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답사기

감악산 가는 길

是夢 2006. 5. 24. 14:20
 

감악산(紺嶽山) 가는 길

                                                   

                                                                 鄭 時 植(국방대학원)


북녘 땅을 지척에 두고 달리는 自由路

 

국방대학원에 입교하면서 서울근교의 명산들을 섭렵해 보려는 욕심을 가졌다. 이 욕심은 오랜 등산경험을 가지신 셋째 형님의 동생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3월 20일 의정부에 있는 사패산(賜幣山)을 올라 도봉산의 우람하면서도 아름다운 능선과 백운대(836m), 인수봉(810), 만경봉(799)을 일컫는 삼각산의 의젓함을 감상하면서 경기오악(京畿五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먼저 이 오악부터 형님에게 안내를 부탁드렸다. 관악(冠嶽)은 여러 번 올라봤으나 감악(紺嶽), 북악(北嶽), 운악(雲嶽), 송악(松嶽)은 아직 올라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니 한번은 올라봐야지 하는 호기심은 당연한 것.

  북한 땅의 송악산은 지금 당장은 어려우나 멀지 않아 형제가 함께 오를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면서 송악 다음으로 북쪽에 있는 파주의 감악산 등산을 위해 4월 20일 새벽 6시 30분에 출발하였다.

  성산대교에서 한강의 북쪽 제방을 따라 만든 자유로는 임진강 좌안으로 이어져 임진각까지 이르는 8차선의 차량전용도로이며, 판문점-개성-평양-신의주까지 이어져 대륙으로 뻗어나갈 통일을 대비한 민족통합의 도로이기도 하다. 오두산 통일전망대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북녘 땅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져있다.

  아침 안개가 철책 넘어 한강과 임진강의 경관을 방해하고 있으나 120km로 질주하는 차창 밖으로는 분명히 북녘 땅이 보이고 있다. 자유로가 지척에 둔 분단의 현장을 이렇게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빨리 갈 수 있다면 적(敵)도 서울에 빨리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쳐, 이에 대한 대비가 있는지를 살펴보았으나 강북대로를 지나서부터는 어디에도 그러한 대비를 위한 구조물은 찾을 수가 없었다. 넓고 달리기 좋은 멋진 도로이나 만에 하나라도 유사시를 대비한 그 흔한 적의 진입을 저지할 대전차 장애물은 왜 없는지? 이러한 의문이 국방대학원 안보과정의 교육결과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혼자서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나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였다. 그 후 합동참모본부에 근무하였던 대령에게 걱정삼아 물어보았더니 대전차 방어를 위한 무기가 발달하여 옛날에 해둔 장애물보다 더 효과적인 살포용 지뢰나 폭약으로 저지할 수 있는 대비책이 준바되어 있다고 하여 안심이 되었다.


淸白吏의 가르침을 찾아

 

자유로의 끝인 임진각에 이르기 전에 문산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꺾어 반구정의 안내판을 따라 자유로 밑으로 난 통로를 지나니 임진강으로 돌출한 언덕에 반구정(伴鷗亭)이 있다. 이조시대 청백리로 이름난 황희 정승이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내시던 곳이다. 황희 정승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2월 10일) 송경(松京 지금의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탄생하시어 우왕 11년(1385년) 23세때 진사에 합격하고, 공양왕 원년(1389년) 27세의 나이에 문과에 합격하여 이듬해에 성균관 학관이 되었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로 고려의 구신(舊臣)들과 같이 두문동(杜門洞)으로 피신하여 구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그러나 십이현(十二賢)의 추천과 황희의 지모에 반한 이태조가 끈질기게 조정에 나와 나라를 이끌어 줄 것을 간청해 어쩔 수 없이 다시 벼슬길로 나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에 취임하여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장자인 양영대군을 제치고 지차인 충령대군(후에 세종)을 세자로 책봉하려하자 후세에 큰 환란의 씨가 된다며 반대하고, 1413년(태종16년) 세자 폐립문제로 왕의 노여움을 사 관직을 박탈당했다. 성군인 세종 4년에 태종의 부탁을 받고 좌참판에 발탁된 후 좌․우의정을 거쳐 세종 13년에 영의정에 까지 올라 18년간 영의정에 재직하면서 이조의 국기를 바로잡는 큰 역할을 하여 그의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청백리로서의 귀감이 되고 있다.

  반구정은 86세 때 벼슬에서 물러난 황희 정승이 세운 정자로서 당시에는 낙하정(洛河亭)이라 이름 했다. 그러나 정자의 주인이 죽은 후에는 없어지고, 팔도사람들의 선현을 추모하는 승적(勝蹟)으로 수호하여 내려오던 곳이었으나 다행히 400년이 지난 뒤에 후손이 다시 세우고 ‘伴鷗亭’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6․25로 불타버린 것을 1967년 6월에 후손들이 복원하여 문화재자료 12호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정자의 바닥을 마루를 놓지 않고 시멘트 바닥으로 만들어 이제는 정자에 앉아서 갈매기와 벗하면서 시를 읊기에는 격에 맞지 않는다. 정자 내부에는 근래 정자를 중수하여 쓴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기(記)와 1957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의 중건기, 1977년 윤희구(尹喜求)의 중건기가 있을 뿐 옛 선인들의 시 한 수도 걸려있지 않는 설렁함을 느껴, 이제 반구정은 단순히 선현이 머물렀다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물로 전락한 것으로 보임은 필자의 지나친 비약일까?

  반구정에서 남쪽으로 바로 이어진 등성이에 반구정보다 작은 또 하나의 멋더러 진 정자가 있는데 앙지대(仰止臺)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이 앙지대는 유림들이 황희 정승의 유덕을 추모하여 영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할 때 함께 지은 것이라 한다. 앙지(仰止)는 「시경(詩經)」「소아(小雅)」에 있는 『高山仰止 景行行止(높은 산을 우러러 받들 듯이 넓게 트인 길 우리 따르리)』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후생들도 이 어른의 높고 넓은 뜻을 본받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정자 내부에는 1973년 노산 이은상이 쓴 중건기가 걸려 있다.

  바다처럼 넓은 임진강이 확 트여 정승이 노후를 즐길만한 아름다운 풍광이다. 그때는 나룻배를 타고 자유롭게 강을 건너다녔으련만 지금은 강의 양안에 철조망으로 차단하여 초병이 감시의 눈을 조금도 늦추지 않는 분단의 현실을 이 언저리에서 보고계실 노정승의 심정은 어떠하실까?

  황희 정승의 영정을 모신 영당도 전란으로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1962년에 복원하여 경기도 기념물 제29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른 아침이라 영당의 문이 닫겨 참배를 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면서, 문종 2년(1425년) 90세의 고령으로 건강하게 살다 가신 그의 고결하신 인격에 머리 숙여 재배 드린다.

   정승의 자리에 올라 선물을 가지고 온 아들 황치신(黃致身)을 보고 “네놈이 벌써 재물을 아느냐”고 호통을 치고는 즉시 임금에게 상소하여 파직시킬 것을 주장한 노정승의 강직한 선비정신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앞을 내다보는 忠情이 깃든 곳, 화석정(花石亭)

 

반구정을 뒤로하고 문산을 지나 적성으로 가는 길에 화석정을 찾았다. 이 화석정은 임진왜란과 얽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왜란에 대비하여 10만 양병을 주장한 율곡 선생은 왜란이 일어나면 임금이 밤에 이곳 임진강을 건너게 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이곳에 머물면서 정자의 기둥에 매일 기름칠을 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율곡이 죽기 전에 글을 써 봉함을 하여 마을의 촌로에게 전하면서 만약 임금이 이곳에 와 어려움에 처하거든 병조판서를 찾아 이 편지를 전하라고 하였다. 과연 몇 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한양을 포기하고 의주로 몽진할 때 날이 칠흑같이 어두워 뱃사공이 날이 어두워 건너기를 꺼려하여 난처하게 되었다. 이때 이 마을의 촌로가 병조판서를 찾아 율곡의 비단 주머니를 전하여 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질러라’는 비책이 있어 정자에 불을 질러 그 불빛으로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한다.(고제희 지음 ‘선현을 만나러 가는 길1’에서는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렀다고 함)

  화석정은 율곡선생이 국사의 여가와 퇴관 후에 매양 들러 시를 짓고 국사를 구상하며 묵상을 하던 곳이다. 원래 이곳은 고려 말의 학자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유지(遺趾)로 율곡의 5대조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에 의하여 세종 25년(1443년)에 창건된 것을 성종 9년(1478년) 선생의 증조부 이선석(李宜碩)이 중수하고 몽암(夢菴) 이숙함(李淑緘)이 화석정(花石亭)이라 이름을 지었다. 왜란 때 소실되어 80년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년)에 선생의 종증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때 다시 소실된 것을 1966년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하고 1973년 박정희 대통령 정부가 실시한 율곡선생과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화석정을 단청하고 주위를 정화하였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로서 보호를 받고 있으며 편액 ‘花石亭’은 박정희 대통령의 작품이다. 정자 안쪽 정면에는 유명한 「백세시(百歲詩)」가 걸려 있다. 이 시는 율곡이 8세 때 지은 것으로, 훗날 성혼의 손자인 성목이 92세에 썼다하여 두 사람의 나이를 합한 백세시라 한다.


        林亭秋己晩 騷客意無窮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숲속 정자엔 가을이 이미 깊어

        시인의 회포를 다할 길 없구나.

        물은 멀리 하늘과 잇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게 물들었네.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 내고

        강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북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날아가는가.

        처량한 울음소리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구나.

 

  이 오언율시(五言律詩)는 격조가 뛰어나 그의 시재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시에서 해가 지고 둥근 달이 떠오르는 형상을 ‘산이 달을 토해 낸다(山吐孤輪月)’고 표현한 시구는 창작의 극치라고 칭송받고 있다.

  화석정이란 정자 이름은 당나라의 이덕유(李德裕)의 「평천장(平泉莊)』이란 별장의 기문(記文) 중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기문에는 “평천장을 파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한 개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아름다운 자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한다. 이 처럼 선조(先祖)가 애완(愛玩)하던 곳을 오래도록 보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화석정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화석정 아래에는 분단의 상징인 임진강이 이 곳에 와 굽이쳐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상류에는 평양의 봉물을 서울로 나르던 나루터가 있던 곳에 옛 교량이 폭격으로 무너져 6․25의 흔적으로 남아 있고, 530여년간 화석정의 영욕을 바라보며 지켜온 거대한 느티나무(높이 12m, 가슴높이 둘레 4.5m)가 봄의 기운을 머금고 새로운 싹을 티울 준비를 하고 있다.

  정 앞에는 화석정가든이라는 식당이 문화재의 경관을 헤치고 있어 눈에 거슬렸으나, 소풍객에게는 멋진 휴식처가 되겠지 하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서 선생의 아호(雅號)로 더 잘 알려진  선생의 고향 율곡리(栗谷里)와 작별을 하면서 형님의 10만 양병설에 대한 이야기를 되새긴다.


  “사명대사가 김천 황학산 직지사에서 불문에 귀의한 후 보우(普雨)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봉은사에 들리면 한양의 선비들이 사명과 실력을 겨루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한다. 사명대사가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금강산에 갔을 때 서산대사는 사명의 능력과 중앙정가의 실력자와 교분이 두터운 줄 알고 10만 양병의 필요성을 설파하니 사명이 공감을 하고는 그와 친분이 두터운 병조판서 율곡에게 전한다. 율곡도 뜻을 같이하여 조정에서 일본의 야망과 그 대비책으로 10만 양병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거센 반대에 부딪쳐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8년 후의 임진왜란을 예언하고는 49세로 요절하였다. 그의 10만 양병설은 서산대사에 의해 발의되고 사명을 통해 병권을 쥔 율곡에게 건의를 하고 그가 구체화하여 그가 죽기 1년전인 1583년(48세)에 묘의에 부쳤다.”


  형님의 이 이야기는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율곡이 봉은사에 들려 불교의 생사설(生死說)에 깊은 감명을 받아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들과 두루 교류하며 불경도 공부하고 참선도 하였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명대사와의 교우관계, 그리고 금강산에서 서산대사와 같은 고승을 만나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부국강병을 논했을 가능성은 충분하였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때 주변국의 정세를 논하고 일본의 국내통일을 이룬 세력이 대륙진출의 야망을 간파하여 국가안보를 위해 강력한 군사력 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가능성은 있었으리라.


노란제비꽃은 산등성에 평화를 수놓고 있건만

 

적성면 소재지에서 해장국 한 그릇으로 아침을 대신하였다. 우거지에 선지로 끊인 해장국 맛이 주인아주머니의 마음씨만큼이나 구수하여 감악산을 찾는 등산객의 발길이 잦다고 말씀하시는  형님도 이 집을 자주 찾는 단골의 한 사람이다. 다리를 건너자 전곡으로 가는 길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꺾어 감악산을 바라보며 계곡으로 들어서니 만발한 진달래가 낯선 등산객을 환영한다.   

  영국군 제29연대 글로스터 대대가 전멸한 섬마리를 지나 왼쪽으로 비포장 된 산악 길을 따라 오르니 울긋불긋한 등산복차림의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산행을 시작하고 있다. 범륜사(梵輪寺)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등산화 끈을 조여 매고는 숨을 고르면서 지그잭으로 된 가파른 흙길을 따라 오르니 절 마당에는 진달래와 산도화가 행락객의 마음을 부풀게 한다. 길섶에는 노란붓꽃이 끈질긴 생명력을 내보이며 수줍은 듯 선을 보이고 있다. 계곡을 벗어나 왼쪽 가파른 능선을 올라서니  임진강 너머로 북녘 땅이 희미하게 보인다. 쾌청한 날이면 개성의 송악산도 보인다는데 오늘의 날씨는 황사현상인 듯 희뿌연 하늘이 시계를 가린다. 까치봉에서 잠시 쉬어 형님의 배낭에서 오이로 목을 축이면서 감악산의 전경을 조망하고는 일주 코스를 눈으로 겨냥한 후 다시 정상을 향해 오른다. 능선에 있는 방어호 위에는 무더기로 핀 노란 제비꽃이 평화를 구가하고 있으나, 새로이 구축한 진지가 남북간의 긴장이 아직도 팽팽함을 일러주고 있다.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동구권이 무너지고 공산주의 이념은 퇴조하여 지구상에서는 이미 이념의 대결은 끝났건만, 북한은 아직도 ‘우리식 사회주의의 주체사상’을 고집하면서 문을 닫고는 아직도 100만이 넘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연간 58억불의 군사비를 쓰면서도 굶주리는 인민들을 위해 2-3억불이면 해결할 수 있는 식량은 구걸을 하고 있으니 ‘자존’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주체사상’은 누구를 위한 사상이란 말인가?


마멸된 古碑는 말이 없는데--

 

  머리에서 흐르는 땀이 옷을 적시고 김이 무럭무럭 열을 뿜어내 대기로 발산하는 쾌감을 느끼면서 정상에 도착하니 『설인귀봉』 팻말에 675m의 산 높이가 우리를 맞이한다. 정상에는 헬리콥터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광장에 젊은이들이 눈 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면서 저마다 감탄사를 주고받느라 왁자지껄 시끄럽다.

  정상 북쪽에 단을 쌓고 그 가운데에 갓을 쓴 비석이 우뚝 솟아 있다. 높이 170cm, 폭 70-79cm, 두께 19cm의 화강석으로 된 이 비석에는 글자가 모두 지워져 한 자도 알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봉전몰자비(封典沒字碑)라는 이름이 주어졌나 보다. 원래 없던 갓을 후세 사람이 만들어 씨웠다는 이 고비(古碑)는 설인귀비(薛仁貴碑), 빗돌대왕비(비뜰대왕비)등으로 속전(俗傳)되어 오고 있다.  이 고비에 대해서는 대체로 『설인귀』설과 『진흥왕 순수비』설이 대립 요약되고 있다. 광무 3년(1899)에 발행된 「적성군지」와 속전에 의하면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 고장 출신이고 산신으로 봉해져 해마다 봄, 가을로 제향(祭享)되어 왔으며 따라서 그의 사적이 뚜렸하여 사적비를 건립할 만하다는 것이 설인귀 사적비로 추정하는 근거이다.

  그러나 설인귀의 출생과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필자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이 제기된다. 이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설인귀는 지금의 적성면 주월리의 가난한 집안 태생이라고 한다. 설인귀(薛仁貴 613 - 682))에 대해서 동아세계대백과사전을 찾아보니 “당나라때 장군으로 강주(絳州) 용문(龍門) 출신이며, 당나라 고종때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총독으로 659년(보장왕 18)에 고구려에 침입하였다가 횡산(橫山)에서 고구려 장군 온사문(溫沙門)에게 패하여 돌아갔다. 668년 나․당연합군에게 고구려가 망한 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그는 검교안동도호부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설인귀가 이 고장 출신이라는 것도 의문이 가고 또 설인귀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를 위해 아무런 공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구려를 침략하고, 삼국통일의 걸림돌이 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리는 비를 세우고 감악산의 정상을 『설인귀봉』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안동도호부에 검교로 있으면서 이 감악산을 찾아온 기념으로 지배자로서 위엄을 보이기 위해 비를 세웠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가 적성 출신으로 추앙받을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1982년 동국대학 감악산고비 조사단에서는 2차에 걸친 조사결과 비문이 마멸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지만, 그 형태가 옛스럽고 북한산비와 전체적인 외형이 흡사하다는 점, 또 적성은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리던 군사적 요충지로서 특히 신라의 국력이 왕성하여 국토의 확장에 힘쓴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임진강까지 진출하여 최전방지역인 적성을 순시한 후 세운 순수비로 추정했다는 결론이 필자의 생각과 일치하여 이 고비(古碑)를 만지는 손에 진흥왕의 웅대한 뜻이 전해져 오는 느낌이다.   


임꺽정(林巨正)은 의적(義賊)인가? 화적(火賊)인가?

 

  설인귀봉에서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바위산이 임꺽정봉이다. 설인귀봉과 임꺽정봉 사이는 잘록하여 재를 이루고 있는데 이 재를 지나 다시 가파른 능선을 올라서면 봉우리 동면은 천애절벽이며 남쪽 바위 틈새로 난 출입구에는 밑으로 내려가는 동아줄이 드리워져 있다. 이 동아줄을 타고 내려가면 길이 50여m의 넓직한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이 임꺽정의 활동 근거지라고 한다.

  서북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봉물을 임진강 나루터에서 탈취하여 이곳 감악산으로 숨어들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었으니, 고향이 가까운 이 감악산이 임꺽정의 초기 활동무대로서 여기서 세를 키워 황해도의 구월산으로 진출한 근거지였다고 볼 수 있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임꺽정은 감악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양주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가 극심하여 민심이 흉흉해지자 1559년 도당들을 규합하여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관아를 습격하여 포악한 관원을 살해 했다. 한때는 개성에 쳐들어가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을 살해할 정도로 백성의 지지를 얻어 세가 커졌으나, 이듬해인 1560년 형 가도치(加都致)와 참모인 서 임(徐 任)이 체포되어 그 세력이 위축되다가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根)의 대대적인 토벌로 구월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실존 인물이다. 태어난 해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그가 처형된 해는 임진란이 일어나기 30년 전인 명종 17년(1562)이다.

  이 임꺽정의 이야기는 1928년부터 39년까지 조선일보에 소설로 연재되어 애독자의 사랑을 받았으나 작가인 홍명희(洪命熹)가 신간회사건과 관련되어 체포됨으로서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백과사전의 기록이나 홍명희가 쓴 소설은 임꺽정을 의적(義賊)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특히 홍명희와 그의 소설을 토대로 한 TV드라마에서는 임꺽정을 계급투쟁으로 보고 있으나, 정치학을 전공하는 서울대학교의 최명 교수는 임꺽정을 계급투쟁으로 보는 것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최교수는 그의 저서인 「소설이 아닌 임꺽정」에서

  임꺽정의 행적을 보면, 그는 천한 도적임을 면하지 못한다. 의로운 일이라고는 조금도 한 적이 없는 인간이다. 화적을 이끌고는 인명을 살상하고 관아를 습격하여 사회를 소란하게 하였을 뿐, 못사는 사람들을 구휼(救恤)한 적도 없고, 탐관오리를 처단함으로써 사회 기강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한 일도 없었다. 무식한 천민의식의 발동으로 무모한 소란만을 일으킨 것이 임꺽정 행적의 특징이다. 게다가 그는 관헌에게 수탈을 당한 적도 없었고, 밥을 굶은 적도 없었다. 임꺽정은 우연하다면 우연한 사건으로 살인․방화․탈옥의 죄를 짓고, 어쩔 수 없이 적굴로 피신하여 도적이 된 사람이다.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급투쟁을 하려고 도적이 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면 임꺽정의 행동에서 계급 투쟁적 요소는 그 출신이 백정이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벽초(홍정희의 호)가 임꺽정의 행동을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였다면 잘못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천재도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아니면 그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꺽정이 계급투쟁을 하였는지 아닌지는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하나의 역사적 인물을 놓고 이렇게 엄청나게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악산에서 얻은 소중한 지식이다.

  최근에는 TV드라마로 방영되면서 이 감악산의 동굴도 소개가 되어 휴일이면 등산객들이 몰려와 접적지역에 깃든 정적은 깨어지고 사람들의 발길로 몸살을 앓는 곤욕을 치루고 있다. 「감악산의 고요」를 숨겨놓고 혼자서 즐기시던 형님은 자신의 『산』을 빼앗긴 듯 아쉬워하신다.

  새로 부임한 대대장이 임꺽정 동굴을 탐색하러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함께 보고 싶은 호기심이 났으나 나의 둔한 몸으로는 위험이 따르는 험난한 코스라 나이 탓을 하면서 하산하였다.


영국군은 무엇을 위해 異國魂이 되었는가?

 

  감악산 등산을 마치고 설마치 고개를 넘어 양주군에 있는 가나안농원(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산리 414-1 전화 : 0351-63-5909, 5654)에서 별미인 꿩 샤브샤브로 점심을 먹고는 다시 설마치 고개를 넘어 『설마리 전투』의 현장을 찾았다. 오늘(4월 20일 일요일)이 마침 설마리 전투 제46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식이 오전 11시에 있었다. 우리가 현장에 도착하니 기념행사는 끝나고 행사에 참석한 영국인들이 눈에 띤다. 노신사들과 그들의 가족인 듯, 검은 바지에 흰 브라우스를 단정히 입은 젊은 여인들이 모여서 그때의 장면을 회상하는 진지한 모습에서 오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앞에 추도하는 화환들이 놓여 있는 기념비는 산 바위벽에 벽돌로 쌓아 네 개의 비문이 부착되어 있다. 위 두 개는 좌측에 유엔기, 우측에 부대마크, 하단의 좌측에는 한글로 된 설마리 전투전기, 우측에는 영문으로 된 설마리 전투전기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1년 4월 22일-25일 크로스타샤 언덕위에 세운 이 기념비는

다음 양부대의 영웅적인 공적을 찬양하며 길이 기념키 위함.

크로스타샤 연대 제1대대

영포병 제170박격포대 소대

이 양 부대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4일간이나 거대한  수

적병에게 포위된 중에서 용감한 투지력을 발휘하였다.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대대장(중령 李龍石)의 설마리 전투를 소개하는 안내문을 소개함으로서(다소 지루하지만) 이 전투가 얼마나 처절하였으며, 영국군의 불퇴의 군인정신이 전세를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이해하고자 한다.


  여기 우뚝 선 꼿꼿한 기상이 있다. 오직 인류애와 사명감으로 누구도 재현하지 못할 위대한 희생을 감수한 젊디젊은 600여 영령들이 있다. 이 곳을 지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1951년 4월 국군과 유엔군은 임진강 - 전곡 - 양양을 연하는 캔사스(Kansas)선을 확보하고 휴전을 모색하기 위해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중공군 제3, 제19 양병단을 임진강 북안으로 추진하여 개성 북쪽과 구화리 지역, 철원리 평강 지역, 금화와 화천 북쪽에서 각각 공격집단을 편성하여 공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51년 4월 22일, 중공군의 1차 춘계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적성 일대에는 영국군 제29여단 예하 Gloucestershire 대대, 중앙의 장현리 일대에 Fusilier 대대, 우일선 강북안의 금굴산 - 동아리 일대에 Belgium 대대가 전진기지를 방어하고 있었고 29여단 본부와 Uiter 대대가 여단 예비로 봉암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곳 적성일대에 배치된 그로스타샤 대대 병력은 불과 652명, 그에 반해 중공 제63군 제187, 189 사단은 3만여명으로 자그마치 병력대비 1:50이었으니 실로 구르는 바위를 계란으로 막는 격이었다.

  중공군은 A중대가 배치된 중성산을 최초로 공격하였다. 교두보 확보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4월 22일 22:00부터 교전이 시작되었다. 대대는 45야포연대의 탄막 요청사격과 만월을 이용한 조준 사격으로 초기에는 중공군을 제압하는 듯 하였으나 아군에 비해 월등한 병력과 화력을 앞세운 인해전술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A중대 1소대장 Cutis 중위는 부상을 무릅쓰고 끝까지 대항하다가 전사하였고 중대본부가 피습당하여 중대장 및 통신병이 전사하였다. 중공군 599연대는 187고지의 D중대 및 14고지의 중대에도 공세를 확장하였다.

  4월 23일, 날이 밝으면서 적의 공격이 둔화되자 대대는 여단 포병의 지원하에 감악산 북서쪽 설마치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아군의 항공 폭격은 오히려 적의 증원부대를 불러들였고, 23일 밤 중공군은 아군을 집중 공격하였다. 23:00경 대대는 235고지(현 유적지 좌측산)에 집결하여 고립방어 전투에 들어갔다. 대대는 적의 포위망에 쌓이고 있었다.

  이미 적 187사단에 의해 손실된 전력으로 3만여명과의 전투는 애초부터 승부가 결정된 싸움이었다. 이를 만회하고자 29여단장은 필립핀 제10대대로 하여금 대대를 구출하도록 하고 식량, 탄약등의 보급품과 건전지 부족으로 인한 통신두절 상태에 빠진 대대에 경비행기를 이용하여 보급품을 투하하였으나 대부분 중공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구출의 임무를 띤 10대대 역시 적의 막강한 화력앞에는 수단이 없어 작전은 실패하였고 급기야 4월 25일, 여단장은 “포위망을 뚫던지 아니면 투항하라”는 최후의 통첩을 띄우기에 이르렀다.

  대대장 Carne 중령은 중대별로 병력을 분산하였다. 그것은 위험한 집단행동을 피하고 각 중대장들이 재량껏 적의 포위망을 각개 격파하여 우군 진지에 합류토록 한 처참한 최후의 작전이었다. 이 때 대대 군목과 의무장교 그리고 수 명의 의무요원들은 끝까지 산정에 남아 부상병들을 치료하다가 전원 포로가 되었다. 대대장 역시 야음을 틈타 포위망을 빠져 나가려다 포로가 되었고 A, B, C 중대 생존자들도 각각 소집단을 이루어 행동하였으나 역시 모두 포로가 되거나 사살되었다. 오직 D중대 39명만이 생존하였다.

  60시간의 전투! 그 처절한 결과였다. Glostershire 대대의 이런 희생으로 아군 방어선인 캔사스선의 시간확보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고 이는 차후 반격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Glostershire 대대의 600여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이 곳에는 단 1명의 이탈자 없이 진지를 사수한 강인한 군인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서 그토록 결연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들의 군인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영국의 유명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할 시는 꼭 이 곳을 찾고 있고, 최근에는 대처 수상과 촬스 황태자 부부도 이 곳을 다녀간 적이 있다.

  이 곳을 지나는 대한의 간성들이여!

  내 나라, 내 땅, 이젠 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는다. 우리의 손, 우리의 힘으로 지켜나가야 할  우리의 조국이 아닌가!


英國 그로세스터샤 聯隊 臨津江激戰 第46周年 記念式」안내 판프렛을 보니 홍콩주둔 영국군 의장대가 이 행사를 위해 참석 했으며 영국여왕의 ‘메시지’를 그로세스터 공작(公爵)이 낭독하였고, 영국 국방무관 C.D Parr 준장이 전투약사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한국에 거주하는 영국 시민단체와 각종사업을 하는 영국 기업의 한국지사에서 제공한 장학금을 경기여자실업고등학교, 적성종합고등학교 학생에게 전달하였다. 한때 세계에서 해질 날이 없었던 대영제국의 면모를 보여주는 기념식의 잔영을 보면서, 도움을 받은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그 은혜를 갚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한반도라는 낯선 땅에서 무엇을 위해 異國魂이 되면서까지 남긴 불멸의 위대한 전공에 대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천부적 자질을 타고난 예술의 집안

 

영국군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떨치지 못한 숙연한 마음으로 자운서원을 찾아 법원리로 방향을 잡았다. 몇 번이나 길을 물어 고개를 넘으니 율곡 교원 교육원이 나오고 오른쪽에 넓은 주차장에는 띄엄띄엄 몇 대의 자가용이 주차를 하고 있다. 입장권을 사서 넓은 광장에 들어서니 율곡기념관이 보인다. 먼저 그곳으로 발길을 잡았다. 입구의 안내문에는 『선생의 교지 등 많은 유품이 6․25동란으로 유실되었고 남아 있는 유품과 그의 모친 신사임당의 유품을 중심으로 7남매 중 어머니의 예술적 자질을 닮은 큰누님 梅窓과 막내 동생 玉山의 유품으로서 1986년 11월 19일 율곡교원 교육원의 개원에 즈음하여 문화공보부장관의 허가로 오죽헌의 유품과 개인소장품을 복제한 것으로 진품에 거의 손색이 없으며 유품에 기록된 원문 내용을 전문가의 힘을 빌려 다시 正書 하고 해석을 붙였다.

 

  율곡 유품 : 격몽요결, 시문, 서간문, 벼루 등 15종 16점“

  매창 유품 : 매화도, 묵화첩 등 3종 7점

 신사임당 유품 : 포도도, 곤충도, 초서, 산수도, 병풍, 자수병풍 등 18종 

                         59점 

  옥산 유품 : 초서병풍, 매화병풍, 묵화첩 등 5종 27점

  기타 : 소현서원, 청계당 등 사진 2종 2점.

  소유 유품 : 총 43점 111점』을 적어 기념관이 율곡교원 교육원 개관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하였으며 소장품의 내력과 그 수를 안내하고 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니 신사임당의 네 폭짜리 매화병풍이 봄의 내음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듯 하다. 매창의 「달과 매화」는 둥근 보름달을 하늘에 걸고 고목에 핀 매화는 청아한 기품과 고절한 멋을 풍겨, 모녀간의 손끝에서 나온 예술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 이 기념관에는 분재기(分財記)가 두 편 전시되어 있다. 율곡의 외할머니인 용인이씨(龍仁李氏, 1480-1569년)가 신사임당 다섯 자매에게 남긴 유산분배기록과 율곡의 일곱 남매가 유산을 분배한 기록이다. 7남매의 분재기는 “명종 21년(1566년) 5월 20일 율곡의 형제자매 7명이 모여서 회의한 후 작성한 문서. 어머니 사임당이 별세한지 15년, 아버지 원수공이 별세한지 5년이니, 맏형 선(璿), 둘째형 번(璠), 셋째인 珥, 넷째 瑀 등과 맏사위 조대남, 둘째사위 윤 섭, 그리고 홍천우의 처로서 과부가 되어 있던 셋째 딸이 참석했다”라고 기록된 분재기는 아들 딸 구별 없이 모두에게 유산을 분배한 것은 오늘날의 민법과 일치하고 있다.

  율곡이 쓴 『격몽요결』은 어린이의 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책으로 1577년 율곡선생이 편찬 간행하였다. 그 내용은 입지(立志), 혁구습(革舊習), 지신(持身), 독서(讀書), 사친(事親), 상제(喪制), 제례(祭禮), 거가(居家), 접인(接人), 처세(處世) 등 10가지 장으로 되어있다. 이 격몽요결의 내용을 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교육이 너무나 지식의 습득에만 치우쳐 있고 사회인으로서 갖추어야할 예절에 관한 기본교육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민족의 비극을 막지 못한 화가 아내에게 미칠줄이야

 

문성문(文成門)밖에 있는 묘소의 약도를 보니 가운데 있는 주맥에는 아래에서부터 율곡의 맏 아들인 이경임 부부, 율곡의 부모 원수공과 사임당, 맏 형 이선 부부, 율곡, 율곡의 부인 노씨의 묘가 있으며 주맥의 양쪽에 율곡의 둘째 부인 김씨, 큰 누님인 매창의 시부모, 매창의 부부 등 13기의 묘가 다정스럽게 자리를 잡은 가족묘원이다.

   문성문을 들어서니 우거진 송림 사이로 오래된 돌계단이 위로 나있고 돌계단 오른쪽으로 올라 조선조의 대학자로 퇴계와 쌍벽을 이룬 율곡을 낳아 기른 원수공과 신사임당의 합장묘 앞에 섰다. 본관이 덕수(德水)인 원수공이 평산 신씨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딸과 혼인하였으니 그녀가 조선의 최고 여류문인이요 예술가며 현모양처의 귀감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그녀는 19세에 출가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율곡은 부친이 36세, 모친이 33세때 외가인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율곡의 잉태에 얽힌 설화는 밤나무와 관련되는 것으로 몇 가지가 전해져 오고 있으나,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 로맨틱하고 극적인 전설을 소개한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인천에서 수운판관으로 재직할 때 사임당을 비롯한 식솔들이 산수가 수려한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판관대에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하루는 이원수가 휴가를 내어 인천에서 봉평으로 오던 중이었다. 날이 저물어 평창군 대화면의 한 주막에서 여장을 풀게 되었다. 그 주막의 여주인은 그날 밤 용이 가득히 안겨오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주모는 그것을 하늘이 점지해주는 비범한 인물을 낳을 잉태 꿈으로 생각하였다. 그날 주막의 손님은 이원수 뿐이었다. 주모는 이원수의 얼굴에 서린 기색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고, 하룻밤 모시려고 하였으나 이원수의 거절이 완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무렵 사임당 신씨는 강릉의 친정집에 잠시 머물고 있었는데, 역시 용이 품에 안겨드는 꿈을 꾸었다. 언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140리 길을 걸어 집에 돌아왔다. 주모의 간곡한 청을 뿌리친 이원수도 그날 밤이 깊어 도착하였다. 바로 이날 밤 율곡이 잉태된 것이다.

  며칠 집에 머문 이원수는 인천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주막에 들러 이제 주모의 청을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모가 거절하였다. “하룻밤 모시기로 했던 것은 신이 점지한 영재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어르신의 얼굴에는 전날의 비범한 기가 없으니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번 길에 댁에서는 귀한 인물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허나 후한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원수는 주모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주모에게 혹 그 화를 막을 방도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주모가 이르기를 밤나무 1천 그루를 심으라는 것이었다.

  이원수는 장차 태어날 자식을 위하여 주모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몇 해가 흐른 뒤 어느 날, 험상궂은 중이 시주를 청하며 어린 아들 율곡을 보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원수는 주모의 예언을 떠올리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중은 밤나무 1천 그루를 시주하면 아들을 데려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원수는 쾌히 승낙 하고 뒷산에 심은 밤나무를 모두 시주하였다. 그러나 밤나무는 한 그루가 모자라는 999그루였다.

  이원수는 사색이 되어 떨고 있는데, 숲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하며 크게 소리쳤다. 그 외침을 들은 중은 호랑이로 변해 도망치고 말았다. 그때의 소리친 나무를 오늘날 「너도밤나무」라고 한다.


  신사임당은 천성이 온화하고 지조가 정절하여 현모양처의 귀감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사표가 되고 있다. 율곡의 나이 16세 때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원수공은 10년 뒤인 61세에 세상을 떠나 이 자리에 두 아들 내외와 맏손자 내외, 그리고 사돈과 큰 딸 내외와 함께 누워있다. 

  율곡의 가족 묘지를 보면서 오늘날과 다른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볼 수 있다.  자식의 벼슬이 높으면 부모보다 윗 쪽에 묘를 쓰는 것은 크게 이상할 게 없으나, 맏아들의 묘를 원수공 부부의 윗 쪽에 쓴 것과 딸의 부부와 사돈의 묘까지 쓴 점이 특이하다. 그 당시의 분재기를 보면 딸에 대한 상속이 아들과 차이가 없었으니 산소에 대한 권리도 인정되었다고 생각되나, 사돈의 묘를 허용한 것은 두 사돈간에 각별히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율곡은 셋째 아들이지만 제일 윗 쪽에 쓴 점은 아들이 판서에 이르는 큰 벼슬을 하였으니 이해가 가나, 율곡의 부인 노씨의 묘가 쌍분도 아니요 합장도 아닌, 희귀한 형태로 율곡의 묘 바로 위에 있다.

  율곡은 22세(1557년 9월) 때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을 하였는데, 딸만 둘 두고 아들은 두지 못했다. 부인 노씨의 묘가 합장도 쌍분도 아닌 이유를 『경기읍지』중 파주군 조의 열녀 편에서 임진왜란 때 부인 노씨는 남편인 이이의 묘를 껴안고 있다가 왜적에게 살해당하였다” 고 그 사연을  전하고 있다.

  이 고장에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인은 여종 한 명과 함께 묘를 지켰다. 그때 왜놈들이 두 여자를 보고 겁탈하려고 덤벼들자 두 여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훗날 난리가 끝나고 이곳을 둘러보니 율곡의 묘 옆에 두 여자의 유골이 흩어져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 부인과 여종의 유골을 구분할 수 없었다. 이에 두 유골을 모아 합장도 쌍분도 아닌 형태로 율곡의 묘위에 연이어 썼다고 하는 기구한 사연이 전해져 오고 있다.

  율곡은 민족의 비극을 막기위해 10만 양병을 주장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못내 그 화가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미칠줄 어찌 알았으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는 국가안보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안고 문성문을 나왔다.


자운서원(紫雲書院)에 담긴 뜻을 새기며

 

묘소에서 내려오면 오른쪽 산기슭에 숲이 우거져 있고 360년의 년륜을 자랑하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나그네의 발길을 유혹하는 대로 찾아드니 아름다운 자운문(紫雲門)이 반갑게 맞이한다.     자운문 앞에는 숙종 9년(1683년) 율곡 선생의 덕행을 추모하는 글을 당대의 명필인 김수증(金壽增)이 예서체로 쓴 묘정비(廟庭碑)가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광해군 7년(1615년) 선생의 선영이며 선생의 묘가 있는 천현면(泉峴面) 동문리(東文里)에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지어 제향을 받드니 효종 원년(1650년)에 사액을 내렸으며 숙종 39년(1713년)에 유학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彩)를 추향하였다.

  그러나 고종 5년(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거되는 수난을 겪고 1970년 현재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자운문을 들어서니 자운서원(慈雲書院)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낙관을 살펴보니 운정(雲庭) 김종필(金鍾泌)의 글씨이다.

  서원을 나와 묘정비 윗 쪽에 있는 약수터를 찾아, 거목의 향나무 앞에 있는 샘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을 한 모금 마시니 율곡 선생을 만난 듯 시원스럽게 갈증을 씻었다.

 

  퇴계와 더불어 학자로서 최고봉에 다 달아 기호학파라는 학맥을 형성했으며, 지극한 충성과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로서 민족을 이끌어 간 최고의 지도자인 율곡을 그토록 큰 인물로 만든 것은 조선 제일의 어머니와 고결한 아버지와 이 자운서원 경내에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정성, 서민의 애환을 담은 산골 주막의 주모와 같은 백성들의 바램, 그리고 너도밤나무와 같이 이 나라의 생명 있는 자연에 이르기까지 온갖 지혜를 모아 인물을 키워온 社會와 自然이 調和를 이루어 만든 傑作이란 생각을 하면서 자운서원(紫雲書院)을 뒤로하고 귀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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