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문화유적 탐방기 ***
팔조령 넘어 조상의 향기를 찾아
鄭 時 植(대구시 서구 부구청장)
영남문화동우회가 1년에 3 - 4회에 걸쳐 영남지방의 문화유적 답사를 하고 있는데 나는 이 좋은 답사에 매번 참석하지 못함을 늘 아쉽게 생각하면서 올해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리라 다짐하고는 을해년 3월 말일 화창한 일요일 아침 햇살을 받으며 어린이회관 앞 주차장으로 나갔다.
이 답사여행에는 가족들과 함께 참석하는 회원이 날로 늘어나서 모임의 분위기를 더욱 훈훈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번 답사에서 조상들의 문화적 향기를 아내와 함께 즐기지 못하는 아쉬움을 가지면서 다정스러운 부부들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팔조령을 넘었다.
옛날 伊西지방에는 소를 많이 먹여서 대구 큰장에 내다 팔았는데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니 소판 돈을 노리는 도둑들이 이 고개에 많이 나타나므로 이들에게 공동대처하기 위해 여덝 명이상이 모여 이 고개를 넘었다고 팔조령(八鳥嶺)이라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서지방에 소를 많이 길렀다는 것은 지금도 3월 10일부터 3일간 전국투우대회가 이곳 이서면 한내천변에서 개최하여 전국의 유명한 싸움소가 모여 들어 옛부터 청도 소싸움은 전국에 잘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부터 동래에서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는 국도의 역할을 한 팔조령은 봄이 대구분지로 넘어오는 길목이기도 하다. 팔조령 분수령에 서서 평온한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기에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피는 4월이면 보리 내음
밀 익는 5월이면 진달레 향기
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때
나는 좋대나
巴人 金東煥의 이상향인 남촌이 거기에 있다. 나는 노후의 안식처를 팔조령 이곳 남촌에 자리 잡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지가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伊西國에서 난 충절의 인물을 찾아
팔조령에서 한 폭의 그림같이 아늑한 들과 평온한 마을을 내려다보는 기회도 이제 그렇게 많이 남지 않은 것 같다. 꼬불꼬불한 길을 어슬렁어슬렁 오르내리는 낭만은 시간단축이라는 경제논리에 밀려 산허리를 통과하는 터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터널공사가 완료되면 팔조령 고개 마루를 넘어 대구분지로 힘겹게 달려오던 봄바람마저도 터널로 질러오지는 않을런지?
팔조령 자락을 지나 봄기운이 스물 스물 베어나는 기름진 들판을 가로질러 길게 뻗은 신작로 동편 구릉 끝에 자리 잡은 동네(화양읍 백곡리)가 옛 伊西國의 궁궐터로 추정된다며 이 작은 나라는 3-4세기경 신라에 합병되었다는 이명식 교수의 설명을 들으니,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맥으로 이루어진 분지와 기름진 들판의 생산이 자급할 수 있는 경제력과 외침을 막을 수 있는 천혜의 요소를 갖춘 반면 외부로 뻗어나갈 수 있는 진취적인 발전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었나 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14대 유례왕 14년(297년) 이서고국에서 금성(신라의 수도인 지금의 경주)을 공격하자 신라는 크게 군사를 모아 적을 막았으나 이들을 격파하지 못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지역의 정치집단이 한때는 강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서면 소재지를 우회하는 도로를 따라 가다가 청도 화양으로 가는 길과 풍각으로 가는 길과 만나는 T자길 직전에 놓인 자계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오른쪽으로 꺾어 상류 쪽 제방 길을 따라 500여m 정도 가면 넓은 주차장이 나오고 오른쪽에 양지바른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이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로서 조선 중종 13년(1518년)에 청도유림들이 조의제문(弔儀祭文) 사건으로 무오사화(1498년) 때 화를 입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선생이 남긴 발자취가 있는 곳이다. 탁영의 생가에 탁영 선생이 25세 때 운계정사(雲溪精舍)를 건립하여 수학하신 곳인데 무오사화 후에 서원을 건립하고 자계서원(紫溪書院)이라 했으며 현종 원년(1660년)에 임금이 현판을 내렸으며(賜額) 김해 김씨 삼현인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선생, 탁영 김일손 선생,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선생을 향사(享祠)하고 있으며 영귀루와 동서양재의 건물이 1975년에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자계서원에 배향된 절효 김극일 선생은 탁영 선생의 조부로서 효심이 지극하였으며, 절효 김대유 선생은 탁영 선생의 장조카로서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칠원(漆原,현 경상남도 칠원군)현감 재임 중 선정하시다가 향리에 은거하여 자호(自號)를 삼족당(三足堂)이라 하였다. 삼족이란 계산(溪山)이 족(足)하고 풍월(風月)이 족(足)하고 음아(吟峨)가 족(足)이라 자칭하여 산수가 아름답고, 환경이 만족스러우며, 의식이 풍족한 가운데 오래도록 살면서 아무런 부족함 없이 세상을 만족스럽게 살고 있다는 여유를 보여주는 김대유 선생의 인생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탁영 김일손 선생은 점필재 김종직의 고족제자(高足弟子)로서 성종 17년(1486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성종실록에 훈구파인 이극돈(李克敦)의 비행을 낱낱이 사초(史草)에 기록하였으며, 스승이 지은 조의제문도 사초에 올렸다. 그러나 김종직에게 원한을 품은 유자광과 김일손에게 원한을 품은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에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 삼아 연산군에게 고해바쳐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를 하였으며 김일손은 35세의 아까운 나이에 억울하게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이 사건이 이조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탁영 선생이 화를 당하신날 선생이 살았던 운계천(雲溪川)에 3일이나 붉은 물(血流)이 흘러 선생의 충절을 상징케 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운계천을 붉은 피가 흘렀다고 자계천(紫溪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서원에 들어서니 마침 오늘이 인근의 유림들이 모여 향사를 지내는 날이라 반갑게 맞이해 귀한 손님이라며 따뜻이 대접을 한다. 자계서원의 향사(享祀)는 음력 2월 중정(中丁)과 8월 중정에 모신다고 한다. 서원이 있는 서원리 마을 일대가 모두 나라에서 내린 향사지(享祀地)로서 여기서 나오는 대지사용료로서 서원의 유지관리와 향사비용으로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서원은 일반적으로 단청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자계서원은 단청을 하였다. 다른 서원에서 단청을 하지 않는 이유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며, 단청을 함으로써 목재를 벌래로부터 보호하는 등 건물의 수명이 오래가도록 할 수 있다는 자손들의 설명이다.
서원 뜨락에서 바라보이는 남산(846m)이라고 불리는 오산이 필봉처럼 우뚝 솟아 있고 그 너머로 화악산(華岳山 931.5m)이 아스라이 보인다. 화악산에서 자계서원을 내려다보면 ‘옥녀(玉女)가 거문고를 안고 있는 상’으로서 명지라고 한다. 범인의 눈으로 보아도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서 동네를 감싸 안고 있다. 앞에는 자계천이 흐르고 몇겹의 낮은 안산(安山)너머로 남산이 우뚝 솟아 있으며 그 뒤로 화악산의 정기가 뻗어나고 있다.
탁영 선생이 심었다는 500여년 된 두 그루의 웅장한 은행나무가 대구국립박물관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탁영금(선생이 즐겨 치시던 濯纓琴은 14대손 김헌수 선생이 보관하던 것으로 필자가 문화공보담당관으로 재임 시 보물 제957호로 지정되었으며 대구박물관에 위탁보관하고 있음)과 함께 선생의 충절을 지키면서 김해 김씨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명문으로서의 자긍심을 수호하고 있다.
화양의 소중한 문화유적들
서원리 앞에 있는 자계천을 건너 청도읍 쪽으로 가다가 공설운동장을 지나 오른쪽 화양읍으로 들어가면 서상동에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도주관(道州館)이 있다. 도주(道州)는 청도군의 다른 이름이다.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제법 웅장한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현종 때인 1670년경 건립된 이 객사는 정청(政廳)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어 지방 수령이 초하루 보름에 배례(排禮)하였으며, 접객시설을 갖추어 이곳을 들르는 관리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조 초기에는 관찰사가 한곳에 정청을 두어 머물지 않고 관할지역을 순회하면서 정무를 보았기 때문에 행정관청이 있는 중요지점에 이런 객사를 두었다고 한다. 화양은 청도의 행정중심지였으나 경부선이 개통된 후 교통의 요충지인 청도역이 있는 현재의 청도로 군청이 옮겨갔으나, 화양읍은 많은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이곳을 화양읍 사무실로 사용하여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으나 지금은 빈집으로 사람들이 사용을 하지 않고 있어 유령의 집처럼 훈기가 나지 않는다. 마당은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잡초와 함께 흙이 일어나 폐허를 예고하고 잠긴 문은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다. 건물 옆에는 역대 군수들의 선정비가 있으며 고종 때(1871년 4월) 대원군이 전국에 설치한 척화비(斥和碑)가 뜰 한쪽에 있다. 비문에는 “洋夷侵犯非戰和主則和賣國”이라고 새겨져 있어 대원군의 근대화를 가로막은 쇄국정책을 보면서 오늘 우리들이 처한 급변하는 국제사회에서 세계의 정상에 도전하는 거울로 삼아야겠다.
우리 일행이 도주관의 대문을 나서면서 이 건물이 오늘을 살고 있는 세대들에게 유용하게 이용할 방법은 없을까? 자라나는 세대를 위한 전통문화와 예절교육장으로 활용한다든가 공무원들의 교육장으로 이용한다면 건물도 잘 보존하면서 우리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좋은 교육장이 되지 않을까하고 나는 도로 다쳐지는 대문을 뒤돌아보면서 훈기가 나는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기를 바란다.
귀중한 문화유산의 보존은 지방행정의 몫
대형버스가 마을 가운데를 지나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민가를 벗어나니 청도읍성이 잔해를 들어내고 읍성의 동문 밖 왼쪽에 석빙고의 아치형 뼈대가 한눈에 빨려 들어온다. 평지에 돔을 만든 아치형 버팀돌이 평지에 걸려 있어 석빙고의 구조를 완전히 들어내고 있다. 지하에 잡석을 쌓아 올렸으며 화강석으로 만든 천장의 아치형 보가 네 개 걸려 있고 천장을 덮은 개석 몇 개가 보와 보 사이에 걸쳐 있다. 지붕을 덮은 흙이 무너지고 개석(蓋石:뚜껑돌)도 많이 없어졌다.
지금까지 흙으로 덮혀 있는 석빙고만 보아온 나에게 석빙고의 구조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서쪽으로 나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니 바닥은 경사지게 사각의 돌을 깔았고 가운데에 배수구가 있어 물이 가장자리의 배수로를 따라 가운데 배수구에 모여 흘러내리게 만들었다. 이 배수구는 지금도 그 기능 을 잘 발휘하고 있는지 바닥은 물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다. 바닥에서 위를 쳐다보니 육중한 화강석이 기둥도 없이 폭 4m의 공간을 받치는 아치형 보가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 석빙고를 만든 석공들의 우수한 건축술에 감탄을 하면서 한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밖으로 나와 입구 오른쪽에 있는 준공 비석을 더듬어 보니 진사 박상고(朴尙古)선생이 주관하여 건립하였고 석공 13명과 목수 등 연인원 6,074명이 동원 되었고 정철(正鐵) 1,438근이 소요되었으며, 숙종 39년(1713년) 2월 11일에 착공하여 5월 5일에 준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길이 14.7m, 폭 5m,. 깊이 4.4m인 이 석빙고는 경주 석빙고(1729년)와 창녕 석빙고(1742년)보다 앞서 건립된 것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석빙고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59년 5월 1일 보물 제323호로 지정된 화양읍 동천리의 석빙고는 석빙고의 뚜껑돌인 개석(蓋石)을 돌다리로 쓰기도 하고 일본인들이 누에의 영혼을 위로하는 잠령탑(蠶靈塔)을 만들기도 하는 등 선인들의 얼이 담긴 귀중한 문화재를 훼손한 것이 안타까웠다. 지금도 아이들이 보위를 오르내리는 놀이터가 되어 곧 무너지지나 않을까 염려하면서 보호에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애타는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향교로 향했다.
향교로 가는 길 오른쪽에 청도읍성(淸道邑城)의 성벽하부(城壁下部)가 남아있고 성안은 가정집과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초등학교가 있는 곳이 동헌자리라고 한다. 성벽의 규모는 주위 1,570보(1.88km)이고 높이는 다섯자 다섯치(1.65m)라고 청도 문헌고에 기록되어 있다.
이 성은 1590년에 시작해서 2년 만에 완공하였으나 완공하던 해에 일어난 임진난(1592년) 때 파괴되고 동, 서, 북문이 소실되어 그 후 성벽의 수축과 문루를 재건하였으나 일제 강점기 때 성벽이 헐리고 문루도 훼손되고 지금은 성벽바닥만 남아 있다. 1995년 1월 14일 기념물로 지정한 경상북도에서는 최근 이 성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경상북도 문화재위원인 이교수의 설명이다.
읍성을 지나 지척의 거리에 청도향교가 있다. 청도향교는 조선 선조 원년(1568)에 처음 건립하였으나 몇 차례 옮겨 지금의 것은 영조 10년(1734년) 군수 정흠선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지방의 교육기관으로서 교육을 담당한 명륜당(明倫堂)과 공자와 선현들의 제사를 모시는 대성전(大聖殿)이 있다. 이곳 대성전에는 설총(薛聰), 안유(安裕), 이황(李滉), 이율곡(李栗谷), 최치원(崔致遠), 이언적(李彦迪) 등 유현(儒賢) 18현을 배향하고 있다.
이 향교도 굳게 문이 잠겨 있어 관리인에게 열쇄를 빌려 관람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사용을 하지 않아 청도객사처럼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없는 단순한 건물에 불과하여 폐허처럼 공허하기만 하다. 선현을 받들어 미풍양속을 지키고 학문을 숭상하는 향교의 정신을 기릴 수 있는 청소년을 위한 수련과 전통문화를 연마하고 전통예절을 가르치는 교육장으로 활용한다면 유형문화재는 담 너머로만 보는 우리와 거리가 먼 그런 문화재가 아니라 우리의 곁에 두고 조상의 숨결을 항상 느낄 수 있는 그런 문화재가 되지 않을까?
향교를 나서니 뒤에는 우뚝 솟은 남산이 말없이 청도읍성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노란 산수유꽃은 봄의 소식을 전해준다. 이 읍성과 동헌이 복원되면 청도객사와 석빙고, 향교, 읍성이 하나의 문화 관광권으로서 외국인까지도 끌어들일 수 있는 좋은 관광자원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도 이렇게 좋은 문화자원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노력을 해야겠다.
그 지방 향토의 문화를 잘 보존하고 개발하여 자원화하는 것이 바로 지방자치시대의 행정의 몫이라고 생각된다.
문이 굳게 닫혀있는 문화 유산들
청도읍내를 빠져나와 운문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청도를 산동(山東), 산서(山西)지방으로 나누는 해발 310m의 곰티재를 넘으면서 이교수의 ‘곰티재에 얽힌 밀양박씨 과부 이야기’로 박장대소를 한 우리들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아직도 때묻지 않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구경하면서 매전면 동산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295호로 지정된 쳐진 소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소나무의 가지가 수양버들처럼 가지가 밑으로 축 처져서 유송(柳松)이라고도 불린다. 고성 이씨(李氏)의 묘소(지금도 묘소의 축대는 남아 있으나 묘의 주인공은 이장되고 없다)에 심은 도리솔의 하나라고 추정되는 이 처진 소나무는 운문사에 있는 반송(盤松 천연기념물 제180호)과 함께 청도의 명물 소나무이다. 운문사의 반송은 둥글고 넓게 퍼져있는데 반해 이 처진 소나무는 보통소나무와 같이 높이 14m에 가슴높이의 둘레가 1.96m로서 키가 크면서 수관은 가지가 옆으로 뻗지 못하고 밑으로 처져서 고립수로서는 좁은 편이다. 도로변에 있으나 지나치기 쉬운 이 유송은 소나무의 변이종이라고 볼 수 있으며 동창천의 맑은 물과 어울려 주변 경관이 아름다우므로 차를 세우고 한 번 살펴 볼만하다.
매전에서 동곡으로 가다가 삼족대(三足臺)가 보이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동창천에 걸린 남양교를 지나면 영남지방의 반촌으로 알려진 금천면의 신지리가 나온다. 양반으로 유명한 ‘섬마리 박씨’의 세거지이다. 소요당(消謠堂) 박하담(朴河談 1479 - 1560)이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은거하며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던 옛터에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黙)이 중건한 운강고택(雲岡故宅)을 찾았다. 이 고택은 순조 24년(1824년)에 중건한 영남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으로서 중요민속자료 제106호로 지정(1979년 12월 28일)되었다. 운강고택의 부속건물인 만화정은 소요당의 12세손인 박시묵 선생이 1856년경 건립하여 수학하고 강론하던 곳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6.25동란 때 동창천변의 피난민을 위로하러 이곳에 들렸다가 하룻밤 묵고 간 것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들은 건믈의 배치, 가옥의 구조, 사대부의 생활상 등 궁금증을 풀지도 못하고 대문 밖에서 돌아서고 말았다. 굳게 닫힌 대문은 영남문화동우회의 탐방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길 양쪽에 운남고택(雲南故宅), 명중고택(明重故宅), 섬암고택(剡巖故宅), 도일고택(道一故宅)이 옛 영화를 간직한 채 사람의 발길을 거부한 채 폐허가 되어가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동네를 벗어나 선암서원을 찾았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입새에 내화도자기를 굽는 공장이 일행들의 기분을 언짢게 한다. 하필이면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선생과 소요당(消遙堂) 박하담(朴河談) 선생을 모시는 서원 입구에다가 공장을 지어 선조를 욕보이게 하는지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 없다. 그뿐인가? 진입도로에는 어울리지 않는 외래수종인 히말리아 시이다를 심어 이질감을 더 보태니 어인 일인지? 우리 산야에 그렇게도 많은 소나무나 잣나무를 심어 선현들이 가졌던 송백(松柏)의 기개를 뽐내도록 할 수는 없을까?
선암서원(仙巖書院)의 문도 굳게 닫혀 있어 돌담을 돌아 소요대 높은 바위 아래로 동창천이 유유히 맴돌아가는 선암(仙巖)에 앉아 절경을 이루고 있는 봉황애(鳳凰崖)를 건너다보며 400년 전에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선비를 생각한다. 산수유꽃이 고개를 내미는 옆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천성만호(天城萬戶) 박경선(朴慶宣) 의사의 전적비에 “여기 선암에서 서편으로 바라보이는 곳이 御城山(어성산)이며 그 우편이 放鷹峰(방응봉) 좌편이 鳳凰崖(봉황애)이다. 임란 당시 이 천애절벽에서 天萬戶 朴慶宣공이 왜장을 안고 떨어져 장렬하게 전사하신 곳이다”고 새겨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적장과 함께 몸을 던진 충절을 본받으라고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다.
차를 되돌려 나오니 학일산(鶴一山)의 지맥이 동창천에 닿은 산기슭 절벽위에 정자가 고고한 모습으로 동창천 너머로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온다.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선생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던지고 향리에 내려와 은거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면서 건축한 삼족대(三足臺)라는 것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야 알았다. 중종 14년(1519년)에 건축한 것으로서 여러 차례의 수리를 하는 동안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으로 바뀌었으나 동창천의 맑은 물과 푸른 숲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시야가 확 트여 한국정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번 탐방에서 제외된 이 아름다운 정자를 다음 기회에는 반드시 들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밀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밀양 아리랑 노래비가 있는 영남루
유천(流川)을 따라 밀양으로 들어서는 강변의 소나무 숲은 봄기지게를 켜면서 우리 일행을 맞이해 준다. 교동에서 내려 향교로 들어가는 아직도 시골 내가 나는 골목길에는 14대 총선에 출마한 입후보자들의 벽보가 나붙어 있다.
‘風化樓’란 현판이 말해주듯 ‘예의의 풍이 있는 고장(風存禮義鄕)’인 밀양을 ‘선비가 많아 촉군(蜀郡)과 같다(多儒如蜀郡)’라고 할 만큼 향교의 영향이 밀양고을에 넘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고려 인종 5년(1170년) 3월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중앙에는 국자감과 동서학당을 두고 지방에는 학교를 세워 널리 경사(經史)를 가르치라는 조서가 있었으므로 밀양향교도 이때 창시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마당에서 명륜당 뜨락으로 오르는 돌계단 양쪽에 심은 동백꽃은 꿀도 없고 정열도 없는 일본종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겨울에도 윤기가 흐르는 푸르름을 간직한 정열적인 매력을 가진 우리의 동백은 어디로 가고 천여년 동안 한민족의 얼을 지켜온 이곳 향교에 일본 동백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음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심은 자의 의도이던 아니던 간에 명륜당을 오르내리는 모든 사람의 옷깃을 tm치는 이 자리에는 꼭 우리의 꽃 동백을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영남루로 발길을 돌렸다.
가파른 돌계단을 밟고 웅장한 영남루에 오르니 밀양강 너머로 넓게 트인 시야가 영남제일의 누(樓)라고 자랑할 만 하다.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의 팔작지붕 2층의 누각은 넓은 마루와 튼튼한 기둥과 대들보가 시원스럽게 조화를 이루어 시인 묵객의 발길을 불러 들일만 하다.
‘嶺南樓’라 쓴 현판은 ‘李玄石七歲書’(이현석칠세서)라 낙관이 되어 있고, ‘嶺南第一樓’라 쓴 현판에는 ‘癸卯初夏李憎石十一歲書’(계묘초하이증석십일세서)라고 낙관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린 나이의 형제가 자신의 키만큼이나 큰 글씨를 명필로 남겼다. 이는 이인재(李寅在)부사의 아들 형제라 하며 글씨가 사실이라면 불가사의한 필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경상관찰사인 장승원(張承遠 : 장택상 전국무총리의 부친)의 시도 한수 걸려 있다.
세종고등학교의 여학생 봉사단원들이 쓸고 딱은 보물 147호의 마루는 누워서 낮잠이라도 한숨지으면 하는 유혹을 느끼게 한다.
누각에서 아랑각으로 내려오는 길 몫에 밀양아리랑 노래비가 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우리들이 어린 시절부터 귀담아 들어온 ‘밀양 아리랑’의 고장에 광복 50주년에 맞추어 로타리 클럽에서 건립하여 지금도 우리네 여인들의 가슴을 태우는 님을 향한 수줍음이 담긴 애틋한 사랑을 기리고 있다.
계모의 간계로 괴한 주기(朱旗)에게 정절을 강요당한 밀양부사의 딸 동옥(東玉, 일명 아랑)은 이를 거절하자 괴한은 동옥을 칼로 찔러 대숲에 던져버리니 그후 밀양부사로 부임해 오는 사람마다 원한을 갚아 달라는 동옥의 원귀에 놀라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상사(李上舍)라는 사람이 밀양부사를 자원 부임하여 동옥의 원한을 갚아 주었다고 한다. 동옥의 순결을 후세 여성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영남루 밑 대밭에 사당을 세워 그 넋을 위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랑각이다. 아랑의 초상화는 이당 김은호가 그렸으며 貞節門은 소전 손재형이, 阿랑閣은 夏星坡가 글을 섰다.
거유(巨儒)와 고승(高僧)의 탄생지을 찾아서
아랑각에 얽힌 슬픈 사연을 생가하며 밀양강을 거슬러 강변의 어느 식당에서 곰탕으로 늦은 점심을 맛있게 먹고는 밀양 시가지를 벗어나 부곡, 창령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기름진 들판을 달리다보면 왼쪽에 예림서원으로 들어가는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이 작아서인지 우리 일행은 지나쳐서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 다시 되돌아와 잘 다듬어진 후사포리로 들어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초등학교를 지나니 포도밭이 우리들을 안내한다. 후사포리 동사무소 앞에서 행상용 화물차에 가로막혀 지체하는 동안 잠시 내려 봄의 내음을 맡으면서 동사무소 앞에 있는 은행나무의 오랜 연륜을 헤아려보니 500년은 넘은 듯 하다.
조선 성종조(1460년대)의 영남 유림의 대표이며 영의정을 지낸 점필제 김종직(金宗直)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예림서원은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의 마을 끝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제자인 박한주(朴漢柱), 신수성(申秀誠)을 함께 배향하였으며 현종 10년에 예림서원(禮林書院)으로 사액(賜額)을 받았다. 따스한 봄빛이 조선조의 지도이념인 유학을 대성시킨 점필제의 높은 학문세계를 숭모하는 오늘 이 자리를 찾은 후학들의 가슴에까지 내려 쬐이고 있다.
독서루에 걸린 현판이 영남의 서예가인 배길기(裵吉基) 선생의 글씨란 것을 보고는 발길을 돌려 창녕가도로 나왔다. 다시 창녕 쪽으로 가면 선생이 탄생한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堤大里) 가운데로 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도로의 남쪽에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도 이 마을에 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제대리를 지나쳐 버려, 후일을 약속하면서 선산이 고향인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난 연유를 알아봤다.
이곳 제대리는 선생의 외가이니, 선생의 부친이요 스승이신 강호(江湖) 김숙자의 처가 곳이다. 세종 때 대마도 정벌군의 부사령관으로 출전하였다가 전사한 박홍신의 외동딸에게 장가를 든 부친이 이곳에 터를 잡게 되었으며 점필제는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외조부인 박홍신(김숙자의 장인)은 타국에서 전사를 하여 그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의복을 그 부인 옆에 묻어 묘사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강호(江湖 : 김숙자의 호) 선생의 후손인 일선 김씨가 지내고 있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후손들은 합천 야로로 피난을 하였다가 장손은 거창으로 가 터를 잡았으며, 점필제의 후손은 고령 쌍림 가곡리(개애실)에서 터를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있는 표충비(表忠碑)를 찾았다. 일반적으로 표충비는 밀양 재약산 표충사(表忠寺)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도 표충비각 앞에 서고서야 표충비가 표충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임진왜란 때 승군을 지휘한 사명당(泗溟堂) 송운대사(松雲大師) 유정(惟政)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영조 18년(1742년)에 그의 탄생지에 세운 것이란 것을 알았다. 이 비는 영조 14년(1738년)에 송운의 5대법손(五代法孫)인 태허당(太虛堂) 남붕(南鵬)이 표충사(表忠祠)의영당(影堂) 건립과 함께 추진한 사업으로 당대의 명유들을 찾아다니며 비문과 글씨를 빌었으나 같은 승가(僧家)인 해인사측의 반대에 부딪쳐 많은 장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송운의 시적(示寂) 사찰에 영당과 석장비(石藏碑)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 때문이었으나 온 고을의 관민은 물론 유림(儒林)과 불교계가 단합하여 반대를 물리치고 성사 하였다. 이 표충비는 국난이 있을 때마다 비신에서 땀을 흘려 국난을 예고했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포교당 승려들이 근세 100년 동안 관찰한 기록을 보면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7일전, 1910년 경술국치일 17일전, 1945년 조국광복 14일전, 1950년 6․25동란 발생 23일전 등 여러 차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사명당의 나라를 사랑하는 지극한 충성심이 국가의 위기를 미리 예고하여 방비를 하도록 후손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교훈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주에서 구득한 새까만 대리석인 비신은 높이 2.7m, 폭이 96cm, 두께 54.5cm이며 비 전체의 높이는 4m나 되는 대단히 큰 비석으로서 비각은 증축을 한 흔적이 보인다.
마당에는 조선향나무의 조경이 돋보인다. 약 2m의 높이에서 가지를 수평으로 원형을 잡아 유인한 가지의 수관 폭이 약 10m를 넘는 멋진 조형미를 갖추었다. 250년이 넘는 세월과 사람의 정성이 만들어낸 걸작품이다.
답사여행을 마무리 하면서
매년 5월이면 밀양시민들은 대축제인 ‘밀양 아랑제’를 개최하는데 그 역사가 오래 되어 올 해로서 39회를 맞이하고 있다. 밀양 아랑제는 사명대사의 구국이념인 충의정신을 기리고, 점필제 선생의 학문을 숭상하는 지덕정신, 동옥 아랑낭자의 정절을 기리는 정순정신의 3대 정신을 이어받아 전통문화의 얼을 발전 계승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듯이, 밀양은 거유(巨儒)와 고승(高僧) 그리고 우리 여인들의 정절을 소중히 여기는 순결을 함께 가진 충절의 고장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화왕산 서남록에 자리 잡고 있는 관룡사 마당에서 멀리 용선대에 앉아 계시는 석가여래좌상에 합장을 하고는 바쁜 걸음으로 석장승과 인사를 나누고 귀가 길에 올랐다. 창녕 시가지를 지나 4차선으로 확장한 구마고속도로에 버스를 얹으니 예상되었던 체증도 없이 예정된 시간에 대구에 돌아왔다.
하루 코스로서 대구 인근에 이렇게 훌륭한 문화재와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영남문화동우회의 문화유적 답사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계획을 하고 안내를 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면서 다음의 탐방를 기다린다.
사진1 : 향사를 지내기 위해 모인 인근의 유림들과 함께 영남문화동우회 회원 들이 단청으로 말끔하게 단장을 한 자계서원 앞에서
사진2 : 한민족의 얼을 지켜온 밀양향교의 명륜당을 오르는 뜨락 돌계단 양옆 에는 꿀도 없고 정열도 없는 일본 동백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사진3 : 국난이 있을 때마다 비신에서 땀을 흘려 국난을 예고하여 방비를 하도 록 후손들에게 경각심을 준 사명당의 나라를 사랑하는 지극한 충성심 이 깃들어 있는 표충비각.
* “중악 제6호(1996년)”에 발표.
'***송연 글*** > 답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남지방의 문화유적을 돌아보고 (0) | 2006.05.24 |
---|---|
민족문화의 큰 뿌리를 찾아서 (0) | 2006.05.24 |
지리산 자락의 고결한 선비를 찾아서 (0) | 2006.05.24 |
태고정에 깃든 생명이여! (0) | 2006.05.24 |
우리 것의 소중함을 (0) | 2006.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