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답사기

여왕의 발자취를 찾아서

是夢 2006. 5. 24. 15:29
 

여왕의 발자취를 찾아서

 

鄭時植 회장(대구시 서구 부구청장)

 

부용대에 올라서니 천애절벽 아래 거센 황토물이 휘감아 돌고 강 건너에는 솟을 대문 기와집과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은 초가집이 한덩어리가 된 물돌이 마을이 평화스럽다. 만송정을 둘러싼 소나무의 푸르름이 이 고장 선비의 기개인양 대견스럽게 버티고 서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엊그제 내린 폭우가 백두대간의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씻어 내린 자양분이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을 타고 이곳에 이르러서 산줄기를 휘감아 돌아 태극의 꼭지점에 풍산 柳씨들이 터를 잡은 하회가 내려다보인다.  상류 쪽인 오른쪽에 겸암 유운룡이 유학에 정진한 겸암정사가, 아래쪽에는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을 저술한  옥연정사가 있다.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여 지금은 다니기 조차 어려운 벼랑길을 아침저녁으로 오가면서 문안을 했다고 한다.

  이곳 부용대를 오르지 않고 어찌 하회를 봤다고 할 수 있을까? 조감도를 보듯 한눈에 하회가 연화부수형의 풍수지리적 가치를 이해할 수 있고, 우리의 아름다운 산하와 어울려 사는 우리 선조의 지혜를 알 수 있다. 부용대를 찾는 길은 풍산 안교사거리에서 좌회전 하여 하회로 가다가 5km지점에서 지보 쪽으로 우회전해서 2km정도 가면 풍천 파출소가 나온다. 이 파출소 앞 T자 길에서 좌회전하여 낙동강에 놓인 광덕교를 지나서 제방 따라 2km쯤 가면 겸암을 모신 화천서원이 나온다. 이곳에 차를 세워놓고  먼저 옥연정사를 보고 부용대에 올랐다가 겸암정사에 들리면 하회의 아름다움과 선현의 풍류를 함께 즐길 수 있다.

  벽안의 여왕이 찾았던 하회는 이제 세계인에게 알려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평일인데도 탐방객이 줄을 잇고 있다. 고향을 지키면서 관리사무소의 일을 보고 있는 柳時柱씨를 만나 청우회의 탐방계획을 논의하고 하회의 전통 맛을 담고 있는 봉화식당의 비빔밥으로 점심 요기를 했다. 양진당과 충효당에는 종부들이 힘에 겨운 넓은 집들을 지키고 있다. 서애의 후손인 유화숙씨는 양가의 종부에게 문안 인사드리기에 바쁘다. 여왕이 생일 잔치상을 받은 유선우(탈렌트 유시원의 부친)씨 집은 가족 모두 서울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인지  대문이 굳게 잠겨 있어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마을을 한바퀴 돌아서 화숙씨 큰 집에 들려서 혼자서 고향집을 지키고 있는 오라버니를 만나보고는 병산서원으로 향했다. 하회 마을에서 상류쪽으로 3km 지점에 있는 병산서원은 차길로는 다시 풍산쪽으로 4km 정도 되돌아 나와서 오른쪽으로 다시 4km 정도 낙동강 변을 따라 막다른 곳에 병산서원이 있다. 넓직한 만대루(晩對樓)에 오르니 낙동강의 부드러운 물길을 껴안고 병풍처럼 절벽을 이룬 산의 기개가 제법 험준하다. 고목의 매화 등걸에는 옛 선현의 고결한 인격을 품은 듯 잎이 무성하여 내년에도 어김없이 꽃을 피워 조춘의 향기를 뿜어 후학들에게 전하리라. 서애를 배향한 묘우 뒷뜰에는 오래된 백일홍이 붉은 정열을 태우고 있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찾은 병산서원에 관한 글을 인용하여 소개를 한다. 

  이 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은 고려말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으나 선조 5년(1572년)에 서애가 이곳으로 옮긴 후 철종 14년(1863년)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고종 5년(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의 서원중의 하나가 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존덕사, 입교당, 신문, 전사청, 장판각, 동재, 서재, 만대루, 복례문, 고직사등이 있다. 묘우인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양식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단청이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기단 앞의 양측에는 8각 석주 위에 반원구의 돌을 얹어 놓은 대석이 있는데, 이는 자정에 제사를 지낼 때 관솔불을 켜놓는 자리라 한다. 존덕사에는 주향인 류성룡 선생과 배향인 류진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강당인 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가구는 5량이며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을 강론 장소로 사용하는 곳이다. 신문은 향사시 제관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전사청은 향사 시 제물을 장만하여 두는 곳이다. 장판각은 민도리집 계통으로 되어 있으며 책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민도리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 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된다. 문루인 만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식 건물로써 서원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건축되었으며, 향사 때에는 고지기가 개좌 또는 파좌를 아뢰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밖에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는 물길을 끌어 만든 천원지방 형태의 못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흙으로 메꾸어 없어졌다. 이 서원은 현재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류성룡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종 3,000여책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이 병산서원은 주변의 풍광도 수려한데, 앞으로는 병풍처럼 둘러선 병산(屛山)의 기암절벽 아래로 낙동강의 푸른 물이 굽이치고 모래 고운 백사장도 넓게 펼쳐져 있어 운치를 돋운다.』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의 탁류와 함께 풍산 류씨들의 자취를 뒤로하고 서후면 금계리로 향했다. 서애(1542 - 1607년)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유학자 학봉 김성일(1538 - 1593) 선생의 종택을 찾았다. 하회가 대가댁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집성촌이라면 금계리는 산과 산사이에 형성된 들을 가운데 두고 산자락에 띄엄띄엄 흩어져 동네를 형성하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잘 포장된 길 오른쪽에 학봉의 종택이 있고 왼쪽 산자락에 있는 덩실한 기와집이 어제 일족들이 모여 개잡고 잔치를 한 김시학 회원의 재실이라고 한다. 아직도 재실 문이 열려 있는 것으로 봐 남은 개장국을 끝장 보려는 일가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곧 핸들을 돌려 달려가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예정된 코스 때문에 아쉬움을 남기고는 종택으로 안내를 한다. 넓은 마당에 잔디를 심어 가꾼 정원이 농가(?)로서는 이색적이다. 낮잠을 즐기던 종손에게 인사를 하고 사랑채와 연결된 안채 마루에서 과일과 차 대접을 받았다. 마루 뒤쪽 툇마루에는 손님 접대용 상이 여러개 걸려 있는 것으로 봐 많은 손님을 친다는 것이리라. 하회의 양진당 안채에는 마루 앞 실겅에 수십개의 1인용 상을 얻어 놓아 방문객의 눈에 쉽게 띄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종택 동편에 있는 운장각에는 학봉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진주성에서 부인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는 장모에 대한 병문안까지 하는 인간적인 자상함을 볼 수 있다. 이 편지를 쓰고 며칠 후에 진주성이 함락되어 전사하였다니 생시의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 목판본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많은 장서를 간행하여 후진 양성에 힘쓴 선생의 업적을 짐작할 수 있다. 전시장이 너무 협소하여 귀중한 유품들을 모두 진열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서후면 소재지에 있는 김시학 회원의 생가와 어른이 경영하신 양조장을 지나 천등산 봉정사로 향했다. 가는 길 몫에 삼태사묘가 있다. 삼태사는 고려 태조가 견훤과 안동에서 자웅을 다투게 되었을 때 이 지역의 유력한 토호세력인 권행, 김선필, 장정필이 태조를 도와 승리함으로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잡게 된 공으로 벼슬을 받았으며, 후일 안동부사가 삼공신의 제사를 거행하였다.

  천등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조용한 도량을 벽안의 여왕이 찾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이유 중의 하나가 「절다운 절」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절은 물론이요 그렇지 못한 절도 좁고 가파른 절터와 주변 경관에 걸맞지 않게 마치 과분수처럼 들어선 웅장한 건물은 옛 맛은 온데간데없고 땅장사로 일획천금한 졸부가 돈 자랑하기 위해 지어 놓은 것 같아 절을 찾을 때마다 습스레 한 기분이지만 봉정사는 그 맛이 정갈하다.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덕이 종이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열고 봉황새가 머물렀다고 봉정사(鳳停寺)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1972년 9월 극락전을 해체하여 보수하다가 발견된 상량문인 기문장처란 한지 기록에 의하면 그 초창기의 역사는 적어도 11세기말이나 12세기 초로 추측된다. 고려 우왕 2년(1376년)에 중건된 부석사의 무량수전보다 2~30년이나 더 오래된 목조건물로 인정되고 있다. 고려 말의 건물로 알려진 대웅전,  조선 초기의고금당, 스님들의 경전을 강의하던 화엄강당 등 우리나라의 고건축물의 성지로서 건축학도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고 있다. 특히 개울 넘어 영산암은 우리나라 목조건물의 특징을 담은 도량으로서는 일품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촬영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용하던 산사도 여왕의 발걸음이 지나간 후로는 여느 절과 다름없이 사람이 붐벼 이제는 입장료까지 받고 있다. 우리의 답사계획은 연초부터 세웠으나 그 고요함은 평일에도 찾기 어려워졌으니, 옛 봉정사의 맛을 보려면 하룻밤 객사에서 머물거나 아니면 비나 눈내리는  날 정다운 님의 손을 잡고 오붓이 찾을 수밖에 없다.

  이번 사전답사를 안내한 학봉의 후손인 김시학 회원과 서애의 후예인 류화숙 부인회원이 9월 월례회 문화탐방에도 안내를 하기로 하였으니 더욱 알찬 탐방이 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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