의 세계와 산업혁명 이후 200여 년 간 세계를 지배한 서구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잔득 안고는 서울행 열차를 탔다.


  URAL산맥은 아직도 백설의 옷을 입고


  6월 13일 문화체육부 회의실에서 일행 15명과 상견례와 여행계획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비행장으로 향했다.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오랜 공직생활과 같은  분야의 행정에 몸담고 있다는 동료의식으로 쉽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친숙한 분위기가 되었다.

  간편해진 출국수속을 마치고는 런던으로 직항하는 대한항공의 보잉747의 거대한 몸체 속으로 들어갔다.12시 40분 정시에 이륙하여 동해를 건너 일본열도를 따라 북상을 하다가 혹가이도 못 미쳐서 연해주를 향해 러시아령인 하바롭스크 상공을 지나 한없이 넓은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우랄산맥을 넘어 13시간의 비행 끝에 현지시간 오후 5시 40분 런던 Heathrow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아시아대륙과 유럽대륙의 경계를 이루는 우랄산맥은 백설의 옷을 입은 채 양 대륙을 나누고 있어 東西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다. 제정 러시아를 넘어트리고 인민을 위한 지상천국을 약속한 공산주의국가를 탄생시킨 초강대국 소련이 75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고 거대한 연방을 해체하여  여러 개의 공화국으로 독립한 나라들이 저 우랄산맥을 중심으로 동서에 걸쳐 흩어져 굶주림을 해결하고 새로운 질서를 찾기 위해 신음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영원한 강자는 없다”는 역사의 냉엄한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의 공산제국의 붕괴가 서울올림픽의 결과라는 사실을 저 우랄산맥은 알고 있는지?  현대사에서 우리민족이 세계사에 끼친 세 가지 공헌을 다시금 생각케 한다.

  2차대전 후 독립한 신생국가중에서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수많은 후진국에게 희망을 주게 된 것이 첫 번째이며, 많은 신생국들이 독립투사들에 의한 정권장악으로 독재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데 반하여 우리나라는 민주주의를 성공시킨 유일한 국가라는 점이 그 두 번째이며. 세 번째가 서울올림픽이 12년 만에(모스크바 올림픽과 LA올림픽은 동서가 함께 참석하지 못한 반쪽 올림픽이었음) 동서가 함께 참석한 동서화합 올림픽으로서 공산제국이 한국의 발전을 직접 눈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TV를 통하여 세계의 안방에까지 비쳐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과 시장경제의 우수성을 확인한 결과 폭력과 비능률로 가득 찬 공산주의의 모순이 들어 나 그들을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우리민족은 세계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념분쟁을 종식시키고 세계평화를 이룩하는데 공헌하게 되었다.

   

















영원한 크라식의 나라 영국

 

  靑松식당에서 된장찌개와 소주 곁들여   

  런던 서쪽에 위치한 Heathrow공항은 네 개의 터미널에서 2분마다 한대씩 오르내린다는 세계3대공항의 하나라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간편한 출국수속을 마치고는 공항을 빠져 나와 한슬로라는 공항에서 가까운 마을에서 준비된 저녁식사를 하였다. “靑松”이라는 친숙한 간판이 달린 음식점에서 된장찌개 와 게장 등 한식과 제주도의 과장이 가져온 팩에든 소주로 유럽에서 갖는 첫 식사를 하였다. 이 한슬로는  중산층이하의 외국인이 많이 살고있는 주거지로서 4-50년 정도 된 단독주택이 잘 가꾸어진 정원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동아건설지사가 이 도시에 있다.


  안개가 많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없다는 런던의 날씨가 우리나라의 여름 날씨처럼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 있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우리 일행의 행운인지 유럽 체재기간 동안의 날씨는 여행하기에 아주 좋은 쾌청한 날씨여서 행여나 비가 올까봐 가져간 우산이 짐만 되었다.

  Hilton Hotel에 짐을 풀고는 Room Mate인 서울시 최 과장과 몇이서 첫날밤을 호텔에서만 보낼 수가 없어서 런던에만 있는 검은 색의 독특한 텍시를 타고는 시가지 구경에 나섰다. 구 시가지의 중심가인 피카디리 써커스(Piccadilly Circus : 여기의 Circus는 곡마단이 아니고 몇 개의 도로가 모이는 원형 광장이라는 뜻임)의 야경은 Pub(맥주 등을 파는 대중 술집)과 Live Show 그리고 여행객을 위한 선물가게만이 문을 열었을 뿐 일본인이 설치한 몇 개의 네온사인 불빛만 빼면 완전히 죽은 도시와 같다. 서성거리는 여행객에게 Live Show 가게의 어깨가 딱 벌어진 젊은이나 요염한 아가씨의 호객행위만 우리나라의 유흥가 풍경과 다름이 없을 뿐 우리나라 도시의 생기발랄한 야경은 찾아 볼 수가 없었으며   고색창연한 건물로 둘러싸여 있는 피카디리 광장의 Eros동상은 조용히 내뿜는 분수에 잠겨 옛날 대영제국의 영광을 회상하고 있었다.


  공원의 도시 런던

  이국에서 보낸 첫날밤은 비행기에 시달린 탓인지 숙면으로 늦잠을 잤다. 물론 여행기간 중 어느 하루도 잠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었다. 낮에 90kg의 체중을 이끌고 남과 같이 열심히 다니고도 공식 일과가 끝나고 나면 남들이 호텔에서 쉬는 동안 밤의 문화를 하나라도 더 보고 배우기 위해 호기심 많은 몇몇 일행과 짝을 지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잠을 줄이고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으니 숙면에 빠질 수밖에-----

  더욱이 다행스러운 것은 Room Mate가 나의 첫 잠 때의 요란스러운 자장가를 개의치 않은 것이었다. 나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늦잠 자는 습관 때문에 나보다 더 늦게 잠들어서 자장가가 그친 뒤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생각해도 고맙기 그지없다.

  새벽 산책길은 호젓하고 상쾌하였다. 호텔 옆의 가로수는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는 프라타나스를 전정을 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 키워서 시원스럽다. 노폭 20m정도의 2차선도로를 덮어 항상 그늘을 지우면서 건물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우리의 도시구조도 가로수의 가지를 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랄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다. 겨울마다 싹둑 싹둑 잘려지는 가로수의 고통과 자르는 인간의 비정함을 반복하면서 어떻게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보호하자고 외칠 수 있겠는가?

  런던에는 공원이 많다. 최초의 만국평화 박람회가 개최된 68만평의 Hide Park,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알버트 공작의 기념비가 있는 Kensington Gardens,런던시내에서 가장 큰 Regent Park,나무가 울창하면서도 꽃이 없는 공원으로 유명한 Green Park,영국의 작가 사무엘 피프스가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새들이 있는 공원”이라고 칭찬한 St. James Park등 수 많은 공원과 녹지가 런던 시가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다.

  Green Park에 꽃이 없는 유래는 Charles1세가 예쁜 첩을 열두 명이나 두고는 이 Green Park에 열두 가지의 예쁜 꽃을 심어서 첩에게 꽃 이름을 지어 주고는 그 날 낮에 산책을 하면서 꺾어 쥔 꽃 이름의 첩에게 가서 밤을 지세웠다고 한다. 이를 보고 질투에 못 이긴 왕비가 꽃이 살수 없는 화학 약품을 뿌려서 다시는 꽃이 자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새벽이면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 낮이면 하루 종일 신문이나 책을 읽으면서 소일을 하고 있는 노인, 마침 쾌청한 날씨가 며칠 간 계속되어 공원마다  뜨거운 햇빛으로 일광욕을 하는 풍경은 마치 해수욕장에 온 착각을 하게 한다. 이렇듯 런던의 공원은 런던시민의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다.


  넬슨제독을 기념하는 트라팔가 광장

  Horatio Nelson은 나폴레옹이 통솔하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군인 무적함대를 스페인의 남쪽 Trafaigar 바다에서 격파하여 조국 영국을 구하고 나폴레옹의 유럽지배의 야망을 꺾은 영국국민의 영웅이다. 그러나 그는 아깝게도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적군을 물리쳤을 때 갑자기 날아온 프랑스 군함의 포격으로 운명하게 된 것은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과 똑같으니 동서의 해군제독의 위대함이 이러한 안타까움에 있는 것인지?

  Nelson제독의 위대함을 높이로 측정하듯 그의 동상은 55m의 원 주위에 까마득히 높은 곳에 앉아 있어 비둘기들만이 그와 속삭이고 있다. 臺座의 부조에는 그의 유명한 4대 해전이 그려져 있으며 좌대 둘레의 네 마리 사자상은 스페인 함대를 녹여 만든 전승기념물로서, 영국민의 애국심과 자부심을 런던의 중심지 트라팔가 광장에서 볼 수 있다. 영국을 위해 일한 위대한 인물들은 런던의 곳곳에서 그들의 동상을 볼 수 있었으며 그들의 무덤도 Westminster 사원이나 Paul 대성당에 안치하여 영국 국민과 함께 있게 하여 그들을 기리고 있다.

  우리도 영국인의 이런 점을 배워 우리의 향토를 빛낸 선인들을 본받고 기릴 수 있도록 생전의 그분들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고 기념할 수 있는 일들을 서둘러 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쳤다.

 

  대영박물관의 미이라와 삼베

  1753년에 건립한 대영박물관은 동서고금의 유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 등 고대문명의 유물이 많기로 유명하다. 이박물관의 유물을 관람하는데는 1주일도 부족하다고 하나, 우리들은 1시간 30분간의 시간을 내어 이집트관과 그리스관 그리고 도서관을 스쳐 지나듯 관람 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관의 미이라는 내가 평소에 가진 상식의 범위를 엄청나게 뛰어 넘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미이라”라고 하면 왕이나 왕비의 시신을 썩지 않게 그대로 보존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이 미이라 전시실에는 아주 큰 전시장 두개에 가득히 전시되고 있어 그 많은 수에 놀랐으며 왕뿐만 아니라 어린이 미이라와 귀족, 심지어는 강아지와 같은 동물 미이라도 많이 있어 그 당시의 내세관과 방부 기술의 발달을 짐작케 한다 .미이라의 보관도 시신의 모양과 똑같이 조각한 나무관에 시신을 넣은 후 다시 우리나라의 나무관과 같은 관에 넣어 보관하였으며 시신은 물론이고 나무관도 전혀 손상되지 않고 5000여 년 동안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특히 시신을 싼 헝겊이 삼베인 것과 시신과 함께 부장 한 참빗(양면으로 촘촘하게 만든 대나무 빗)은 우리나라의 것과 똑같은 것이라서 그 당시 동서간의 문화교류의 결과인지 아니면 사람의 생각과 도구의 발명의 결과가 우연의 일치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는 신비한 수수께끼일 따름이다.  

  그리스관에는 희랍의 판테크레논 신전의 70%를 그대로 옮겨서 전시를 하고 있다.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제쳐두고, 이 거대한 신전을 옮겨 온 영국인의 예술을 사랑하는 의지에 감탄을 하면서도 정복자의 약탈문화라는 이미지가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도서관에 전시하고 있는 Magna Chart,악필로 소문난 쉑스피어의 친필 을 관람하고 나서는 발걸음이 자꾸만 뒤돌아 보이는 아쉬움을 남기고는 다시 London에 들리는 기회가 있으면 많은 시간을 이 박물관 관람에 할애하기로 다짐하면서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이곳 영국의 대부분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는 입장료가 없어 여행 중 틈나는 대로 들릴 수 있어 좋다.

 

  국민과 약속 지키는 철도 파업

  영국을 떠나는 날 철도 Signal Man(신호수)의 파업이 있었다. 이 파업으로 인해 도시의 지하철을 제외한 영국의 모든 철도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로 인해 모든 직장인이 자가용 출근으로 교통의 대 혼잡을 이룰 것으로 예상했으나 오히려 평소 보다 더 한가  하였다. 그 이유는  직장인들의 약 80%가 휴무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파업의 원인은 노조 측의 11% 임금 인상 요구와 정부 측의 2.5%인상안이 결렬되어 1일간의 파업을 하게 되었으며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다음주 수요일에 다시 1일간 파업을 하겠다고 예고를 해 두고 있다. 이들은 파업을 하면서도 국민들에게 그들의 요구의 타당성을 홍보하고 국민에게 불편을 끼치게 된 것을 사과를 하고 그들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면서 국민에게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또 국민에게 한 약속을 꼭 지키는 것이 우리

나라의 기약 없는 노동쟁의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LONON과 DOVER간에 깔린 기차 없는 철도 레일만 보면서 고속도로를 이용해 도-버에 도착하여 배편으로 영국과 작별을 하였다.


  영원한 Classic의 나라

  버킹감궁전의 근위병 교대식, 챨스 황태자가 다이아나와 결혼식을 가진 Paul성당, 런던탑(Tower of London), 테임즈강의 대안에서 바라본 의회정치의 본산인 국회 의사당,  대관식으로 유명한 Westminster대사원, 영국수상관저가 있는 Downing 10번지 등을 버스를 타고 지나치면서 혹은 내려서 주마간산 식으로 London시가지를 관람하였다.

  의회제도의 발상지면서도 여왕을 군주로 모시고 있는 영국의 수도 런던은 고도다운 멋을 풍기고 있다.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한 시가지의 주택도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광장이나 공원마다 영국을 위해 공헌한 위인들의 동상을 세워 선현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므로서 후세국민들의 애국심과 국가관의 교육장으로 삼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버버리가 204년 동안 Single,  Double의 두 가지 모델로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우산제조회사인 Smith & Son은 1830년부터 164년 간 한자리에서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가 하면 주택도 새로 지은 집보다는 오래된 집일수록 값이 비싼 나라!

  저녁이면 네온싸인이 없는 고요한 밤을 맞으면서도 연극 “마우스 츄리 지도세”(St Martin극장)를 42년간 공연하면서도 수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되는 예술을 지극히 사랑하는 민족! 영국은 영원한 Classic의 나라임을 짧은 일정동안에 느낀 소감이다. 





 


***유럽기행(2)*** 

예술을 첨단과학으로 승화시킨 프랑스

                                      鄭 時 植(대구시 문화체육담당관)    

  일세의 영웅도 건너지 못한 도버해협

  영국인의 콧대를 한껏 높여 준 35.4km의 Dover해협, 불과 깊이 37-46m의 바다가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근접하지 못하게 하고는 세계최강의 해양국으로 발전하여 한때는 “해가 떨어지지 않는 나라”를 만든 Dover해협을 30분 만에 나르는 배로 횡단하여 프랑스의 깔레(Calais)항에 도착했다.    

  도버와 깔레 사이에는 영․불 공동으로 해저터널을 개통하여 화물을 실어 나르고 있으며 금년 11월경부터는 TGV가 런던과 파리를 연결하여 승객을 나르게 되어 이제 도버해협의 위력도 인간의 집념으로 약화시켜 버렸다.

  이 도버해협은 1875년 8월 25~26일에 영국의 군인 M.웨브가 21시간 45분에 헤엄쳐 건넌 후 많은 젊은이들이 도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조오련 선수도 횡단에 성공한바 있다.


  영국군에 완강히 저항한 깔레시민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깔레시는 백년전쟁(1337년-1453년:잔 다크가 프랑스의 위기를 구하고 자신은 영국군에게 화형 당한 전쟁)당시 영국의 침공을 받아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고립무원으로 함락되었으며 깔레시를 영국에 할양해 주게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전쟁당시 영국군에 포위된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인질이 되었던 여섯 사람의 시민(깔레시의 귀족인 지도층 인사)을 기리기 위한 로댕의 조각“깔레의 시민”이 깔레 시청 앞에 있다. 이 조각 작품은 호암 미술관에서 프랑스정부로부터 모조품을 들여온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을 정도로 로뎅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장엄한 깔레 시청과 넓은 광장,  그리고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울리는 세계적인 작품이므로 깔레항에 내리는 기회가 있으면 이곳을 들려보도록 권하고 싶다.


  광활한 농토를 가진 농업국가

  깔레시에서 파리까지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였다. 왕복 4차선의 고속도로는  직선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평야지대를 달리고 있었다. 차량들은 지정된 속도이상으로 과속을 하는 차량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승용차의 제한속도는 우리나라와 같이 시속 100km이고 화물차들은 시속 70-80km로서 차량의 뒤편과 옆에 제한속도를 표시해두어서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해두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평야지대에는 보리 ,옥수수, 밀, 제주도의 봄 평야를 연상케 하는 유채꽃, 초지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말과 면양들, 그리고 띄엄띄엄 보이는 평화스러운 농가들, 가끔 멀리 보이는 푸른 숲들도 구릉지에 잘 가꾸어진 임상(林相)임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산다운 산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러한 풍경은 파리에서 제네바로 가는 TGV를 탓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안내원의 얘기로는 파리를 중심으로 반경 350㎞이내에는 산이 없는 평야지대로서 유럽의 곡창을 이루는 농업국가임을 알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다는 호남평야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지척에 잡히는 것이 산인 것과 비교할 때 부러움이 앞선다. 더욱이 편서풍의 영향으로 1년 내내 고르게 비가 내려 특수작물이외는 관개를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축복 받은 나라인가! 이렇게 넓은 들판을 파리-깔레-런던으로 이어지는 TGV가 힘차게 달리고 있다.


  동경의 대상 파리 입성

  예술의 도시, 유행의 도시 파리의 입성은 북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도시나 그렇듯이 파리도 변두리는 지저분하고 불결하여 첫인상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실망을 안겨 주었다. 파리에서 처음 들리는 저녁이 준비된 한식집도 몽마르뜨의 후미진 뒷골목에 있어 화려하리라고 기대했던 나는 다소 실망했으나 구수한 된장찌개와 상큼한 김치 맛이 마치 대구의 어느 뒷골목의 찌개 집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서서히 저물어 가는 파리의 변두리를 거쳐서 중심 시가지로 들어서면서 고색창연한 파리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좁은 도로를 비집고 들어선 건물의 웅장함, 구 시가지의 돌로 포장된 2차선에 불과한 좁다란 길, 이 길은 15만대의 마차통행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도 자동차의 통행에 큰 불편 없이 사용되고 있다.

  파리는 달걀을 옆으로 뉘어 놓은 것 같은 타원형 꼴로 긴 쪽 지름이 11km,짧은 쪽 지름이 8km로서 나폴레옹3세 때 오늘날의 도시형태를 갖추었다고 한다.

  콩코드광장을 거쳐 알렉산더3세 다리로 세-느강을 건너 에펠탑을 지나 일본인이 경영하는 Nikko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세-느강의 야경

  파리의 첫날밤은 유람선을 타고 세-느강의 야경을 즐기기로 하고 9시경 호텔을 나섰다. 파리의 여름은 10시가 지나도 훤하게 밝아 선창까지 걸으면서 저물어 가는 세-느강 변의 풍경들을 즐겼다. 호텔에서 걸어서 40-50분 거리에 있는 알마(Alma)다리 곁에 있는 바토 무슈(Bateaux-Mouches)유람선의 선창에서 승선하였다. 화려한 조명을 한 유람선은 수많은 외국인들을 유혹하였다. 낮에는 철골조의 괴물처럼 보이던 에펠탑에 조명이 켜지면서 수려한 자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에펠탑의 조명이 파리의 명물이라고 관광객의 칭송을 받고 있으나 최근에 이 에펠탑의 조명관계자들이 두류공원에 있는 대구타워의 조명기법을 견학하러 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유심히 살펴봤다. 타워 자체의 안정감을 가진 곡선미는 에펠탑이 돋보이나, 부드러우면서도 수줍은 듯이 그러나 밝은 몸체를 은근하게 뽑내는 한국인의 여인상을 나는 대구타워에서 보는 듯하다. 외지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구타워의 불빛을 보면 반갑고 팔공산 山寺에서 하루 밤 머무르면서 내려다보는 대구의 야경에도 이 대구타워의 위용은 빼놓을 수 없다. 우리고장에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타워가 있다고  일행들에게 자랑을 하면서 대구 방문 시 한번쯤의 관람을 권유하였다.

  세-느강 변의 풍경은 젊은이들의 낭만으로부터 시작된다. 젊은 연주자들이 구경꾼들에 둘러싸여 신나게 연주도 하고 청춘남녀가 남의 눈은 아랑곳없이 부등켜 안고 열열이 포옹하는 장면들은 영화를 보는 듯 하다.

  어둠이 깔리면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 습기 찬 바람이 짧은 소매의 티셔츠를 스며들어 제법 쌀쌀하였으나 이국의 밤 풍경에 카메라 샷타를 누르면서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고 모두들 열심히 기억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유람선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은 프랑스어와 일본어뿐이어서 만국공통어라고 생각하고 있던 영어안내가 빠진 것을 보고는 프랑스인의 영어에 대한 알레르기의 단면을 보는 듯 하며, 일본인 관광객이 절대다수임을 짐작케 한다.

  파리의 발상지인 시테섬과 생 루이섬을 빠져나가 다시 하류로 내려간다.

유명한 노틀담대성당의 위용 ,재판소, 철도역사, 루블박물관과 세-느강을 가로지르고 있는 다리의 정교한 조각이며 아름다운 곡선, 하류지역의 현대건물과의 조화를 보면서 한시간여에 걸친 세-느강의 야경은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프랑스의 3대 미술관

  파리에는 예술의 도시답게 박물관과 미술관이 수없이 많다.인상파의 풍부한 색감이 넘치는 오랑쥬리(Orangerie) 미술관, 미술품 기증자인 폴 마르모탕의 저택을 미술관으로 만든 마르모탕 미술관, 로댕의 대표작인 “생각하는 사람” “지옥의 문” “깔레의 시민들”을 볼 수 있는 로댕 미술관, 피카소의 작품 수천 점을 소장하고 있는 피카소 미술관, 의상 장식 미술관, 해양 박물관, 인류 박물관, 문화재 미술관, 영화 박물관, 우편 박물관 등 다양한 소재의 미술관을 갖추고 있어 여행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미술관중에서도 누구나 꼭 봐야할 미술관은 루블 박물관, 오르세이 미술관, 퐁피두 현대미술관을 꼽을 수 있다.

  루블 박물관은 고대에서 1848년까지, 오르세 미술관은 1848년부터 1914년까지, 퐁피두 센터는 1914년 이후 현대까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 이 세 곳만 보면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세계미술을 관람할 수 있다.

 

  LOUVRE 박물관은 1180년 Phillippe Auguste에 의해 궁전으로 신축을 시작하여 4세기에 걸쳐 오늘의 규모로 완성하였으며 1870년에 미술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건물 총면적은 약 6만평에 고대 오리엔트,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세기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2층에는 조각작품, 2,3층에는 회화 공예작품, 별관에는 19세기의 프랑스 작품이 전시 되어 있다. 밀로의 비너스, 미케란젤로의 노예, 다빈치의 모나리자, 라파엘의 아름다운 정원사의 성모, 램브란트의 목욕한 바세바, 밀레의 만종 등 세계적인 명작들을 관람할 수 있다.

  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은 프랑스 혁명 후 특히 나폴레옹이 점령했던 이탈리아나 이집트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미테랑 대통령이 돌려주겠다고 약속한 내규장각의 문화재들도 이 루블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의 입구는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게 유리로 만든 피라밑을 조성하여 눈을 거스르게 한 것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조화라는 생각이 된다.


  ORSAY 미술관은 퐁피두 대통령이 ORSAY역을 개조하여 1986년 12월 9일에 개관한 미술관으로서 유리 천장으로부터 자연채광을 이용하고 있으며 바깥 광선의 변화에 따라 조명을 컴퓨터로 조정한다고 한다.

  1층에는 Rodin을 비롯한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밀레(Millet)의 ‘이삭줍는 여인들’을 비롯한 인상파의 모네(Monet), 피사로(Pissaro), 시스레(Sislev), 후기인상파의 반 고호(Van Gogh), Paul Gauguin과 야수파, 나비파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1층부터 관람을 하다가 반 고호의 작품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전시관의 관람은 현관에서 배부하는 안내서를 보면서 맨 위층(4층)부터 시작하면 미술교과서에 나오는 유명작품들을 볼 수 있다.

   

  현대미술관이 있는 Pompidou Center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문화예술을 사랑한 Pompidou대통령이 재래시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세운 현대적인 건물이다. 세계에 공모하여 당선된 프랑스의 젊은 건축학도가 1세기를 내다보고 설계한 미래의 건축물로서 배관시설을 밖으로 노출시킨 특징을 가지고 있다. 외관은 마치 거대한 공장건물 같으나 배관시설의 보수가 용이 할 뿐만 아니라 건물의 내부 활용면적이 많아지고 동선의 합리적인 배치와 최첨단 시설을 갖춘 걸작품이라고 프랑스인이 자랑하는 작품이다.

  이 건물에 프랑스 문화성에서 운영하는 현대미술관이 있으며 피카소, 샤갈 등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나 시간에 쫓겨 볼 기회가 없어 유감스러웠다.


  몽마르뜨 언덕의 성심성당

  파리의 유명화가의 산실인 몽마르뜨 언덕에는 지금도 미래의 꿈을 안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무명화가 그룹이 있다. 즉석 스켓치도 해 주고 30-40딸라 정도 받거나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리면서 대가의 꿈을 키우고 있다. 우리나라 화가도 있는가 싶어 슬쩍 물어 보았더니 오늘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파리를 방문하는 관광객이면 누구나 한번은 들려야하는 몽마르뜨는 표고 130m의 낮은 언덕이지만 파리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란다.

  화가들의 거리를 돌아 사크레 쾨르 성당 쪽으로 내려갔다. 비잔틴 양식의 하얀 세 개의 돔을 가진 이 성당을 성심성당이라 한다. 보불전쟁에서 참패한 프랑스인의 자존심을 되찾고 국민의 마음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프랑스 전 국민이 모금한 4천만 프랑으로 1876부터 40여 년에 걸쳐 이 성당을 건립하였다.

  성당의 정면에는 프랑스 국민으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고 있는 루이9세와 잔 다크의 청동상이 수호신처럼 파리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석양빛을 받은 흰 돔의 찬란함은 프랑스인의 희망인 듯 하다. 

  넓은 성당 안에는 기념품점이 두개나 있고 한 코너에서는 장례미사를 치르는 가운데 엄숙한 분위기에 눌린 관광객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넓은 광장에는 노점상들이 고객의 눈길을 끌기 위해 온갖 묘기를 부리는 가운데 비둘기들이 평화로운 자태로 우리들을 환영해 주었다.

  파리인들은 개를 퍽 사랑하여 많은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있는데 이 개들이 배설한 분뇨를 치우는 청소인부가 특수 제작한 3륜 차를 가지고 다니면서 개똥을 진공청소기로 흡입하고는 고압호수의 물로 씻어내는 작업장면을 이 성당의 광장에서 목격하였다.

  파리인들은 휴지나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고 세-느강의 물로 하루에 몇차례씩 청소를 하고 있어 공중질서의식에 있어서는 영국인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1820년대부터 예술의 거리로 알려진 몽마르뜨도 1차대전이후 문인 화가들은 몽파르나스로 옮겨가고 무랑루즈를 중심으로 한 거리는 환락가와 사창가로 전락해 가고 있었다.

   


  룩셈부르크 공원의 자유의 여신상

  자유의 여신상이라면 뉴욕의 대형 여신상을 머리에 떠올린다.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독립 10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물로 프랑스가 선물한 것이다. 이 여신상의 원본이 파리의 룩셈부르크 공원에 보고는 그 감회가 새로웠다. 빠르똘리 작품인 이 자유의 여신상은 사람의 실물크기에 불과하나 작품성이 뛰어나고 영국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쟁취한 미국의 독립을 기념할 수 있는 상징성 때문에 미국대륙의 규모에 어울리게 확대하여 제작한 것이라 생각된다.

  미국은 이 귀중한 선물의 답례로 프랑스 혁명 200주년 축하기념으로 미라보 다리 상류 세-느강의 조그마한 섬에 룩셈부르크의 여신상과 뉴욕의 여신상 중간정도 보다 더 작은 여신상을 선물하여 유람선을 타면 볼 수가 있다. 자유의 여신상이 본고장에서 보다 선물 받은 미국의 것이 더 잘 알려진 것은 미국의 국력 때문인가? 아니면 배포 큰 프랑스인의 지혜 때문인가?

  룩셈부르크공원, 뉴욕, 세-느강에 있는 세 개의 자유의 여신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나는 행운이라고 생각된다.


  밤의 볼거리 리도 쑈

  샹제리제 거리의 리도 쇼를 보기 위해 희망자를 모집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정장차림으로 입장하였다. 좌석은 운 좋게도 무대 바로 옆자리여서 미인들의 쭉 빠진 각선미며 화장기 오른 요염한 얼굴 표정을 리얼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박진감 넘치는 율동이며 흥미진진한 묘기와 웅장한 음악, 현란한 조명 효과가 관객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 가는 본고장의 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여자만 출연하리라는 상식을 완전히 깨고 반수가 남자의 출연이며 중요배역도 남녀가 동등하게 맡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초만원을 이룬 입장객을 보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입장객의 반수이상이 여자이며 이 여자관객을 위해서는 건장하고 매력 있는 남성출연자를 등장 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2시간 가까운 공연을 보고는 좀더 봤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는 샹제리제 거리로 나갔다. 정상 입장료 95달라에 교통비와 예약 없이 간 커미션 그리고 가이드의 수고비등을 합쳐 낸 130달라가 아깝지 않았다.   

  런던에서 본 라이브 쇼의 유치함이나 이튿날 밤 몽마르뜨에서 본 생비디오의 천박스러움이 없는 꼭 권하고 싶은 파리의 밤 문화의 하나이다.


  프랑스의 문화정책

  드골 대통령 집권시기인 1959년 앙드레 말로가 문화성을 창설하여 초대 장관에 취임하여 민주적 문화발전을 주도하고, 문화의 국제협력과 지방문화원을 창설하여 전국민의 문화적 혜택을 고루 나누어 가지도록 하는 등 종합적인 문화행정을 수행하게 되었다. 작년 3월에 좌파에서 우파로 정권이 바뀐 이후 새로 부임한 쟈크 투봉 문화장관의 문화시책은

    첫째, 세계의 문화를 서로 교류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둘째, 프랑스어를 보급하여 프랑스 마인드(Mind)를 확산하고

    셋째, 산업문화 발전을 도모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첫 번째 정책은 프랑스의 문화를 세계 각 국에 보급하여 프랑스문화권의 영역을 확대하는 시책으로서 예술의 상업성보다는 순수예술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데 역점을 두어 우수한 문화가 사회의 각 분야를 선도하고 또한 수준이 낮은 문화권으로 흘러가도록 하는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 두 번째 정책은 위축되고 있는 프랑스어를 영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국 내에서는 외국어를 일체 사용 못하게 하는 정책으로 의회에서 야당의 반대와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로 법안이 보류되고 말았다.

  우리의 위대한 지휘자 정명훈도 좌파정권에서 임명한 파리국립오페라단의 상임지휘자를 우파정권에서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정치적인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재판부는 부당한 정치적 압력을 배제하는 판결을 내려 프랑스의 양심을 대변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프랑스인의 편에 섰던 것이다.

  프랑스 정부의 이러한 문화정책과 뛰어난 프랑인의 예술적 감각이 과학적 두뇌와 기술 산업이 발달한 독일보다 항공 산업이나 패션산업 등 첨단산업이 발달한 이유의 하나인 것이라고 본다.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과학자보다는 자유분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가의 사고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내는 첨단과학의 기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속전철의 기술을 과학적 합리적 사고를 대표하는 독일의 ICE가 아닌 자유와 예술을 사랑하는 프랑스의 TGV를 선택한 것도 이러한 문화적 우위가 낳은 결과라고 본다.

  우리의 국제화 시책도 우리의 우수한 문화예술이 세계화 할 수 있도록 가장 한국적인 문화의 원류를 발굴하여 세계 속에 내놓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문화의 중심이 서울이라고 하지만 서울은 너무나 서구화되어 우리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므로  이제는 지방의 문화에서 우리의 원류를 찾아야 한다. 특히 우리문화의 선도적 역할을 해온 영남의 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시 정부는 물론 우리지역의 예술인들은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세계를 향해 눈을 크게 떠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유럽기행(3)

국제평화를 안고 있는 레만호

                                      鄭 時 植(대구시 문화체육담당관)      

  국제기구가 모인 제네바

  6월 18일 파리의 리용역에서 오전 7시 24분발 TGV를 타고 스위스 쥬네브로 향했다. 파리의 겉만 보고 그것도 3박 4일이긴 하나 저녁에 도착 새벽 녁에 출발하였으니 이틀간의 견문으로는 아쉬움만 남기고 떠나야 했다.

  11시 5분 제네바의 코르나뱅역에 도착하니 영사관 직원이 나와 우리들을 맞이해 주었다. 안내된 식당에서 스위스 요리로 점심을 먹고는 버스로 시내 관광에 나섰다. 제일 먼저 안내된 곳이 아리아나 공원부근의 국제기구가 많이 있는 거리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국제유럽본부, 국제통신기구, 세계적십자본부(CICR), 세계노동기구(ILO), 세계보건기구(WHO), 세계기독교연맹(WCC), 세계난민기구, GATT본부 등 국제기구 200여 개소가 모두 이 제네바 시내에 있어 영세중립국의 면모를 이곳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낭만이 깃든 레만호

  제네바시는 레만호 서쪽 끝에 론강 하구의 좌우에 자리잡고 있는 평화스러운 호반의 도시이다. 인구 17만명 정도의 불어권에 속하는 국제도시로서 제네바인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세계정치의 영광스러운 무대로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스위스의 대표적인 문화의 도시이다.

  길이 72km,폭 14km, 최고수심 310m의 레만호는 알프스산맥이 만들어낸 최고 걸작의 아름다운 빙하호수이다. 이 호반에는 88서울 올림픽을 결정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있는 로잔(Lausanne)과 니용(Nyon), 몽틔르 (Montreaux)등의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

  ‘에밀’과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장 자크 루소의 동상이 있는 루소섬에서 바라보는 140m의 힘찬 물줄기가 치솟는 분수의 시원스러움과 한가롭게 떠다니는 욧트의 평화스러운 모습은 인간이 추구하는 파라다이스의 현장인 것처럼 느껴진다. 호반의 산책은 온갖 시름을 잊게 하고 이국의 풍경에 몰입하게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청년시절 이 길을 걷다가 벽안의 여인 프란체스카를 만나 열애에 빠졌다고 하는 레만호는 낭만이 깃든 멋진 호수임에 틀림없다.

  많은 도시가 이 호반에 있건만 바닥까지 보이는 맑은 물을 보전하기 위한 스위스인의 노력을 엿볼 수가 있다.

  영국공원에 있는 꽃시계는 세계 최초의 것이라는 안내원의 말을 의문 없이 받아들이면서 오비브(Eaux Vives) 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비브 공원은 시에 기증한 어느 독지가의 저택을 중심으로 만든 레만호와 어울러 진 근린공원으로 넓은 잔디광장과 원시림 같은 수림대, 장미원과 조각공원, 야외음악당이 갖춰져 있는 시민들과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비브 공원 정문에서 60여m 떨어진 좌측에 제2차 북미 고위급회담이 열린 북한의 대표부가 있다. 공원과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는 투시 형으로 된 높은 울타리 너머에 있는 2층 건물인 이 대표부에는 제네바에 파견된 북한의 요원들이 단체로 합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몇몇 중년의 한국인 여인을 만나 반가워 목례를 하였으나 아무런 반응 없이 지나쳐 북한 공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녀들이 북한의 여인이란 것을 알았다. 동족이면서도 이국에서 만난 반가움을 함께 나눌 여유조차 가지지 못한 저들의 체제가 얼마나 갈지?


  칼빈의 종교 개혁 기념탑

  즈네브 대학의 캠퍼스는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중심가에 있는 공원이다. 우리들이 이곳에 들렸을 때 마침 유치원생들이 야외 수업을 하고 있었다. 원생들과 학부모들이 함께 어울려서 선생님의 지휘에 따라 진지하고도 스스럼없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게임도 하는 수업광경에서 유아에 대한 사회교육의 훌륭한 방법을 보았다.

  나는 이곳 대학 내에 있는 종교개혁 기념비를 찾았다. 동쪽 담 벽을 이용한 거대한 벽면조각을 발견하였다. 높이 약 15m, 길이 100여m의 대리석 담 벼랑에 새겨진 네 사람의 조각상은 왼쪽부터 Calvin, Farel, Beza, Knox의 근엄하면서도 인자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Calvin의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9년부터 1917년에 걸쳐 세운 것이라 한다.

  Calvin은 1509년 프랑스의 파리에서 멀지 않은 느와용(Noyon)에서 출생하여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에 감동을 받아 개종한 후 신교회의 조직, 교회법의 제정, 교리의 확립에 전력하였다.

  루터에 의해 독일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은 스위스에서는 쮜리히를 중심으로 1522년 이래 쯔빈글리에 의해 진행되었으나 그의 전사로 주춤하다가 Calvin이 그 뒤를 이어서 1536년 이후 제네바를 중심으로 개혁을 일으켜 성공함으로써 제네바를 ‘프로테스탄티즘의 로마’로 일컫게 했으며, 유럽 각 국의 종교 개혁가들의 메카가 되었다.

  Calvin의 종교 개혁 이래 혁신적인 사회분위기가 이곳에서 장자크 루소를 태어나게 했고 볼테르, 바이런, 레닌이 제네바를 찾게 했다고 한다. 


  소수민족의 거리축제

  6월 19일 샤모니에서 로마로 가기 위해 다시 제네바로 나와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여유시간이 많아 간단한 기념품을 사고는 일행과 떨어져 혼자서 뒷길을 찾아 이곳저곳 Eyes Shopping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어디서 흥겨운 음악이 멀리서 들려오기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곳을 향했다. 제네바 음악대학이 있는 뒷골목에 포장을 친 노점상들이 흥청거리고 중심지에는 야외무대를 가설하여 야외공연이 흥겹게 벌어지고 있었다. 약 15m정도 되는 도로 양쪽에 20-30개의 천막을 치고는 천막마다 색깔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서 제각기 다른 토속음식들을 즐기고 있었다.

  야외무대에는 각양각색의 민족들이 꽉 둘러앉아서 비집고 들어 갈 수가 없어 먼발치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다. 멕시코 복장을 한 여자가수가 어깨춤이 나올 정도의 흥겨운 노래를 부르자 관객들은 열광적인 박수로 앵콜을 청한다. 가수는 사양하지 않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앵콜에 응하여 관객과 한 덩어리가 된다. 1년에 한번 있는 제네바의 소수민족 축제에 참가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진 것이다.

  나는 이런 귀한 연주를 로마에서도 볼 수 있었다. 로마에 늦은 시간에 도착한 우리들은 피로에 지친 일행들을 호텔에 남겨두고 서울시 최과장, 부산시 신계장과 도심지에 있는 ‘파리 카페’를 찾아 나섰다가 카페 앞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적십자 창설 1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축하 음악회가 넓은 도로에 관객을 모시고 클레식과 팝을 연주하고 있었다. 음향시설도 없는 간단한 조명, 무대도 없이 길바닥에 의자와 악보를 받치는 보면대를 놓고, 지휘자가 오르는 받침대도 없이 길바닥에 서서 지휘하는, 형식을 초월한 부담 없는 연주회인 것으로 보이나 얼핏 보아 3관으로 편성된 것으로 보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진지함은 벗어진 대머리나 백발에 가까운 머리색만큼이나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간이 의자에 앉거나 둘러선 관객들도 사뭇 엄숙하고 진지하여 다소 들뜬 우리들도 그 분위기에 빨려 들어갔다.

  문화민족다운 일면을 이 거리의 음악회에서 맛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로마의 밤거리로 나간 보람을 가졌다. 




 

유럽기행(4)


몽블랑이 낳은 샤모니의 번영

                                      鄭 時 植(대구시 문화체육담당관)

  제1회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샤모니

  6월 18일 토요일 제네바 대학에서 4시 15분에 샤모니(Chamonix)를 향해 출발했다.10분후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에서 가이드와 버스기사가 간단한 입국절차를 마치고는 훤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버스의 차창 밖 이국풍경을 즐겼다. 샤모니가 가까워지면서 스위스의 달력에서 보는 사진과 같은 멋진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가까이 다가오는 푸른 산과 멀리 만년설을 덮어쓰고 있는 알프스의 고봉이 겹치는 신비로운 풍경을 작은 카메라에 담느라 한동안 정신없이 샷타를 눌렀다. 여행 후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면서-----

  6시 가까이 되어 샤모니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Novotel에 여장을 풀었다. 비수기인 6월에는 샤모니 시내호텔들은 휴업중이라 중심지에서 약3km 떨어진 이 호텔을 예약했다는 설명이다. 단층으로 된 아담한 분위기를 풍기는 Novotel은 정원에 풀장이 있고 정원에서 몽블랑 기슭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식사 후 나는 몇몇 극성파들과 안내원을 앞세우고 마을로 가기로 하고는 걸어서 2-30분이면 충분하다는 호텔 지배인의 말만 믿고 별다른 교통수단도 없어서 걷기로 했다. 그러나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가는 자동차들의 고속운행과 인도가 따로 없는 갓길을 따라 걷기가 불안한데다가 오르막길이어서 한 시간이나 걸렸다. 땀을 흠뻑 적시고서야 중심상가에 도착했다.

  인구 1만 명 정도의 샤모니는 200년 전만 하드라도 300여명의 주민이 살던 한적한 산촌에 불과 했다. 그러다가 이 한적한 시골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775년 8월에 수정을 캐는 ‘쟉 팔만’과 의사인 ‘미셀 파가르’가 알프스 최고봉인 4,807m의 몽블랑을 초등하게 되면서 등산가들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으며, 1924년 제1회 동계올림픽이 이곳에서 개최되어 메스컴을 타면서 각 국의 스키 애호가와 관광객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세계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시가지 중심지에는 몽블랑 초등 100주년과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쟉 팔만’과 ‘미셀 파가르’의 동상이 한 블럭 떨어져 몽블랑을 바라보고 있다.

  등산의 고장답게 이곳에는 육군 고산학교와 스키부대, 국립 스키학교가 있다. 동계 올림픽 때 사용한 야외 아이스 링크는 축구장으로 개조하여 시민들의 체육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산악인들이 선망하는 샤르레 모젤 피켓과 가리비에 등산화도 이곳에서 생산하는 특산품이며 소목에다는 방울소리가 청명하여 하나쯤 가질만한 기념품이다.

 

  보송빙하에 흘러내린 비극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알프스에서 가장 낮은 곳까지 흘러내려 온 보송 빙하가 있다. 몽블랑에서 7km나 흘러내려 오는 빙하의 끝에까지 리프트 카를 설치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빙하가 해발 1200m까지 흘러내려 고산빙하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에 있는 기록을 가진 보송빙하는 조난당한 시체나 유품을 30-40년간 보관(?)하고 있다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한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으로 몽블랑 등정에 나섰다가 신랑이 실족하여 빙하계곡으로 추락하여 사별하였다. 그 후 신부가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을 때 신랑은 보송빙하로 흘러 내려와 결혼당시 20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나타나 신부할머니의 비통함을 되살린  비극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사례는 우리들이 학창시절에 감명 깊게 본 영화인 스펜셔 트레시의 ‘산(The Mountin)’의 실화가 이 빙하에 얽혀 있다. 1953년 비행기가 악천후로 해발 4800m에 있는 발로산장 옆에 추락하여 샤모니의 산악구조대원 형제가 구조에 나선 실화를 그린 이 영화는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때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가 40여 년이 지난 몇 년 전부터 이 보송빙하를 타고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샤모니 사람들은 그 잔해들을 모아 전시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스펜셔 트레시가 대역한 숭고한 휴머니즘의 주인공은 고인이 되고 그의 아들인 죠지 빠이오(62세)가 샤모니 등산학교의 선생을 하고 있다.


  3,842m의 ‘아귀 디 미디’峰

  6월 19일. 전날의 무리한 시내 나들이에 지쳐 다소 늦잠을 잔 탓으로 호텔 주변을 돌아보지 못해 아쉬웠으나 샤모니 관광의 하이라이트인 ‘아귀 디 미디’(Aiguille Du Midi)봉의 등정을 위해 하룻밤 유숙한 Novotel에서 Check Out을 하고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시내 중심도로의 남쪽 해발 1,030m에서 케이블카를 탑승하였다. 대구앞산에 있는 것보다 다소 큰 케이블카에 60-70명이 타고는 출발하여 급경사를 오른다. 아래에는 구주적송, 전나무 등 알프스의 멋진 수종들이 자태를 뽑내는 사이로 꼬불꼬불한 등산로가 보인다. 점차 키 큰 나무들을 뒤로하고 키 작은 관목들이 나타나고는 곧 이끼와 같은 고산식물인 地被植物이 나타난다. 1차 환승지인 2,317m까지 식물의 수직분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수직거리 1,300여m를 8분 만에 올라 2차 케이블카로 갈아타고는 사방을 둘러 봤다. 오른쪽으로는 ‘보송’빙하가 ‘아귀 디 미디’에서 치맛자락을 펼친 듯이 드리워져 태고의 신비를 감추고 있고 왼쪽으로는 만년설로 덮인 준봉들이 산맥을 이루어 샤모니 계곡을 감싸고 있다. 뒤로는 또 다른 날카로운 봉우리가 위용을 자랑하면서 평화스러운 샤모니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케이블카가 막바지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다가 숨이 가빠서인지 덜커덩거리다가 정지를 해버린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상념이 떠오른다. 혹시나 이 가파른 낭떠러지에서 고혼이 되지는 않을까?  나만이라도 살길은 없을까? 등 잠시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스치면서 아내생각, 자식생각, 형님들의 얼굴과 가까운 친구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한다. 기도의 덕분인가?  잠시 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도의 빛이 탑승자의 얼굴에 활짝 살아난다. 다시 웅성거린다. 불안이 사라지고 있다. 마지막 목적지인 3800에 도착하였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 몽블랑 지하터널을 지나니 이탈리아 쪽인 알프스의 남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몽블랑으로 오르는 주능선에는 산악인들의 행렬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맞은편에는 몇 해전 대구의 젊은 알피니스트가 도전하다가 실패하여 불귀의 객이 된 봉우리가 모든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위엄스럽게 버티고 있다. 잠시 고개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빈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면서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는 ‘몽블랑 테라스’(Mont Blanc Terrace)로 갔다

  ‘아귀 디 미디’의 최고봉인 3,842m는 인수봉처럼 뾰족 한 바위산이어서 그냥 오를 수가 없어 60m의 암벽을 수직으로 뚫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여 호기심 많은 관광객에게 서비스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로 전망대에 오르니 사방을 한눈으로 볼 수 있다. 구름이 가려 최고봉인 몽블랑 주봉을 볼 수가 없어 유감스러웠으나 광활하고도 근엄한 알프스의 신비로움을 세계인에게 보여주는 프랑스인의 관광사업에 놀라움과 고마움을 표한다. 서울 북한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려는 계획이 자연보존논자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된 것과 비교해 보면 우리들의 사고도 전환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자연의 활용과 보존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지혜를 가진 민족이어야지 목소리 큰 사람의 주장이 통용되는 우매한 민족이어서는 안되리라는 교훈을 이곳에서 얻게 된다.

   

  암벽등반을 가르치는 샤모니의 어머니      

  만년설의 신비로운 절경에 취하여 하산을 아쉬워하면서 ‘아귀 디 미디’봉과 작별을 하고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다가 1차 케이블카의 환승지점(2,317m)에서 1시간 여 휴식을 가졌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험난한 코스에 도전하는 모습이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지피류를 뜯고 있는 양들의 한가로운 모습과 위험을 무릅쓰고 빙벽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험이 공존하는 알프스의 산록을 뒤로하고 샤모니 마을로 돌아왔다.

  계곡의 우안 도로를 따라 마을을 벗어나는 지점에 많은 사람들이 암벽등반 연습을 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에서 내려 암벽등반에 열중하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였다. 팔공산의 수태골을 오르다 보면 대구의 젊은이들이 암벽등반 연습을 하는 장소와 비슷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팔공산 수태골은 젊은이들만의 연습장이라면 이곳은 가족들의 연습장이라 할  수 있는 점이 다르다.

  한 부부가 4-5세 되는 아들과 7-8세 되는 딸을 데리고 와서는 어머니가 앞장서서 길을 개척해 가면서 자일을 메어 가고 그 뒤를 어머니가 메어준 자일을 잡고 아들이 따라 오르고 아버지는 밑에서 요령을 가르치면서 총지휘를 하고 있다. 뒤이어 딸이 따라 오른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솔선 시범을 하면서 자식들에게 암벽등반을 가르치고 있는 샤모니 사람들의 교육방법에 나는 감명을 받았다. 나를 포함한 우리의 부모들은 가파른 절벽을 오르는 이런 위험스런 일을 스스로 할 줄 모르기도 하지만 자식들의 이런 모험을 용납할 부모가 몇이나 될까?

  ‘어릴 때부터 고기를 잡아주는 대신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치라’는 유태인의 교훈처럼 샤모니의 어머니들은 어릴 때부터 변화무상한 알프스에 적응하고 도전할 수 있는 지혜를 솔선수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유럽기행(5)

태양의 나라 이탈리아(1)

                                      정 시 식(대구시 문화체육담당관)


  Alps를 넘어 로마로

  6월 19일 오후 2시 30분, 아름다운 알프스 산록에 자리잡은 평화스러운 샤모니를 남겨두고 계곡을 빠져 나와 한 시간여 만에 국경을 넘어 다시 스위스로 돌아왔다. 기념품점에 들려 스위스의 특산품인 ‘十표 칼’이랑 시계를 눈요기하고는 직원들 선물용으로 간단한 기념품을 몇 점 사 가지고는 시가지 관광에 나섰다.

  오비브 공원에서 유학생이 아르바이트로 장만한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었다. 우거진 숲의 그늘진 잔디밭에서 오이김치의 상큼한 맛과의 상면은 마치 국민학교 시절 가을 소풍을 나온 즐거움만 같았다.

  8시 30분 제네바 국제공항에서 이탈리아 국적기라고 생각되는 중형기를 타고 제네바 시가지를 선회하여 알프스로 향했다. 

  저녁으로 주는 기내식이나 할머니 같은 스튜어디스의 서비스 등 모든 것이 KAL에 비할 수 없이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대구에서 관광사업을 하는 친구의 KAL 예찬론이 아니더라도 대한항공의 달라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 특히 내국인에게 불친절  하기로 소문났던 대한항공이 세계 제1의 항공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4,000여m의 연봉이 늘어선 알프스산맥이 만년설의 옷을 입고는 웅장하고도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산 중허리까지 인간의 손길이 닿아 잘 다듬어진 목초지 사이로 도로망이 이어져 있고 천연으로 만들어진 빙하호의 검푸른 모습이 간간이 모자이크되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저녁노을이 티레니아해에 드리워지면서 어둠이 깔리는 10시 무렵 로마의 관문인 ‘레오날드 다빈치’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가까운 Sheraton Golf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구획정리사업을 한 신개발지역 허허벌판에 넓게 자리를 잡아 골프장까지 있는 단층으로 된 깨끗한 호텔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 이탈리아 국도

  이탈리아의 첫 아침은 상쾌한 초여름 날씨였다.

  나폴리를 향하는 4차선인‘태양의 고속도’로는 이른 아침이어서 인지 시원스럽게 달릴 수 있었다.  고속도로 주변은 포도, 올리브, 레몬과 같은 지중해식 기후에 잘 자라는 과수원이 많은 농촌풍경을 이루고 있으며, 분리대와 도로변에는 이 나라의 국화인 유도화로 조경을 하여 진홍과 분홍색의 꽃이 풍요롭게 만발하여 싱싱한 여름을 수놓고 있다. 시야에 들어오는 산은 대부분이 민둥산이다. 지층이 대리석과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어 나무가 자랄 수 없기 때문이란다.

  현대의 자동차 도로인 ‘태양의 고속도로’와 고대 로마시대에 마차의 통행을 위해 건설한 ‘아삐아(Appia)’街道가 교차하는 지점을 통과하는 감회가 새롭다. ‘아삐아’가도는 로마가 나폴리를 점령한  후 로마와 나폴리를 연결하는 로마시대에 건설한 최초의 국도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격언이 이 길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로마에서 나폴리간의 200km에 달하는 이 국도 변에는 옛날부터 지중해에서 잘 자라는 ‘비노마리또’라는 해송을 가로수로 심었다. 로마제국이 국도 변에 이 소나무를 심은 것이 관례가 되어 지금도 이탈리아 국도의 가로수는 소나무를 심고 있다. 그래서 길의 폭이 넓던 좁던 간에 소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도로는 국도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고 한다.

  ‘아삐아’가도는 건설당시부터 흙, 자갈층, 시멘트 층으로 다진 후 돌로 포장을 한 포장도로이다. 도로의 폭은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마차길, 양쪽 인도로 된 노폭 6m의 도로변에는 곳곳에 호텔과 세금징수를 위한 관청 등,  인가가 조성되어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로마제국이 점령지의 통치를 위해  군대의 신속한 출동과 점령지의 물산을 로마로 수송하여 세계의 부를 누릴 수 있는 도로망의 형성이 필요하여 로마를 중심으로 마차와 군대의 통행이 원활한 국도를 건설하게 되었으리라. 이 도로는 지금도 그 당시의 노폭 그대로 아스팔트로 깨끗하게 포장하여 소나무 가로수 아래로 자동차와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

  우리의 신작로가 필요할 때마다 가로수를 베고 넓히는 수난을 당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의 신작로도 확장이 필요하면 가로수를 그대로 두어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도록 하고 한쪽으로 넓히면 얼마나 좋으랴! 그 좋은 예가 경부고속도로에서 청주로 들어가는 진입도로의 도로 가운데 멋진 플라타나스가 있지 않는가!

 

  그리스인이 건설한 바로크예술의 도시 나폴리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를 벗어나 나폴리로 진입하는 도로변에 G7 참가국의 국기를 게양대에 달고 있었다. 몇 주 후에 세계를 주도하는 정상들이 이곳 나폴리에 모여 국제문제들을 논의하게 되어 그 준비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기원전 7세기경 고대 그리스인이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온화한 기후를 따라 이곳에 와서 신도시를 건설하여 새로운(Neo) 도시(Polis)의 뜻인 ‘Napoli’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 후 기원전 4세기에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별장을 이곳에 건립한 후부터 네로 황제 등 로마의 귀족들이 즐겨 찾은 피서지였다고 한다. 

  지중해의 지배자가 바뀔 때마다 나폴리의 주인이 바뀌게 되어 나폴리인은 새로운 지배자로부터 살아남는 지혜를 터득하면서 외래의 여러 가지 문화를 섭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온 특징을 가지고 있다. 유머와 윗트가 넘치는 나폴리인의 기질, 회교사원 양식의 돔을 받아들인 성당건물, 뛰어난 바로크예술이 이런 나폴리의 역사와 무관치 않다고 한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가 갖는 교통난, 특히 주차난으로 인해 이곳 나폴리도 소형차가 물결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 차들도 서로 부디 치고 밀어낸 자국의 상처투성이다. 공간이 없는 도심에는 인도 상에 주유기를 설치하고 차도에 정차한  차량에 기름을 넣고 있는 주유소가 버젓이 영업을 하는 슬기를 보이고 있다.

  축구선수인 마라도나가 살던 동네의 언덕에 올라서니 폼페이의 비극을 만들어낸 베스비오스산의  웅장한 자태가 건너다 보이고 나폴리만에는 산타루치아항의 아름다운 모습이 가슴을 시원스럽게 한다.   

  로마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로 아우구스뜨’가 거주한 달걀성이 마치 유령의 성처럼 고대 로마의 흔적을 담아 나폴리항을 지키고 있다.

 

  2천년 전의 역사를 재생한 폼페이

  지금부터 1915년 전인 서기79년 8월 24일 베스비우스화산의 폭발로 삽시간에 죽음의 도시로 변하여 그 시대의 문화와 생활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화석의 도시 Pompeii는 이태리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기원전 6세기에 건설된 이 도시는 풍광이 아름답고 기후가 온화하여 로마시대에는 부호들의 별장지로 애용되었으며 2만여 명의 인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서북쪽 약5마일 지점에 있는 베스비우스화산의 폭발로 유독가스와 화산재가 덮쳐 주민들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다가 갑작스레 변을 당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아내를 본능적으로 보호할려는 남편의 모습,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던 모습, 밖에서 화산폭발을 보고 도망하던 모습, 목줄에 메인 개의 모습 등이 화석으로 남아 당시의 아비규환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폼페이시의 서기인 ‘스풀리미오’가 나폴리에서 화산폭발로 폼페이가 죽어 가는 모습을 기록하여 로마의 베스피아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잘 뒷받침 해주고 있다고 한다.

  마리나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뻗은 도로는 마차가 다닌 자국이 선명한 조약돌로 잘 포장이 되어 있다. 1인당 하루 4리터의 물을 공급한 상수도의 배수관(납으로 된 관과 돌로 된 관이 함께 묻혀 있다)도 볼 수 있다. 길바닥을 유심히 살펴보면 남자의 성기가 돌에 조각되어 있는데 성기가 가르치는 방향으로 따라가면 사창가에 이른다고 한다. 선원들이나 외지에서 온 여행객이 길을 묻지 않고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마련된 도로표지판인 것이다.

  4-5개의 방이 있는 사창에는 선명한 춘화도가 방과 복도에 걸려 있는데 다양한 성희의 자세는 그 당시에도 최고도로 발달하여 성문화는 오늘에 못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계획적으로 조성된 도시의 기본시설은 우리나라의 대도시보다 더 완벽하게 갖추고 있음을 보아 고대 문화의 수준이 오늘날보다 더 높았다는 것을 이 폼페이를 보면 누구나 느끼리라 생각된다.

  66ha의 시가지에는 관청가, 아폴로 신전, 쥬피터 신전, 은행, 광장, 세금으로 받은 곡식 보관창고, 음식점, 공중목욕탕, 소극장,  그리스식의 야외극장(그리스식의 야외극장은 산계곡과 같은 자연형태를 이용하여 관람석과 무대를 마들었으나 로마식 야외극장은 평지에 스탠드를 인위적으로 축조하여 만들었음), 상수도 시설 등  2만여 명이 최고의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도시기본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 유럽기행(6) ***

태양의 나라 이탈리아(2)

                                         정 시식(대구시 교통관광국장)

  분수의 도시 로마

  로마를 “소나무의 도시, 분수의 도시”라고 하듯이 로마에서는 어디서나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넓은 광장이나 좁은 뒷골목에서 물보라를 뿜으며 갸날프게 혹은 천둥 같은 굉음을 내면서 폭포를 이루고 흐르는 물의 향연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물의 예술을 창조한 것은 르네상스기에 교황들이 만족들의 침략으로 파괴된 상수도를 재건하고부터 예술가들이 앞을 다투어 갖가지 분수를 설계하여 인간에게 가장 친근한 물의 예술을 로마시민에게 제공하고 있다. 제정 로마시대에는 1200여개의 분수가 있었으나 지금은 300여 개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러한 많은 분수 중에서도 1762년에 세운 트레비분수(Fontana di Trevi)가 가장 유명한 분수이다. 포리 大公의 궁전 앞을 배경으로 하여 한 쌍의 반신반어(半神半魚)의 해신(海神)인 ‘트리톤’이 인도하는 전차(戰車)위에 해신 네프튠(Neptune)이 거대한 조개를 밟고 서 있는 웅장한 모습은 폭포와 같은 물소리와 함께 보는 사람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위대한 예술작품이다.

  이 분수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 로마에 다시 돌아 올 수 있다는 전설을 믿는 여행자들이 던지는 동전이 하루에 약 15만 리라에 달한다고 한다. 나도 다시 한번 로마에 올 수 있는 행운을 빌면서 돌아서서 동전 한 잎을 던지고는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진 스페인 광장

   호기심 많은 고등학교시절 애정영화로 최고의 인기를 끈 ‘로마의 휴일’에서 공주 역을 맡은 ‘오드리 해픈’이 격식에 얽매인 왕궁을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면서 미남인 ‘로버트 테일러’를 만나 열애를 하게된 곳으로 이름난 ‘스페인 광장’에는 관광객이 붐비고 있다. 137개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계단’의 위쪽에는 고대 에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서있고 그 뒤로는 16세기에 세워진 ‘트리니티 디 몬테’교회가 있다. 아래에 있는 아름다운 바르카치아(Barcaccia)분수가에는 많은 여행객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환담을 하고, 계단에는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정담을 나누면서 휴식을 하고 있는 평화스러운 모습들이다.

  “이탈리아인이 설계하고 프랑스인이 지불하고 영국인이 배회하고 지금은 미국인이 점령하고 있다.”고 하는 이 계단은 1725년 프랑스 대사의 원조로 만들어 졌으며 스페인 대사관이 이곳에 있어서 ‘스페인 광장’이라 붙여진 이 지구에는 영국 시인 키츠의 집이 아직도 이곳에 남아있고, 촬스 디킨스도 이곳에 모여 예술가연하는 무리가 보기 싫어하는 글을 남겼다. 영국인 이외에도 로마를 방문하는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집합장소가 부근에 있는 ‘카페 그레꼬’라고 한다. 스땅달 ,발자크, 바그너, 괴테, 바이런, 고골리, 스트린드베리, 입센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적인 명사들이 모여들었으며 멘델스존도 ‘스페인 광장’가까이 집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서편과 북쪽으로 뻗어 있는 거리에는 상점가로서 비교적 값싼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 피혁제품점에서 선물용으로 동전주머니 몇 개를 사고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천진스러운 ‘오드리 해픈’의 흉내라도 내어 볼까하고는 두리번거렸으나 아이스크림 장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로마시 문화재보호 연구소

  로마를 방문하는 모든 여행객이 “로마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는 공통된 느낌을 받게된다. 이처럼 이탈리아인은 조상의 위대한 역사적 유물을 세계인에게 팔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이 귀중한 유물을 관리하는데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이러한 유물의 보호 관리 발굴하는 업무를 전담하고 있는 기관이 ‘로마시 문화재보호 연구소’로서 고고학 박사인 ‘삿또리오’여사가 소장으로 있으며 전문직 200명, 사무직 200명, 경비원 200명등 600여명의 직원들이 근무를 하고 있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이 연구소는 시내의 뒷골목 초라하고 낡은 건물에 입주하고 있었으며 우리가 안내된 응접실도 제대로 격식을 갖추지 않아  손님 맞을 차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방문한 우리들이 오히려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이 연구소의 기능은 로마시내에 있는 모든 문화재를 발굴, 보수, 보존을 하고 문화재에 관련된 전시회를 개최하여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홍보활동과 시가지의 도로축조, 분수,  상하수도,  성벽, 별장 등 공공개발과 개인건물의 신축 보수 등에 대한 발굴과 유지보수에 대한 지도를 하고 있다.

  연구소에 직접 종사하는 직원 이외에 고고학, 건축학, 미술학등 각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전문인력을 비롯하여 문화재와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는 인원이 로마시내에만 3만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연구소의 운영비와 유적의 발굴 보수비는 로마시가 주로 부담을 하며 국보급의 유지보수비는 정부가 부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건물이나 유적에 대한 보수는 대기업이나 외국정부가 스폰서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신개발지의 발굴비는 우리나라와 같이 개발자가 부담을 하며 발굴된 유물은 국가소유가 된다고 한다.

  연구소의 운영비용은 국보급의 문화재의 유지보수비는 정부가, 일반적인 것은 로마시가 부담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국이 불안하여 계획된 사업들도 예산이 확보되지 않아 많이 지연되고 있다고 한다.


  신이 만들어낸 거대한 박물관 도시 바티칸

  6월 21일, 카톨릭 교황이 거쳐하는 바티칸을 방문하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바티칸시국은 1929년 라떼란조약에 의해 독립한 주권독립국가로서 영토면적 0.44㎢의 카톨릭 교황청이 있는 도시국가이다.

  9시에 도착하였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30여분만에 입장을 하여 먼저 바티칸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바티칸 미술관에는 라파엘의 걸작품인 「예수의 변형」과 「휠리노의 마돈나」를 비롯한 많은 명작들이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벽면을 가득 채운 거작들 속의 주인공들이 살아서 튀어나올 듯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불후의 명작을 차근차근 감상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가니 아쉽기 그지없다.

  바티칸 박물관을 들어서니 너무도 많은 전시물에 어안이 벙벙하여 작품 하나하나를 감상한다기 보다는 대강 보고 지나갈 수 없다. 이렇게 많은 전시품들은 대부분이 역대 교황이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교황청이 기독교 세계를 지배한 시대에 각 국의 왕이나 귀족들이 그 지방이나 국가에서 최고의 귀중품을 교황에게 선물하였을 것이며 이러한 골동품이 바티칸 박물관에 지금까지 보관되어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야외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벨 베데레 뜰」은 15세기말 부라만테가 교황 인모센트 8세를 위해 만든 8각형의 별장의 중심에 있는 뜰이다. 이 뜰의 한 모퉁이에 있는 Laoconte상은 16세기 초 콜로세움의 티투스의 목욕장 유적지에서 발견된 대리석상으로서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이 신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는 것을 표현한 걸작품이다. 바다에서 온 뱀이 라오콘과 두 아들을 죽이는 장면으로 기원전 1세기경 로디의 아제산드로스와 그의 두 아들 아테네도르스, 폴리도르스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헬레니즘문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6세기경 그리스 조각가인 레오까레스 작품으로 추정되는 벨베데로의 아폴로(Apollo del Belvedere)의 청동상 복사판이 이 뜰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다.

  「라파엘로의 방들(Stanze di Raffaello)」에는 라파엘의 대표작들이 가득하다. 라파엘이 25세 때 부라만테의 추천에 의해 교황 율리우스 2세 때 불려 와서 「서명의 방」의  천장 벽화를 3년간(1508-1511)에 걸쳐 완성하였으며 이 그림은 율리우스 2세의 주문에 따라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인 지식과 도덕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다. 이 방안 벽면에 있는 「성사에 대한 토론(Disputa Del Sacreamento)」, 「아테네 학파(Acuolo d′Atene)」벽화는 라파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미케란젤로의 영혼이 담긴 시스틴 소성당

  미로처럼 다닥다닥 붙은 건물중에 겨우 비집고 자리를 잡은 듯한 시스틴 소성당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정을 쳐다보고 감탄을 연발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나도 저절로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았다. 거기에 학창시절 미술교과서에서 익히 본 그림이 동공을 뚫고 뇌리에 박힌다. 그 유명한 미케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천정을 가득 체우고 있다.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고향인 푸로렌스에서 올라와 불후의 명작인 시스틴 소성당의 천정화인 「천지창조」를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명작은 1508년 5월 10일 시작하여 4년 5개월만이 1512년 10월 31일에 800여 평방미터에 달하는 큰 공간을 장식한 대작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천정화의 중앙부분은 구약성서의 천지창조 일화를 주제로 한 것으로 「빛과 어둠의 분리」, 「해와 달의 창조」, 「물과 땅의 분리」, 「아담의 창조」, 「이브의 창조」, 「원죄와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노아의 제물」, 「노아의 대홍수」, 「술취한 노아」에 이르기까지 아홉 개의 그림이 자리를 잡고 있다.  천정 네구석의 삼각형에는 유태인들의 기적적인 구출장면인 「다윗과 골리앗」, 「주디스와 호르훼르네스」, 「아민의 십자가 처형」, 「청동 뱀」이 그려져 있다.

  이 성당의 제단 뒤 벽을 채우고 있는 「최후의 심판」은 천정화를 완성한 후 22년만에 교황 클레이멘트 7세의 부름을 받고 미케란젤로가 로마로 돌아와 7년만인 1541년에 완성하였다.

  미케란젤로는 건강이 좋지 않은 60세의 노인으로서 300명에 달하는 그림 속의 인물들에게 혼돈  속의 극적인 순간을 묘사하여 그 당시 격동기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바티칸 시티에 대한 견문을 제일 뒤로 미루어 두었다가 자료를 찾아 그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부분적으로나마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첨가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소장품과 배드로 성당의 규모, 베드로광장을 둘러싼 아름다운 석주, 성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제로의 작품 등에 대한 소감은 나의 짧은 글과 부족한 표현력으로는 글을 쓸 수가 없어 다음 기회로 미루고 유럽기행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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