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양(瀋陽)은 지금 공사 중!
정 시식(대구 성서산업단지 관리공단 전무이사)
중국 선양(瀋陽)은 동북3성의 중심도시이다. 동북3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주라고 부르는 땅을 두고 말한다. 러시아와 긴 국경을 이루고 있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그리고 한반도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면서 조선족이 자치를 하고 있는 지린성(吉林省), 중국을 통일한 초강대국인 수와 당의 고구려 침입을 저지한 안시성이 있는 랴오닝성(遶寧省) 을 동북삼성이라고 한다. 고구려와 발해의 옛 터전이다. 선양(瀋陽)은 일제시대에는 펭텐(奉天)이라고 불렀으며 일제가 괴뢰정권으로 세운 만주국의 수도였으며, 만주족이 후금을 세워 중국을 통일한 청나라의 초기 수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은 랴오닝성의 성도이며 동북3성의 중심도시로서 인구 720만을 포용하는 중공업이 발달한 중국 5대 도시의 반열에 들어간다.
천정가오(陳政高) 선양시장의 초청을 받아 성서공단에서 생산 활동을 하는 기업인 20여명이 선양시를 찾은 것은 8월 17일, 대구공항에서 선양공항으로 가는 남방항공을 이용하여 11시 40분에 출발하여 현지시간으로 13시 30분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와 중국간의 1시간 시차를 적용하면 2시간 50분간의 비행이었으니 지척이라고 할 수 있다.
선양국제공항에서 선양의 중심지까지는 고속도로로 30분이면 충분한데, 지금은 고속도로는 통행을 막고 확장공사중이라 일반도로로 돌아가니 1시간이 더 걸린다.
선양국제공항은 선양과 푸순(撫順)의 중간지점에 있는 국제공항이다. 공항에서 선양까지는 30분정도, 푸순까지는 1시간정도 걸리며, 두 도시와 공항을 잇는 4차선의 고속도로는 지난번 두 번의 방문 시(2000년 5월 푸순시 방문과 2001년 8월 백두산 등정)에는 달리는 버스가 기름을 넣기 위해서 길 건너편의 주유소를 무단 횡단하는 한가로운 고속도로였다. 이러한 고속도로를 10차선으로 넓히기 위해 차량통행을 전면 금지하고 새로이 건설 중에 있다.
시가지로 진입하는 도로변에는 옛날 지은 집단농장의 주택이나 슬럼가, 그리고 낡은 아파트를 철거하여 길을 넓히고 새로운 아파트를 짓기 위해 정지작업을 하는 곳이 도처에 널려 있다. 외곽에는 새로운 아파트와 신축건물이 수없이 들어서고 있으며 도심에는 대형 빌딩이 새로운 모습으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곳곳에 대형 타워 크레인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북한식당인 평양식당에서 냉면으로 오찬을 하였다. 냉면의 맛은 순수한 메밀로 만들어서 그런지 평소에 대구 냉면 맛에 길들여진 내 입에는 특별한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북한에서 파견한 종업원들은 단정한 용모에 깔끔한 미모를 갖추었으나 경직된 표정에는 손님을 반가이 맞이하는 따뜻한 미소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남한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반갑습네다’를 비롯해 귀에 익은 북한 노래 몇 곡을 연주하는 것으로 우리 일행에게 그들의 의무를 대신하였다.
오찬 후 찾은 선양 고궁은 청조의 태조 누루하치와 2대 태종이 왕조의 기초를 다지면서 건축한 황성이다. 명(明)을 제압하기 위한 상징적인 건축술이 도입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태종의 무덤이 있는 북릉 공원은 누루하치의 네 번째 왕자인 황태극(2대 태종)이 병자호란을 일으켜 삼전도에서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후 포로로 잡아간 1만 여명의 남녀를 노역시켜 만든 화려한 무덤이다. 허허벌판에 인위적으로 배산임수의 명당을 만들기 위해 호수를 파고 그 파낸 흙으로 산을 만든 토목공사와 능을 지키기 위한 황색 유리기와로 만든 전각, 도굴을 방지하기위해 내부를 진공으로 만든 후 입구를 밀봉하여 무덤을 파괴하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도록 설계하여 지금도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 태종 능은 우리 조상의 한이 서려있는 현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이 노역이 끝나고 귀국하는 길에 청나라에서 더럽힌 몸을 압록강에서 깨끗이 씻어버리고 귀국하였으나 그 때 돌아온 한 많은 여인네에게 회향녀(回鄕女)라는 이름이 ‘화냥년’으로 음 변화를 일으켜 씻을 수 없는 치욕의 대명사가 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국가가 외침을 막지 못한 책임을 힘없는 백성들이 처절한 치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서러운데 이 아픔을 감싸 안아 주는 이웃의 따뜻한 보살핌은커녕 이들에게 돌을 던지고 손가락질하여 설 땅을 주지 않은 냉정한 사회가 얼마나 저주스러웠을까? 선조의 욕됨을 되씹어 반성하여 우리의 당대는 물론 우리의 후손에게 이런 치욕은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는 물론 사회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을 감싸주는 아량을 베풀 줄 아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겠다.
방문 2일째인 8월 18일은 하루 종일 공식일정에 들어갔다. 첫 번째 방문기관인 선양농업고신기술개발구(瀋陽農業高新技術開發區)는 평야지대에 있는 농업지대로서 주로 농축산물 가공공장을 비롯한 농축산물 관련 산업을 유치하기 위해 개발을 하고 있는 개발특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구에 본사를 둔 우성사료와 제일제당(현재는 CJ)사료공장이 입주해 있다. 진입도로와 개발구내의 간선가로망을 개설하는 중간 중간에 지원시설과 입주업체의 건설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이테크산업유치를 위해 건설하고 있는 후이난신취(渾南新區) 개발특구도 넓은 도로를 파헤치고 포장을 하는 등 기반시설을 하느라 거센 바람이 흙먼지를 날리고 있다.
천정가오 선양시장의 간곡한 권유로 방문한 톄시신취(鐵西新區)는 시중심부의 중서부에 있으며, 선양의 중심구인 톄시구(鐵西區)의 선양경제기술개발구와 연접해 있는 94평키로메터의 광활한 지역에 현대공업구와 현대상업무역생활구로 개발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독일의 벤즈 자동차가 2개월 후부터 완성차를 생산하게 되며, 많은 자동차 부품공장이 준공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동방방직, 중광전자 등 80여개의 한국 투자기업이 생산을 하거나 건설 중에 있었다. 외국인을 위한 주택전용지구와 아동들의 교육을 위한 시설도 갖추고 있어 외국자본을 유치하려는 노력의 일단을 볼 수 있었다.
선양에는 위에서 소개한 북부지역의 ‘농업고신기술개발구’와 선양 시가지의 중심을 관통하는 신수이장(瀋水江) 남쪽의 ‘후이난신취’, 중심시가지 서부에 연접한 ‘톄시신취구’의 3개 개발특구를 두어 특구의 개발과 모든 기업의 유치는 개발특구에서 원터치 스톱으로 독립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렇게 광활한 3개 지역을 일시에 개발에 착수한 배경은 덩샤오팡(鄧小平)의 개혁 개방과 함께 일찌감치 경제개발이 시작된 ‘동부 연안지역’과 4-5년 전부터 개발이 본격화된 ‘서부 대개발 지역’에 이어 최근 ‘동북 3성의 경제부흥’이 추가되면서 동북3성의 중심도시인 선양에 개발의 바람이 크게 일고 있는 것이다. 최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정부가 21세기 초 중국경제개발의 청사진으로 불리는 ‘삼극론(三極論)’에 의해 지금 동북3성이 개발의 열풍을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선양 시가지는 낡은 집이 헐리고 길을 넓히고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치솟고 있으며 개발특구에는 외국자본의 유치에 시장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가 전력투구하고 있다. 시가중심을 흐르는 신수이장(瀋水江)과 시가지 외곽순환고속도로를 잇는 간선도로변에서 보이는 곳은 모두 공사가 진행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선양은 지금 전시가지가 온통 공사 중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시장을 방문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720만의 시정을 이끌고 있는 시장이 30분간의 시간을 우리들에게 할애한 것은 외국자본을 유치하려는 굳은 의지가 없으면 어려운 파격적인 예우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시장이 직접 방문자의 업종을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선양에 투자할 의향을 타진하고 선양의 투자조건을 설명하는 열의는 우리 일행을 일정에 없는 섬유와 자동차관련 투자조건이 좋은 ‘톄시신취’를 방문토록 권유하고 비서실장으로 하여금 안내하게 하는 적극성에 우리들은 일정을 바꾸어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집념은 시장뿐만 아니라 우리를 안내하는 모든 공직자의 한결같은 자세였다. 천(陳) 시장은 자기를 대신하여 부시장을 보내 우리 일행에게 성대한 만찬까지 베풀어 주는 성의도 잊지 않았다.
앞으로 중국의 발전이 우리를 크게위협하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1995년 한국을 방문한 중국의 관료가 ‘한국을 배워 10년 후 일본을 따라잡겠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중국의 변화가 예사롭지 않다.
방문 3일째, 옌지(延吉) 대우호텔에서 새벽 4시 백두산을 향해 출발했다. 4시간 40여 분만에 백두산에 도착하여 찦차로 천문봉 정상을 향했다. 걱정했던 날씨는 쾌청.
주차장에 내려 천지가 보이는 곳까지 200여 메타를 가파르게 오르니 검푸른 천지가 갑자기 눈앞에 확 들어왔다. 아! 그토록 열망하던 민족의 영산이 그 모습을 아낌없이 드러내 보여주었다.
2001년 8월 3일 서파지역에서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백운봉을 비롯한 여섯 개의 봉우리를 11시간이나 돌았건만 운무로 가린 천지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다가 마지막 달문이 보이는 지점에서 하산을 하다가 겨우 그 자태를 드러내, 일행들이 달려가 천지를 보는 영광을 가졌건만 너무도 지친 몸에 먼발치로 보고는 내일 천문봉에 올라서 봐야지 하고는 미루어 버렸다. 그러나 이튿날도 하늘의 심술은 전날과 다름없었다. 세 번째 만에 볼 수 있는 영광을 잡은 것이다. 물론 일행 중에는 첫 번째 등정에서 천지를 만나는 행운을 잡은 사람이 많았다.
봉우리를 오르내리면서 기념사진도 찍고, 최고봉인 장군봉과 운무 속에 올랐던 제2봉인 백운봉이며 천지를 에워싼 각기 다른 형상을 자랑하고 있는 봉우리를 감상하며, 북한의 천지 관측소를 잇는 선명한 길, 응달진 곳에 아직도 녹지 않은 얼음, 끝없이 펼쳐진 백두산 산림지대에 감탄하느라 주어진 40여분의 시간이 부족하여 1시간여 만에, 언젠가는 저쪽 북한 땅에서 천지를 만나는 기회가 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긴 아쉬움을 남긴 채 푸석한 화산재를 밟으면서 내려왔다.
창바이(長白)폭포와의 재회도 새로웠다. 온천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곳을 통과해 왔으나 안내원도 그 지점을 확실하게 몰라 끝없이 넓은 산림지대를 통과하면서 어느 계곡에서 김좌진 장군이 일본 토벌군을 유인 포위하여 섬멸하였을까? 안내판 하나라도 세워 두었으면 이렇게 무심코 지나지는 않을 텐데, 아쉬움을 남기는 귀로였다.
방문 4일째, 선양의 남쪽 130km 지점에 있는 번시수이동(本溪水洞) 관람에 나섰다. 번시시(本溪市)에서 34km지점에 있는 이 동굴은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보트를 타고 관람하는 석회석 동굴이다. 2.8km에 진열된 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예술품에 매료되어 3시간이나 달려온 무료함을 싹 날려버렸다.
'***송연 글*** > 해외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로시마, 시마네현 관람기 (0) | 2006.07.26 |
---|---|
히로시마의 한국인 위령탑 (0) | 2006.07.26 |
유럽기행 (0) | 2006.07.26 |
히로시마, 시마네현 관람기 (0) | 2006.07.07 |
백수의 첫 나들이 (0) | 2006.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