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젓갈장수와 팔공산
鄭時植 회원(대구성서산업단지 전무이사)
「대구답사마당」을 따라 해남, 보길도, 강진지방의 문화유적 답사에 나섰다. 방학 첫날이라 일찌감치 모집정원이 마감되었다드니, 많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예약한 회원들의 취소가 많아 버스 안은 여유가 있어 좋다. 주최 측은 기대했던 수익이 떨어져서 안됐겠지만---
7시 30분, 정시에 출발. 순천에서 남해고속도로를 내려 벌교 보성 장흥 강진 해남을 거쳐 땅끝(土末)) 선착장에 도착하니 오후 1시 40분,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다. 마침 2시 20분 보길도로 출발하는 배를 탈 수 있어 시간이 많이 절약되었다. 보길도에서는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이동하였다. 먼저 부용동 세연정에 들러 우리를 태워 준 버스 기사의 안내를 받았다. 이 고장에서 태어나서 자란 기사는 보길도의 자연과 역사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릅을 꿇었다는 치욕적인 소식을 들은 윤선도는 다시는 세상 꼴을 보지 않으리라 하고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던가. 남쪽으로 향하던 윤선도 일행이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에 유혹되어 제주도까지 가는 것을 포기하고 눌러앉은 곳이 이곳 보길도라고 한다.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섬의 주봉인 격자봉(425m)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하고, 세연정, 무민정, 곡수당, 정성암 등 스물 다섯 채의 건물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 자신의 낙원을 가꾸었다고 한다.
옥소암에 올라 세연정을 한눈에 내려다보니 크고 작은 바위들이 점점이 드러난 세연지의 자연적인 곡선미와 축대로 둘린 회수담의 인공미가 서로 잘 어울린다. 두 연못 사이에 세워진 정자 지붕이 이루는 아름다운 곡선은 우리의 전통적인 정원과 너무나 잘 조화를 이룬다. 일제시대 일인들이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학교를 짓는다는 명분으로 정원의 일부를 국민학교 교지에 편입시켜버려 세연정의 본래 모습을 찾을 길 없음이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정원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 주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다.
1.4km의 활처럼 휜 해안선을 따라 방조림으로 조성된 상록수의 보호를 받는 마을 애송리에서 민박을 하기 위해 짐을 풀었다. 바닷가에는 흰 모래대신 검은 조약돌이 가득 깔려있어 독특한 정취를 안겨준다. 건너다 보이는 예작도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하늘 한 귀퉁이에 유난히 밝은 샛별이 선을 보이는가 싶더니 하나 둘 나타난 별들의 무리가 온 하늘을 수놓는다. “나 하나 별 하나, 나 둘 별 둘---”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면서 어린 시절 고향하늘을 바라보는 감동을 여기 애송리 바닷가에서 되찾았다.
모처럼의 민박 추억을 안고 애송리를 떠나 청별 선착장에 도착하니 안개가 많이 끼어 배가 언제 떠날지 기약할 수 없다고 한다. 선착장에는 완도로 나가는 배가 정박해 있고 땅끝으로 나가는 배는 땅끝에서 들어 와서 되돌아 나간다고 하니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우리뿐만 아니었다. 따가운 햇볕을 피할 그늘이 없어서 우리들은 육지로 나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관광버스의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행들 중에는 토산품인 젓갈 파는 차 그늘에서 기다리면서 젓갈도 사고 젓갈 장수와 이야기도 나누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0시가 조금 지나니 매표소 앞이 술렁거리기 시작하더니 기다리던 사람들이 표를 사서 완도로 가는 배에 오르고 있다.
포구 앞의 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지만 운항에는 자장이 없나보다. 우리에게 그늘을 드리워 주던 관광버스도 승선준비를 하여 우리 일행도 땅끝으로 갈 계획을 바꾸어 완도로 나가기로 하고 승선했다.
갑판 의자에 앉아 물살을 가르며 남긴 포말의 긴 흔적과 안개 속의 작은 섬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류화숙 씨가 우리 일행중의 한 아주머니를 데리고 와서는 대뜸 팔공산의 내력을 설명해 달라고 한다. 까닭인즉 배를 기다리는 동안 그 아주머니 일행은 젓갈장수의 차 그늘에서 젓갈장수의 보길도 자랑을 듣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젓갈장수가 자기의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두고 보길도의 명승지를 올려놓았다고 열변을 토하니 이 아주머니들의 자존심이 꽤나 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보길도만 좋은 곳이 있는 게 아니라 대구에도 자랑거리가 많다고 하면서 팔공산 자랑을 널어놓았다고 한다. 동화사며 갓바위에 최근 조성한 통일대불까지 설명을 하는데, 그 젓갈장수가 한참 설명을 듣다가 “그러면 왜 팔공산이라고 하나?” 이 평범한 질문에 그만 이 아주머니들 대답이 막혀버렸다. 자식들 다 키우고 여가를 활용해 예절학교에서 만난 인텔리 주부들이 보길도의 한낱 젓갈장수에게 스타일 확 구겨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배의 엔진소리와 물 가르는 파도소리, 그리고 주위의 산만한 분위기 때문에, 또한 우리 일행 중에 젓갈장수의 질문에 시원스럽게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하는 의문이 일어 모두에게 설명할 필요성도 느껴, 돌아가는 길에 버스에서 설명하겠다고 약속했다.
청해진의 잔영에서 해상왕 장보고의 활동 상을 반추하고, 달마산 아래 미황사에 들려 불교의 전래 설을 더듬다가 다산초당의 찬 샘물을 한 모금 마시고 천일각에서 가져간 양주 한잔을 들어 다산의 형제애를 되새겨 본다. 백련사 만경루에서 향기로운 차 한잔을 마시고 구강포를 바라보는 경치가 가히 일품이다. 백련사를 보호하듯 에워싼 동백 숲은 천연기념물로 보호받을 만 하다.
계획했던 일정 중 안개로 땅끝을 보지 못했으나 먼발치로나마 청해진을 보는 것으로 대신하고 귀가 길에 올랐다. 남해고속도로에 오르니 예상보다는 차가 그렇게 붐비지 않아 섬진강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는 줄 곧 대구로 향하던 중 마이크가 나에게 돌아왔다. 팔공산에 대한 약소글 해달라는 뜻이다.
달성군에 소속되어 있던 팔공산이 1981년 대구가 직할시로 승격될 때 대구에 편입되었으며, 팔공산의 본래 이름은 신라 때 중악(中岳)이라 불렸으며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공산(公山)이라 불렀다. 공산의 명칭은 고려, 신라에 걸쳐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조 초기에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공산(公山)은 혹 팔공산(八公山)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조 초기에 팔공산이 처음으로 나타나 공산과 혼용되어 오다가 조선조 후기에 일반화되었다고 보여 진다.
공산에 팔(八)자를 붙여 팔공산으로 부르게 된 이유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설은 여덟 고을에 걸친 산이라서 팔공산이라 한다는 설, 두 번째 팔장군(八將軍)이 순사 했다고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 세 번째 팔간자(八簡子)를 봉안했다는 사실에서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 네 번째 중국의 팔공산에서 따왔다는 모화사상 설 등이 있다. 첫 번째 여덟 고을 설은 팔공산이 여덟 고을에 경계한 공공(公共)의 산이란 뜻으로 팔공산이라는 설이다. 팔공산은 대구, 영천 신령, 하양, 의흥, 인동, 칠곡 등 일곱 고을에 걸쳐 있으며, 때로는 시대에 따라서 여덟 고을에 경계하기도 했다고 보겠다. 두 번째 팔장군 순사 설은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대전 때 신숭겸, 김락, 전이갑, 전의갑, 등 여덟 장수의 순사로 인하여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다. 세 번째 팔간자 설은 동화사적비에 심지(心地)가 영심(永深)으로부터 8간자를 동화사에 봉안했다고 한다. 미륵의 불골간자는 팔간자 뿐이라서 팔간자는 귀중하여 중시했다. 팔간자(八簡子)의 팔(八)자를 앞에 붙여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다. 네 번째 모화사상 설은 조선조 배불 숭유정책의 영향으로 학자들은 모화사상에서 중국의 문물을 사모하고 숭앙했다. 그래서 태조 왕건이 공산대전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대패한 사실과 비슷한 고사를 가진 중국 안휘성 봉대현의 동남 비수(肥水)와 회수(淮水)의 남쪽에 있는 팔공산(八公山)에서 전진왕 부견이 천하통일의 대망을 이루려고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남조 동진과 대회전을 전개했으나 진의 명장 사석의 선전으로 대패했다. 부견은 팔공산의 초목을 보고 모두 진나라 군대로 알고 공포에 떨며 화살에 맞아 패주했던 고사에서 공산을 팔공산이란 중국의 명산에서 따와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다.
대구는 외지인이 와도 안내해서 가 볼만한 곳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대구와 그 주변에는 역사 깊고 아름다운 곳이 많다. 팔공산의 동화사, 은해사, 파계사, 송림사, 수도사 인각사 등 거찰이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고승 대덕을 배출했으며, 성전암, 불굴암, 거조암 진불암 중암암은 불교계를 이끌어간 고승들의 깨우침을 얻은 수도 처이다. 도동서원, 녹동서원, 인흥서원이 있는가 하면, 하빈의 태고정, 육신각, 삼가헌과 하엽정, 하목정도 대구를 빛내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비슬산 주변에도 숱한 유적과 자랑스러운 경관을 가지고 있다. 약령시도 경쟁력을 가진 값진 관광자원이며, 대구 타워의 아름다운 시가지 야경도 대구 시민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다. 서문시장의 포목점은 외국관광객에게는 볼거리와 살거리를 함께 충족시켜줄 수 있는 관광 자원이며, 대구향교가 현대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자랑거리이다.
이러한 역사 깊은 많은 유적과 자랑할 만한 아름다운 경승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 볼 곳이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가까운 것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다. 내 주변의 것에 관심을 가지고 먼 곳 다른 지방의 명승지와 유적지를 찾아 답사를 해야만 우리 주변의 것과 다른 지방의 것을 비교할 기준이 생기게 되며, 아울러 가까운 곳에 있는 우리 것의 소중함을 알 수 있게 된다.
보길도의 젓갈 장수는 가까운 자기 고장의 것에 너무 집착하여 다른 지방의 우수성을 접해보지 못했고, 대구의 인텔리 주부들은 먼 곳의 것에 호기심이 많으면서도 가까운 것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일어난 헤프닝이다. 이번 답사여행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이다.
대구시문우회 제13호 원고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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