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답사기

우리 것의 소중함을

是夢 2006. 5. 24. 15:35
 

우리 것의 소중함을……

 

鄭時植(대구시 공무원 교육원장)

 

좀 오래된 이야기인데, 대구의 어느 유지가 대만을 여행할 기회가 있어 대만사람과 환담을 나누다가 명심보감이 화제에 올랐다고 한다. 명심보감이 한자문화권에서는 교양서적으로 으뜸가는 책이라는 것을 참석자들이 모두 칭찬을 하고 감명 깊은 구절들을 외우면서 열띤 토론이 이루어졌다. 마침 대구에서 간 유지도 요즈음 사람답지 않게 명심보감에 대한 공부가 깊어서 토론에 빠지지 않았다. 저자가 우리나라 사람이며 옛날에는 물론 현재도 우리국민들이 이 책을 귀감으로 삼아 행신을 한다고 자랑을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만 사람이 “선생께서 명심보감을 잘 알고 계시고 또 대구에서 오셨다고 하니 명심보감의 목판본 있는 곳을 잘 아시겠군요?"하고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을 받은 유지는 어리둥절하여 무슨 이야기냐는 듯 쳐다보니, "대구 가까운 인흥서원에서 판각한 명심보감의 목판본이 그 서원에 보관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데 선생께서는 인흥서원에 가보지 않았느냐?"  이 질문에 유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명심보감에는 대가라고 자처해 오던 자신의 오만이 무참히 짓밟혔다.

  우리는 흔히 이런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우리는 먼데 있는 남의 것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 곁에 있는 것의 소중함은 지나치고 있다. 인흥서원의 소중함을 알리는 일화를 영남문화회 하오명 회장을 통해서 이번 답사 길에서 다시 확인을 하였다.    자유당 시대 월남수상이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 국민들은 명심보감이라는 훌륭한 수신서를 가져서 윤리교육은 걱정이 없겠습니다. 명심보감 원본이 어디에 있습니까?” 수상으로서는 어릴 때 수신교과서로 배운 명심보감의 조국을 방문한 감회를 이렇게 발현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부터 망명생활을 한 대통령으로서는 명심보감을 칭찬하는 예의에는 자부심을 느꼈으나 원본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마침 비서실장이 그 내력을 잘 알고 있어 대구에 있는 인흥서원에 보관되어 있다고 답을 하여 체면은 세웠다고 한다. 수상이 돌아간 후 대통령은 외국의 수상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흥서원에 대한 궁금증도 풀 겸 관리상태를 조사시킨 결과 건물이 퇴락하여 보수가 시급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국고를 지원하여 개축했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이 월남수상 덕분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나도 인흥서원과 명심보감과의 관계를 최근에야 알았으며, 이번 답사에서 비로써 목판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보관하고 있는 명심보감 목판은 노당(露堂) 추적(秋適) 선생의 후손인 추세문(秋世文)이 출판한 1869년(己巳年) 인흥재사본(仁興齋舍本)이 전수되어 1985년 10월 15일 31매를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후 달성군이 대구에 편입되면서 대구광역시 지정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명심보감의 편자인 노당(露堂) 추적(秋適) 선생은 고려 고종 병오(1248년)에 출생하여 1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충열왕 29년에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의 대임을 맡았으며 이듬해 안향, 추적 등이 왕명으로 송도에 성균관인 대성전(大成殿)을 세우고 경사(經史)를 가르쳤다. 이후 지방에는 향교를 건립하여 지방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충숙왕 2년(1315년)에 명심보감 19편을 밀성(密城. 현재의 인흥서원도 밀성에 소속되었다고 생각됨)에서 편저하였다. 명심보감은 그 당시 고전(古典)에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목을 발췌하여 계선(繼善), 천명(天命), 순명(順命), 효행(孝行), 정기(正己), 안분(安分) 존심(存心), 계성(戒性), 근학(勤學), 훈자(訓子), 성심(省心), 입교(立敎), 치정(治政), 치가(治家), 안의(安義), 준례(遵禮), 언어(言語), 교우(交友), 부행(婦行)의 19편으로 편찬한 수신서이다. 노당이 태어나던 시대는 몽고의 침략을 받아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항거하였으나 국운은 쇠할 대로 쇠약해졌으며 백성들은 몽고군의 노략질에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몽고군이 물러가고도 피폐한 사회를 회복할 힘이 없었으며 특히 불교의 타락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명심보감은 국민의 좌절과 추락한 도덕을 재건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하는 사회적 요청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인흥서원은 추황(秋篁), 추적(秋適), 추유(秋濡), 추수경(秋水鏡) 선생 등 네분을 배향하고 있다. 입구에는 추적 선생의 신도비가 있고 인흥서원 강당 양편에는 양사재(兩祠齋)인 관수란(觀水瀾)과 요산료(樂山寮)가, 뒤에는 묘우(廟宇)가, 명심보감 장판각(明心寶鑑 藏板閣)이 왼쪽에 있다.

  달성군에서 금년에 보수비를 확보하여 인흥서원을 단장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찾는 이가 많아 꾸준하게 팔리고 있다는 명심보감의 산실(産室)이 그 명성에 부끄럽지 않는 모습을 갖추어 주기를 바란다.


  『太公 曰, 痴人은 畏婦요 賢女는 敬夫니라.』  -- 치가편(治家篇) --

   「강태공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는 아내를 두려워하고 어진 여자는 남편을 공경한다.」

   「The foolish person fears his wife and the benevolent wife respects her husband.」

※청우회지 1999년 5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