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답사기

충절의 고장 영월

是夢 2006. 5. 24. 15:20
 

             忠節의 고장 寧越

  

                                                                鄭   時   植 회원


  상쾌한 아침을 달리다

  청우회의 문화유적 답사는 회원들에게 상당히 인기 있는 행사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金正宇 회장이 이 행사를 위해 목적지의 선정과 사전답사를 위해 여러 차례 상의를 하였으며 최종 목적지를 단종의 슬픈 역사가 깃든 忠節의 고장인 寧越로 정하고 답사의 길을 떠났다.

  새벽 여섯시, 가든하이츠를 출발하여 기름을 넣고 신천대로를 달리니 전날 정비를 한 소나타는 구형이긴 하지만 그래도 GOLD라는 칭호를 뽐내 듯 힘차게 달린다. 2차선의 중앙고속도로는 몇몇 부지런한 사람들 외에는 한적하다. 한 시간 남짓 달려온 낙동강 변 휴게소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는 김회장이 운전대를 바꿔 쥐고는 북진을 계속한다. 주인보다는 김회장의 운전솜씨가 더 좋은지 고속도로보다 더 잘 달린다.

  진달래가 산천을 물들이고 조팝꽃의 순백이 들녁을 수놓아 우리들의 답사 길을 환영하는 아름다운 강산에 복숭아도 질세라 연분홍의 자태를 곱게 내민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풍산을 지나 예천에서 영주로 방향을 잡아 시가지를 벗어나면서 바로 상리 단양으로 가는 왼쪽 길로 접어든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처음 가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지도를 펴들고는 나아갈 길을 점검한다.

  김회장과의 호젓한 여행길이라 할 얘기들이 많다. 두 부부가 함께 드라이브를 즐긴 적은 가끔 있었으나 둘만이 화창한 봄나들이를 갖기는 처음이라 청우회의 운영에 관한 얘기라든가 서로 다른 직장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관해서, 서로의 앞날에 대한 전망을 하기도 하고, 퇴직 후를 대비한 마음의 준비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자식들에 과한 얘기, 최근 홍역을 치르고 영광을 안은 李海鳳 회원이 어떻게 하면 정치인으로서 잘 성장할 수 있을까라는 자유분방한 이야기가 오고가는 마음의 문을 열어 버린 그런 시간이, 속도를 내어 달리는 조그마한 공간에서 농밀하게 울어 나오고 있다.


  백두대간의 마루턱을 넘어

  예천에서 단양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해도 53km의 이정에는 반드시 백두대간을 넘어야 한다. 영주서 넘어가는 죽령대신 가파른 산을 기어오르는 뱀 길을 굽이칠 때마다 트렁크에 담긴 짐 솔리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철 늦은 산수유꽃이 핀 능선에는 해발 850m의 ‘低首嶺’이라는 안내판이 숨가쁜 우리를 맞이한다. 경북 예천군 상리면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분수령이다. 달려온 뒤는 영남이요 앞으로 나아갈 곳이 충청북도 단양군, 도계(道界)를 이루는 마루턱에 조그마한 휴게소는 아직 일러서인지 문을 닫았으나 휴게소를 다듬는 일꾼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잘 다듬어진 포장길은 탈색이 되어 제법 오래되어 보이나 지나가는 차량은 가물에 콩 나듯 드물어 한적하다.

  영(嶺)너머에는 넓은 초지에서 한우와 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별천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단양축협에서 경영하는 35만평 규모의 소백산 관광목장(전화 : 044-22-9270-1)이 골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갖추고 있는 이 목장은 연수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주말 가족단위 휴양지나 기업체의 사원연수 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지난 94년도 10월에 개장한 이 목장은 15평 규모의 방갈로 여섯 채와 10개의 방을 갖춘 숙박시설도 갖추고 있다. 여름철 휴양지로는 멋진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족들과 한번쯤 이용해 보자는 김회장과의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면서 브레이크에 계속 열을 올리면서 영주 - 단양간의 국도로 접어든다.

  골짜기 따라 흩어져 있는 산촌은 제법 반듯한 기와집은 품위를 유지하고 있으나 초가에서 스fp트로 옷을 갈아입은 집은 기름기가 빠지고 때가 묻어 초라한 몰골이 매년 짚으로 이는 초가보다 못해 보이는 것도 우리 산천에는 우리 산야에서 난 오랜 역사를 가진 재료가 어울리는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원리인가?

  강변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는 남한강을 거슬러 신 단양을 지나 월석(月石)산지로 유명한 영춘으로 향했다. 남한강 유역은 수석산지로 이름난 곳이라 강변에는 탐석을 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강바닥의 보물을 캐는데 열중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아직도 오염되지 않은 몇 안 되는 강중에도 이 남한강은 골이 깊고 산림이 울창한 때문에 풍부한 수량을 가지고 있어 수도권의 젓 줄이 되고 있다. 빼어난 산세와 푸른 물이 어우러진 경관은 가히 일품이라 조국의 아름다운 산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수석에 일가견을 가진 김회장이 휴일마다 찾아 나선 곳이기도 해서 찾아가는 길이 그렇게 나설지 만은 않았다.


  김 삿갓 묘소에 정중히 참배를 하고

  영춘에서 김 삿갓 묘소 가는 길을 물어 영월 - 태백을 잇는 도로에서 태백 쪽으로 조금 거슬러 올라가 하동면사무소에 들어가서 산불 때문에 일요일에도 근무를 하고 있는 고진희 계장에게 용건을 얘기했더니 친절하게도 김 삿갓 상회가 있는 입구까지 안내를 해 주어 강원도의 인심의 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김 삿갓 상회에서 국도를 벗어나 오른편으로 접어들었다. 길 입구부터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거칠어진 길이 매우 험하다는 예고를 한다. 7km중 2km는 포장이 되었으나 거칠기 그지없는 산길을  김회장의 능숙한 운전 덕분에 와석리 노루목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난고(蘭皐)의 묘지에 도착했다.

  방랑시인 김 삿갓은 우리민족에게 해학과 희망을 안겨준 서민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대중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를 찾는 길은 왜 이렇게 험악한지? 이제 민선자치시대가 시작되어 그를 사랑하는 많은 국민들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늦었으나마 길을 넓히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 삿갓 식당의 간판을 단 포장집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우리들을 맞아 준다. 노루목 새마을 부녀회에서 참배객을 위해 경영하는 간이식당이다.

  개울을 끼고 왼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묘소는 잔디로 비교적 잘 가꾸어져 있으며 상석을 크고 평평한 자연석으로 놓아 김 삿갓의 자유분방하였던 그의 개성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망두석도 다듬지 않은 거치른 돌을 세워 오히려 친근감을 준다.

  김회장과 나는 미처 준비하지 못하여 한 잔의 술도 따르지 못하였지만 그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다소나마 풀고,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면서 지배계층에게 억눌린 민초들에게 용기와 삶의 보람을 불어넣은 그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하였다.

  김 삿갓 김병연(金炳淵)은 호를 난고(蘭皐)라 하며 순조 7년(1807년)에 김안근과 함평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홍경래 난에 가담한 조부가 역적으로 몰려 참살 당하고 노비의 도움을 받아 황해도지방으로 피해 다니다가 영월까지 흘러들어 그의 나이 18세 때 영월 동헌 백일장에서 조부를 욕되게 한 시로 장원한 후 하늘을 볼 수 없다며 삿갓을 쓰고 방랑을 시작하였다. 철종 14년(1863년)에 전라도 동복(同福)에서 사망하였으나 3년 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묘역은 1982년 10월 17일 박승국(朴承國)이란 사람이 찾아내어 사학자들의 고증을 받아 확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86년에 영월 유지들이 ‘김 삿갓 유적 보존회’를 만들어 1987년 김 삿갓의 3차 회갑기념사업을 준비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전두환 대통령이 강원도 출신의 심명보 국회의원으로 하여금 묘지 정화사업을 실시하였다고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묘지 맞은편에는 여러 개의 비석들이 제멋대로 어지럽게 자리를 잡고 있다. 전체적인 설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계획적으로,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슷한 내용들이 담긴 비석은 설립한 사람이나 단체의 힘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다른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길을 넓혀서 찾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김 삿갓다운 소박하고도 단아한 묘역주변의 정비도 아울러 이루어져야겠다.

  김 삿갓 식당에서 옥수수로 빗은 막걸리와 감자가루로 꿉은 배추전의 감치는 맛으로 출출한 배를 채우고는 되돌아 나왔다. 우리 청우회 회원들은 포장이 완료되는 내년도에나 ‘방랑시인 김 삿갓’을 흥얼거리면서 한번쯤 들려서 시선(詩仙) 김 삿갓을 음미해 봄직하다.   


영월의 별미와 잠자리를 를 찾아 예약을 하였으나

  영월로 들어가는 길에 김회장이 선행을 베풀어 편승자를 태웠더니 하동면 부면장이라 영월의 지역사정에 대한 예비정보를 얻고는 영월 군청 문화공보실로 찾아 갔다. 산불예방을 위해 많은 직원들이 출근하여 근무를 하고 있다. 며칠전 고성군에서 일어난 산불로 엄청난 피해를 입어 강원도의 전공무원이 초비상근무를 하고 있었다.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있는 안백운씨의 안내를 받아 식당과 숙소, 그리고 단종과 관련된 유적지의 현지 안내를 받았다. 만찬은 울산 큰 얘기 박영숙씨가 영월로 시집와 3년간의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영월 유지들의 발걸음이 잦은 강산회관(73-1010, 374-3050)으로 정했다. 산더덕과 남한강에서 잡은 민물매운탕을 특식으로 주문을 하고는 조찬을 위한 해장국집도 이지역의 술꾼들의 사랑을 받는 대흥식육식당(73-4390, 73-1776)으로 정하고, 점심은 장릉 옆에 있는 신용이씨가 직접 주걱을 잡고 솥뚜껑을 여닫는 장릉보리밥집(374-3986)에 가서 예약을 했다. 이집의 막걸리가 일미라고 안내하는 젊은 문화재위원이 귀 뜸을 해준다.

  그러나 숙소가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호텔이 없어 장급 여관을 찾아 나섰는데 첫 집부터 반기지 않는다. 열다섯 개의 방을 주기가 어렵단다. 위치는 중심가여서 적당하다고 생각되었으나 종업원이 그렇게 반기는 표정이 아니라 몇 군데 가봤으나 전국행사를 치르는 청년회의소와 예약이 되었다느니 방이 그렇게 많지 않다느니 하면서 가동율이 낮은 단체손님을 반기지 않는 눈치를 늦게서야 알아차리고는 마지막으로 외곽에 있는 그린장(73-8361-2)에 들려 보니 우리 회원들을 모시기에는 마땅치 않았으나, 우선 구두예약을 하고는 온 라인 구좌로 1주일 전에 예약금을 보내기로 하였다. 우리 회원들이 영월에서 머무를 기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어 유적지답사 코스를 점검하였다.


단종의 유적답사 코스를 점검하고

  영월 시가지를 벗어나 아직도 기름 끼가 반지르한 포장도로를 따라 청령포에 도착하니 나룻배가 막 출발하여 건너가고 있다. 동남북 삼면이 남한강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출입할 수 없는 섬과도 같은 곳이기에 유배지로는 더할 수 없이 좋은 곳이다. 단종이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상왕(上王)으로 있다가 성삼문등 지지 세력에 의한 상왕 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되어 노산군으로 감봉되어 중추부사 어득해(魚得海)가 거느린 50명 군졸의 호위를 받아 원주, 제천을 거쳐 7일 만에 이곳 청령포에 도착하여 2개월여의 자유 없는 유배생활을 하였다. 단종은 외부와 두절된 이 적막한 곳에 유배되었으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가 나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어 동헌 객사로 처소를 옮겼다. 단종 유배 시에 세운 금표비(禁標碑)와 영조때 세운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가 옛일을 전하고 있다. 금표비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구十尺 車後泥生亦在當禁”이라 기록되어 있다.

  소나무로 우거진 숲 속에 우뚝 솟아 있는 관음송(觀音松)은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m에 600여년의 수령을 가진 두 갈래로 갈라진 거목이다. 단종이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과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으로 관음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600년의 역사를 관조하고 있는 보배로운 신목(神木)이다.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옮겨와 약 1년간 처소로 사용하다가 사약을 받은 관풍헌(觀風軒), 관풍헌은 조선시대의 관아건물로서 본래 지방수령들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동헌으로 1456년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봉, 청령포에 유금 되었다가 그 이듬해인 1457년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단종이 17세의 어린 나이로 이곳에서 세상을 하직한 애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단종이 유배되기 25년전인 1431년에 관풍헌 동편에 창건한 매죽루(梅竹樓)는 단종이 자주 올라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읊었다는 자규사(子規詞)가 떠오른다.

    

     달 밝은 밤에 두견새 울음소리 더욱 구슬퍼

     수심 많은 이내 목 누(樓)머리에 의지하노라

     슬피 우는 네 목소리 내 듣기 괴로우니

     네 울음 그쳐야 내 수심도 그치리라

     세상에 괴로움 많은 자에게 한마디 부치니

     아예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말아다오   

          

  관풍헌 부근은 지금은 도심지가 되어 인가가 밀집되어 있으나 당시만 하드라도 누각주변에는 울창한 숲이 있고 숲속에는 두견새의 울음이 그치지 않으니 단종께서는 자주 누각에 올라 자규시(子規詩)를 읊었다 해서 그 후 이 누각을 자규루(子規樓)라고 한다.

  단종이 승하한 후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른 시종과 시녀의 위패를 모신 민충사(愍忠祠)에는 벚꽃이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듯 낙화가 되어 원혼을 달래고 있다.                

  민충사 아래에 있는 금강정(錦江停)에는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하듯 국악 수강생들이 선생님의 장단에 맞추어 장구를 신나게 배우고 있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부사 이보흠(李甫欽)등이 상왕의 복위를 은밀히 꾀하고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자들은 참살 당하고 노산군은 종사득죄(宗社得罪)의 구실로 세조 측근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단종이 승하한 후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어 주는 자가 없었는데 평소 충성심이 지극했던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현 장릉이 위치하고 있는 동을지산(冬乙支山) 기슭에 매장하고 몸을 숨겼다고 한다. 장릉(莊陵)이란 능호는 숙종24년(1698년)에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받았다. 사후 251년 만에 복권이 된 셈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과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양쪽으로 망주석, 문인석, 석수 등의 석물이 놓여있고 봉분 주위에는 둥근 담장을 둘러 어린 단종의 한을 달래는 듯 포근하게 안고 있다. 묘역 안에는 정자각(丁字閣)을 비롯한 단종과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있다. 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하면서 세운 단종대왕릉비(端宗大王陵碑)에는 ‘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 쓰여 있다. 단종을 위하여 순절한 충신 32인의 위패를 모신 충신위(忠臣位)와 단종에게 충성을 다한 198인의 조사위(朝士位), 환관, 군노 28인을 모신 환관위(宦官位), 궁녀, 관비 등 6인의 여인을 모신 여인위(女人位)등 260위를 배설한 배식단(配食壇)과 배식단사(配食壇祠)가 정조15년(1791녀)에 세워졌으며, 영조2년(1726년)에 어명으로 세운 엄흥도정려각(嚴興道旌閭閣)은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문(旌門)이다.

  서울근교에 있는 어느 왕릉보다 멀리 떨어져 외롭게 한을 달래고 있는 장릉은 그러나 영월 사람들에게는 그분을 위하는 마음이 지금까지 내려와 이 고장을 충절(忠節)의 땅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산벚나무꽃이 만발한 충주호반을 따라

  제천서 청풍을 거쳐 수안보로 가는 길을 택하여 충주호반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드라이브의 멋을 즐겼다. 호반을 끼고 산복으로 난 가로에는 산벚나무 가로수를 심어 주변의 경관을 더욱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주변의 산에는 산벚나무의 꽃이 수를 놓아 이 지역이 자생하는 산벚나무의 산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산벚나무는 재질이 우수하여 우리 선조들이 가구재로 많이 활용하여 한때는 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30여 년간 산림을 잘 가꾸어 임상이 회복되면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지금은 4월 하순에서 5월 상순에 걸쳐 전국의 산하을 꽃으로 수를 놓고 있다. 해인사에 보관되고 있는 세계적인 문화재인 팔만대장경판의 대부분이 이 산벚나무라는 전문가의 이야기는 이 나무의 재질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꽃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이 나무의 열매는 새들이 좋아하는 먹이라는 점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좋은 수종이라 할 수 있다. 도시근교의 공원이나 산불 난 곳에 조림용으로 권장할 만한 수종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이 빚은 최고의 걸작 소망석

  수안보 상록 호텔 온천수에서 답사의 피로를 풀고는 해거름에 산책을 나서니 마침 온천제 기간 중이라 돼지고기 숯불갈비를 주제로 한 야외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관광객에게도 술잔을 권하는 푸근한 시골다운 인심에 마음이 흐뭇하였다.

  호텔로 들어가는 입구에 아름다운 커다란 돌 하나가 자리를 잡아 시선을 끌고 있다. 김회장은 이미 이 돌의 내력을 잘 알고 있어 나를 그곳으로 안내를 한다. 백색의 화강암이 오랜 세월동안  물에 씻겨 아름다운 윤기가 마치 미인의 우유  빛 피부와도 같다. 삼각형의 안정된 구도에 동굴처럼 뚤린 구멍으로 저녁노을이 비친다. 자연이 빚어낸 참으로 아름다운 최고의 조각이라는 찬사가 절로 나온다. 이 아름다운 작품의 이름이 ‘소망석’이다. 1988년 5월에 충북 중원군 앙성면 조천리 남한강 수심 2m지점에서 캐내어 이곳으로 옮겼다고 새겨져 있다. 높이 3.5m, 둘레 9.9m, 폭 3.4m, 무게 28톤의 수석은 ‘대한민국 제일의 수석’이라는 칭찬을 들어도 아깝지 않으리라.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인 ‘청실홍실’의 배경인 수안보에서 하루 밤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영월보다는 더 낭만적이고 좋겠다는 김회장의 제안에 따라 수안보에서 가장 최근에 개업한 수안보 파크호텔에 예약을 하고는 못 풀어 찝찝하던 숙제를 해결한 가뿐한 기분으로 자동차의 라이트를 켜고는 이화령을 넘고 낙동강을 건너 대구에 도착하니 10시 40분, 장장 588km의 답사여행을 마감하였다.


                                    청우회지 제120호(199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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