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정에 깃든 생명이여!
정시식 회장(대구시 공무원교육원 원장)
계절의 여왕이라 일컫는 5월의 넷째 토요일, 문화유적 탐방에 나선 회원들의 가슴은 녹음이 짙은 산너머로 두둥실 떠다니는 뭉게구름만큼이나 가슴이 확트이고 시원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찾은 곳은 가슴 뭉클한 아련한 사연을 지닌 하빈면(河濱面) 묘골(竗洞, 竗里라 함).
1456년 6월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을 포함한 충신들이 피 바람 속에 숨져간지 몇 달이 지난 그 해 늦가을, 묘골의 교동현감 댁에서는 두 아이가 태어났다. 한 아이는 취금현 박팽년 대감의 손자였고 또 한 아이는 그 댁 노비의 딸이었다.
핏덩이를 가슴에 안은 박 대감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는 낳자마자 이별을, 그것도 핏덩이 아들을 망나니에게 내주어야 할 기가 차는 운명 앞에 아연해 있었다. 시할아버지 박중림과 시아버지 박팽년의 5형제, 그리고 남편 박순을 포함한 3형제를 합하여 남자 아홉명을 형장으로 보내고, 시어머니와 동서 등 집안의 여자들과 다행히 사형을 면한 사촌 시숙들은 관노비가 되어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자신은 고향인 대구의 관노비로 가게 되었다. 이런 연고로 친정댁의 아버지인 교동현감 이철근의 보호를 받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아이가 사내면 죽이고 계집이면 관노비로 보내라”는 세조의 어명이 떨어져 있어 새 생명을 보존할 길이 없었다.
이때 마침 친정댁의 노비가 같은 날 딸을 낳았다. 충성스러운 노비는 자기의 딸과 주인댁의 아들을 바꾸어 박팽년의 대를 잇게 하였으니, 주인 성주 이씨와 노비와의 인간관계가 오늘 태고정을 찾은 우리를 감동케 한다. ‘朴婢’라는 천민의 이름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이 아이는 17살이 되는 성종 3년(1472년)에 또 한번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모부 되는 이극균(후일 좌의정에 오름)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이곳에 들러 박팽년의 후손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이대로 있다가 들키면 국법을 어겼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으니 자수할 것”을 권하였다. 이극균은 성종과 친분이 두터운 친구인 정필주를 찾아가서 이 일을 의논하였다. 정필주는 성종을 알현하여 “전하께서 만약 단종과 같이 삼촌이 유배를 보낼려고 할 때 중신들은 누구 편을 들어야 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성종은 “당연히 내편을 들어야지”라고 하여 성종의 의중을 떠본 후 박팽년의 자손이 살아있음을 알리니 “당대에는 역적이지만 충신의 자손이니 당연히 살려줘야지”라고 하여 박비를 자수시켰다. 성종은 자수한 아이를 보고 무척 기뻐하면서 ‘일산(壹珊)’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내려주고 노비에서도 풀어주었다.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대를 잇게되어, 궁중의 가마와 마필을 관리하는 사복시정의 벼슬도 받았다. 그러나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형제, 아버지 형제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살아졌으며, 자신도 죽었어야 할 목숨이 살아있다는데 대한 회의가 벼슬도 버리고 선대가 살았다는 충청도 고향도 버리고 어릴 때 움막을 짓고 숨어살던 골짜기에 터를 잡았다. 기각루, 피서각, 점화루, 응방루, 장서각을 갖춘 아흔 아홉 칸의 대저택을 마련했다. 소박한 태고정(太古亭, 1479년)이라는 정자도 지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하여 그 모습은 볼 수 없으나 전쟁이 끝나자 1596년, 1614년 두 차례에 걸쳐 태고정(太古亭)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그 터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육신사를 지어 사육신을 모시고 육신비를 세워 춘추로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노비의 주인에 대한 의리와 성종의 관용이 충신의 대를 이었을 뿐만 아니라 필자의 피속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 묘동의 자연부락인 장자바우(長子岩골)가 필자의 외가이다. 이러한 내력을 소상히 안내해 주신 후손 박종철 선생은 “사당을 지어 선조를 모시게 된 것은 매우 잘 된 일이나 이 성스러운 건물을 유지 보수하는 비용이 없어 안타깝다”고 하면서 문중에서 기금을 마련하거나, 지방자치단체나 정부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제는 찾아오는 탐방객 안내에도 힘이 겹다는 선생의 쇠약해진 모습에서 문화유적의 관리와 충신의 후예에 를 TV드라마로 촬영한 주무대가 이 삼가헌이다. 아직도 후손이 살고 있어 사람의 냄새가 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별당 하엽정(荷葉亭) 앞에는 연못에 연꽃이 피어 별당 주인의 고운 인품을 전해주고 있다. 대한 우리 사회의 새로운 배려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
가지런한 흙담의 골목길을 따라 기품과 고풍이 넘치는 기와집을 품은 묘골은 사방이 산으로 가리어 포장길이 없었드라면 지나치기 십상인 산모룽이를 돌아 왜관으로 가는 큰길로 나선다. 고갯길 가에 있는 파회(坡回)마을에는 박팽년의 11대 손인 이조참판을 지낸 박성수(朴聖洙)가 영조 45년(1769년)에 건립한 삼가헌(三可軒)이 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
하빈면 하산리 하목정(霞鶩亭), 성주 월항면 인촌에 있는 세종의 왕자태실과 선석사를 묶어 반나절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탐방이었다. 더욱이 성주대교에 있는 강창식당의 메기매운탕과 장어꾸이는 낙동강의 정취와 더불어 소주 맛을 한없이 돋구었다.
※청우회지 1999년 6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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