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답사기

지리산 자락의 고결한 선비를 찾아서

是夢 2006. 5. 24. 15:43
 

지리산 자락의 고결한 선비를 찾아서

 

鄭時植 회장(대구시 공무원교육원장)

 

일요일 아침 새벽잠을 사양하고 회원들이 아리아나 호텔로 모여들었다. 행여나 좌석이 모자라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도 되었다. 사전에 전화로 점검하였을 때 이미 좌석이 꽉 찼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석하지 않겠다던 회원도 부인 손잡고 나타나 당황케 하였다. 崔德洙 회원은 부인을 모셔다(?)주로 왔다기에 마음이 놓였지만 李元淳 회원은 선약 때문에 불참을 선언하고 백복주 여사만 참석한다고 해놓고는 느닷없이 나타나 반갑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약속이나 한 듯 참석하겠다던 몇몇 회원이 얼굴을 내밀지 않아 전화를 하니 유고가 있어 못 온단다. 해장국으로 아침 요기를 하고는 7시 30분, 서른아홉 명을 태운 버스가 예정대로 출발하였다. 50을 넘은 초로에도 초등학교 학생의 소풍가는 설렘이 가득하다.

 

  안의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연암의 흔적을 찾았다. 우리에게는 ‘허생전’과 ‘양반전’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이며 나아가서는 이용후생학을 주장한 실학자 박지원이 이곳 안의에 사적비가 세워진 연유는 이렇다. 태어난 서울의 재동 생가는 지금은 흔적도 없다. 그가 홍씨 외척의 세력을 피하여 은둔한 황해도의 연암협(燕巖峽)은 북한 땅이라 통일이 될 때까지는 갈 수가 없어 5년간 안의 현감을 지낸 이곳 안의초등학교 교정(안의 현청이 있던 곳)에 그의 사적비를 세우게 되었다. 44세에 청나라 사신의 수행원으로 연경을 다녀와 쓴 ‘열하일기’는 북학파 이론을 대표하는 저서다.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워 실제 생활과 농사에 적용을 한곳, 그리고 40여권의 저서를 집필한 이곳 안의는 연암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다. 연암의 시 「시골집」을 전재하여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소개한다.

                

       할아범 새를 보러 밭둑에 앉았건만(翁老守雀坐南陂)

       개꼬리 같은 조 이삭엔 참새가 달려 있네.(粟拖狗尾黃雀垂)


       맏아들 둘째아들 들일로 다 나가고(長男中男皆出田)

       온종일 시골집은 삽짝 문 닫혀 있네.(田家盡日晝掩扉)


      소리개 병아리를 채려다 못 채가니(鳶蹴鷄兒櫻不得)

       박꽃 핀 울밑에서 뭇 닭이 울어대네. (群鷄亂啼匏花籬)


       새댁이 함지이고 꼿꼿이 내 건널 제(小婦裁捲疑渡溪)

       누렁개 발가숭이 아이 앞뒤로 쫓아가네.(赤子黃犬相追隨)


  안의초등학교 앞에 있는 허삼둘의 집에서 경제권의 위력을 보았다. 70여 년 전 윤대흥이 진양 갑부 허씨 문중에 장가를 들어 부인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이다. 부엌을 ㄱ자의 정모서리에 배치하여 양반가옥의 기품이나 체통을 무시해버린 여성생활 위주의 공간배치를 한 것이 특이하다. 안채도 사랑채보다 웅장하여 양반가옥과 대조적인 것으로 보아 주부의 경제권이 여자중심의 가옥으로 만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안의에서 함양으로 가다가 지곡(池谷)면 개평(介坪)마을에서 정여창의 고택을 찾았다. 개울 따라 동내 안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 반촌의 기품은 아름드리 노송에서 배어 나온다. 반듯한 기와집과 작은 집들이 서로 사이좋게 흙 담과 탱자나무 울타리로 서로 껴안고 있다. 집집마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문패마다 鄭씨 성을 가진 하동정씨 집성촌이다. 솟을대문과 반듯하게 쌓은 흙 담이 잘 어울리는가 하면 바깥마당과 안마당을 구획한 나지막한 담장이 작업공간과 생활공간을 잘 나누어주고 있다. 마을의 중앙부에 자리 잡은 정여창 고택은 지난해 장마에 담장이 허물어져 고칠 준비를 하고 있다. 솟을대문에는 이 집의 권위를 알리는 다섯 개의 효자․충신 정려패가 있다. 사랑채의 위엄과 다소곳한 안채의 짜임새가 부잣집이 아닌 사대부의 기품을 지키면서도 공간 배치가 개방적인 느낌이다. 아쉽게도 이집 정원의 상징인 드리워진 소나무가 죽어가고 있어 안타깝다. 작으나마 전통가옥에 어울리는 멋스러운 정원에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으니 나무도 시들고 집도 사람의 기를 받지 못해 진기가 빠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함양은 최치원이 태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와 상림에서 최치원의 애국하는 번민을 볼 수 있었다. 학사루는 그가 노닐던 곳이며 상림(上林)은 당시 함양읍을 가로지르던 위천이 범람하므로 물길을 돌리고 제방을 쌓아 나무를 심었다. 그때 심었던 나무가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울창한 숲을 이루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이 상림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한 가지는 최치원의 노모가 상림에 놀러갔다가 뱀을 보고 놀란 사실을 알고 최치원이 상림을 찾아가서 “이후로는 이 상림 숲에서 뱀, 개미와 같은 해충은 없어지고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라고 주문을 외웠다고 한다. 그 후로는 뱀과 같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동물은 없다고 한다. 최치원의 효심을 나타내는 감동스러운 전설이다. 또 하나의 전설은 연산군이 집권하면서 폐비 윤씨 관련 사건에 연루된 윤필상(尹弼商)이 이곳 상림으로 귀양을 와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가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의 유명한 역술가에게 신수점을 본 결과 ‘上林下沒’이라는 점괘를 적어주고 평생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 정권이 바뀌어 그가 죄인이 되어 유배지인 상림으로 오게 되었다.  유배지로 가는 길에 주민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下林이라고 답하였다. 이상한 예감을 느끼면서 조금 더 가서 물으니 중림이라고 답하였다. 그는 상림에 도착하여 중국 역술가의 예언이 적중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일생을 마감하였다.

 

  실상사에서는 철약사여래불에서 일본과의 갈등을, 창건주 증각대사와 2대주지 수철화상의 부도에서  실상학파의 맥을 집어보았다. 통일신라가 교종(敎宗)을 통치이념으로 하여 중앙집권의 토대를 이루었으나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변방의 호족들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호족을 지지해줄 정치적 이념의 뒷받침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중국에서 선종(禪宗)을 공부하고 돌아온 선각자 스님들이 ‘내가 곧 부처’라는 사상이 도입되어 변방의 호족의 세력을 업고 구산선문이 개산을 하게 된다. 실상사는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건립한 사찰로서 유일하게 신라왕실의 도움으로 증각대사 홍철에 의해 개산하였다.

  다리목 식당의 지리산 냉이와 오리가 수난을 당했다. 왜 이렇게 많이들 먹는지? 배가 든든하니 금관가야국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릉이라 전하는 특이한 돌무덤을 한바퀴 돌면서 승자와 패자의 희비를 생각한다.

 

  문익점 선생을 배향한 도천서원에서 무명옷을 입게 해 주신 고마움은 시배지의 전시관에서 한 번 더 확인하였다. 남명 조식 선생의 묘소에는 고고한 선비의 기개를 읽으면서 답사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대원사 계곡을 지나 밤머리재를 넘어 산청에서 진주-대전고속도로의 일부구간인 산청-함양간의 고속도로를 타고 88고속도로에 다다르니 대구에 다 온 느낌이다. 제주가든에서 갈비탕을 마지막으로 세끼를 먹고 나니 3월 탐방 일정이 모두 끝이 났다.

  눈과 귀와 입, 피부와 생각, 그리고 우정을 즐겁게 해준 지리산 자락 여행이었다.

              - 청우회지1999년 4월호에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