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의 큰 뿌리를 찾아서
--- 한국 최고의 반촌 하회 답사기 ---
어떤 교육이나, 강의실에서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를 듣는 것보다는 현장을 보면서 직접 체험하는 현장학습이 교육의 성과가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기억력이 쇠퇴해 가는 「고위산업전략과정」에 있는 50대를 주축으로 구성된 우리들에게는 야외 세미나가 흥미를 돋구어 학습의 효과를 높일 뿐만 아니라 원생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화합의계기가 되어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안동지방의 문화유적 답사는 2기생의 입학을 환영하는 행사를 곁들였기에 큰 기대를 하고, 나라가 열린 지 사천삼백스물여덟 번째의 개천절을 경축하는 태극기의 물결을 헤치고 성서 캠퍼스에 도착하니 먼저 나온 원장을 비롯한 원생들이 따뜻이 맞아준다.
예정시간보다 20분 늦은 9시 20분에 출발하여 성서 인터체인지로 진입, 금호JC를 경유하여 중앙고속도로에 들어가니 맑은 가을 하늘을 즐기려는 행락객과 화물차량이 질주를 하고 있다. 구미에서 통학을 하는 열성파 김석원 사장과 가산 인터체인지에서 합류하여 목적지로 향했다.
李重雨 원장님은 미리 준비한 답사지에 대한 자료를 나누어주시고는 상세한 설명을 하여 원생들에게 예비지식을 줌과 동시에 답사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학습의 효과를 극대화 시켰다.
중앙고속도로를 빠져나가 풍산에서 매곡교로 들어가기 직전 예천 지보로 가는 왼쪽으로 접어드니 하회까지 8km의 이정표가 나온다. 넓은 풍산들에는 잘 익은 벼가 황금물결을 이루면서 풍년을 기약하고 있다. 하회가 영남지방의 대표적인 문벌로 성장 하는 대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넓고 기름진 평야의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길지 하회(河回)마을
지보로 가는 도로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 들어 포장 된 길을 꼬불꼬불 찾아드니 예전과는 달리 길 양편에 제법 규모를 갖춘 큰 식당이 있고 박물관도 건립되어 민속마을로서의 모양을 갖추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관리사무실에서 내보내는 안내방송이 입구에서 입장하는 사람들에게만 들리도록 품위를 지키는 것도 많이 세련되어 간다는 생각이 든다.
휴일을 이용한 관람객들이 줄을 잇고 있으나 여니 관광지와는 달리 귀중한 문화재를 대하는 진지함이 엿보이는 것은 조상의 향기를 찾는 탐방객의 수준과 더불어 민족의 문화를 이끌어 온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 경애심과 이 마을이 갖고 있는 범접하기 어려운 문화적 품격의 어우러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회마을은 안동군 풍천면에 있는 풍산(豊山) 류씨(柳氏)의 동족부락으로 입향조인 전서공(典書公) 류종혜(柳從惠)공이 고려 말에 풍산에서 이곳으로 이거 하였다. 이 마을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향언(鄕諺)으로서 “許氏 터전에 安氏 문전에 柳氏 배판(杯盤)”이라는 말이 있다. 이곳 하회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김해 許氏가 터를 딱아 놓으니 그 위에다가 광주 安氏가 들어와 집을 짓고 문중을 이루었으며 풍산 柳氏는 잔치 상을 벌이고 흥청거릴 정도로 가문이 번성했다는 뜻이다.
풍산 柳氏가 하회에 입향 하여 정착하는 과정에서 입향 시조가 선주민들의 저항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대단하였다. 전서공의 할아버지인 고려의 도염서령(都染署令)이라는 벼슬자리에 있던 류난옥(柳蘭玉)이 하회에 세거지를 마련하고자 풍수에 밝은 지사를 찾아가서 택지를 구한즉 지사는 3대 동안 적선을 한 뒤라야 훌륭한 길지를 구할 수 있다고 하여, 류서령은 하회마을 밖 큰길가에 관가정(觀稼亭)이라는 집을 짓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적선을 베풀었다. 이 일을 그의 아들과 손자인 전서공까지 3대에 걸쳐 적선의 공덕을 한 뒤에야 하회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전서공이 화천(花川)의 하안(河岸)에 터를 잡고 숲을 베어 재목으로 삼아 집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완성이 채 못 되어 거듭 무너지자, 어느 날 지나가든 도사가 “아직 이 땅을 가질 운세가 아니니, 꼭 이 땅을 갖고 싶다면 앞으로 3년간 덕을 쌓고 적선을 해야 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가난한 살림의 柳氏는 재물로서는 적선을 할 수가 없어 문경 새재 길 몫에 자리를 잡고(장소에 대해서는 동내 앞 큰길이라는 이설이 있음) 3년에 걸쳐 오르내리는 길손에게 짚신을 만들어 적선을 한 후, 돌아와 주춧돌을 놓고는 하회의 주인공이 되는 기틀을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李重雨 원장이 들려준다.
3대에 걸쳐 적선을 하고도 모자라 다시 3년간의 공덕을 쌓는 지극한 정성을 들여서야 입향을 하는 인내심을 보여주고 있다. “좋은 명당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은 그 명당과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덕을 쌓고 남을 위해 끈기 있게 적선(積善))을 해야만 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하회는 오랜 세월을 두고 許氏, 安氏, 柳氏의 각 씨족집단이 교체해 가면서 취거해 온 전형적인 동성촌락이다. 풍산 류씨의 7세손인 종혜공이 입향한 후, 특히 임진왜란시의 영의정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과 유학자인 그의 형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이후에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독립왕국과 같은 지위를 유지해 오면서, 한국역사의 큰 줄기를 그대로 하회마을의 독특한 문화에 담아 오늘까지 보전해 오고 있다. 즉 불교이전의 기층문화인 「무속(巫俗)」과 여대(麗代)의 「불교문화(佛敎文化)」와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가치문화인 「사족문화(士族文化)」가 혼합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흔적이 마을의 중심부에는 큰 기와집들이 즐비하며, 초가집들도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마을에는 하회 별신굿 탈놀이와 선유(船遊) 줄불놀이 등의 행사가 전승되고 있으며, 국보인 하회탈과 징비록,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양진당, 충효당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하회마을의 지형은 해발 90m의 낙동강이 휘감아 도는 강섶에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집촌(集村)으로서 옛부터 태극형(太極形)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으로 영남의 길지로 손꼽힌다. 강 건너 남쪽 대안에는 영양 일월산 지맥인 남산(南山)이 있고, 마을 뒤편(東便)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花山, 해발 271m)이 마을 중심부까지 완만히 내려와 있어 교통이나 교역으로 보아 고립지대이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 하나뿐이며, 주머니처럼 둘러싸고 있는 강을 건너지 않고는 들어온 길로 다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지리적 고립이 이 마을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경상북도에서는 1,599,622평의 하회마을 전체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1984년 1월 10일)하여 문화재로 관리하고 있다.
서울가서야 비로소 대접받은 하회탈
따스한 가을 햇볕을 받으면서 동내 어구에서 마을조감도와 마을의 내력을 설명하는 안내판을 읽고는 동내로 들어서니 하회탈을 파는 가게가 첫눈에 들어온다. 하회탈은 이 마을의 마을 굿에서 탈놀이에 쓰이던 탈로서 제작자와 제작연대는 미상이나 신의 현몽으로 허도령(許道令)이 만들었다는 전설과 풍산 柳氏의 입향과 관련하여 볼 때 제작 년대를 고려중기로 볼 수 있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탈로 주목받고 있다.
국보 제121호(1964. 3. 30)로 지정된 하회탈은 양반, 선비, 중, 초랭이, 이매(턱이 원래 없슴), 백정, 할미, 부네, 각시, 주지1, 주지2 등 11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신분을 잘 나타내는 얼굴의 형상이 퍽이나 해학적이다. 진품은 현재 중앙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여 판매하고 있는 하회탈은 크기가 다양하여 실내 장식용이나 외국인에게 주는 선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하회탈을 만들었다는 허도령에 대한 전설 한 토막을 소개하면
허도령은 꿈에 서낭신의 계시를 받고 탈을 만들기 시작했다. 탈을 만드는 곳에는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줄을 치고 매일 목욕재계하며 지극 정성으로 탈을 만들었다.
그런데 허도령을 사모하는 김씨 처녀가 사모하는 마음을 참지 못해 허도령의 얼굴이나마 보고 싶어,
금줄을 넘어 탈막 안을 엿보았다. 입신의 경지에서 탈을 깎고 있던 허도령은 그만 피를 토하고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으로
깎고 있던 「이매탈」은 제대로 마무리 할 수 없어서 턱이 없는 탈이 되고 말았다. 허도령이 죽자 처녀도 따라 죽었다. 마을에서는 김씨 처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화산의 상단에 서낭신으로 모시고, 허도령의 영혼은 큰 고개 성황당에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
탄생의 과정에서 이런 슬픈 사연의 전설을 지닌 하회탈이 충효당의 창고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나 1960년대 초반에 “밤에 몰래 서울서 가져가 버렸다”는 진정이 이선근 당시 문화재위원장(영남대 총장)에게 들어왔다는 것으로 보아(향토역사연구회 회장 김택규 박사 증언) 정당한 절차에 의해서 하회마을을 떠나지 않은 것으로 보여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하회탈」로서는 고향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서울에 가서야 비로소 국보로 지정받고, 중앙박물관에 새로운 좋은 집을 마련하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니 다행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아흔아홉 칸의 북촌 댁과 토담집들
탈의 상념에서 벗어나 마을로 들어서니 상당한 지위의 양반이 거쳐하였다고 생각되는 기와집에는 관람객들이 모여들어 가옥의 구조를 구경하면서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하기도 하고, 거기서 파는 토속적인 지짐 붙이에 민속주를 한잔씩 하면서 마치 그 집 주인공의 회갑 잔치에 초대된 손님인양 흥을 돋우고 있다.
마을을 동서로 관통하는 주 통로를 따라 가다가 오른쪽 골목 안에 솟을 대문이 눈길을 끈다. 하회마을에서는 제일 우람하다고 보여 지는 대문 앞에 안내판이 있다. 민속자료 84호로 지정된 「북촌댁(北村宅)」에 관한 설명문이다.
양진당과 더불어 북촌을 대표하는 이 집은 경상도 도사를 지낸 유도성이 철종 13년(1862년)에 창건한 것으로 안채, 사랑채, 대문간 채, 별당 채, 사당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양반 주택이다.
대문간 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중앙에 솟을대문을 두었으며, 몸채와 대문 칸과는 축을 달리하고 있다. 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앞뒤로 놓여 있으나 하나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이룬다.
사랑채는 납도리에 홑처마로 비교적 장식이 없는 편이다. 안채는 대청 정면에 두리기둥과 굴도리를 쓰고 소로로 수장하는 등 장식을 하였고 집도 전체적으로 높게 지어 특이한 구조를 보여준다.
사랑마당 오른편에 배치된 별당은 독립된 형태의 것으로 굴도리에 소로로 수장하고 외부는 두리기둥을 쓰는 등 매우 장식적인 건물이다. 집의 간살이로 보아 주로 접객용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당은 홑치마에 박공지붕으로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본채가 불타버린 남촌 댁과 함께 북촌 댁은 하회의 남촌과 북촌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동향으로 서 있는 솟을대문은 이 마을에서 가장 우뚝 솟은 규모가 웅장한 대문이다. 대문을 들어서니 사랑채 전면에는 「北村幽居」(북촌유거)라는 해서체의 현판이 당당하게 위세를 자랑하고 있다. 「北村宅」의 당호가 이 현판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안마당으로 들어서니 안채를 바치고 있는 아름드리 둥근 기둥과 대들보가 일반인의 집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보아 당시의 이 집 주인공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케 한다. 안채와 사랑채는 버선발로도 왕래가 가능하도록 연결되어 있어 부부간의 정분이 두터웠으리란 짐작이 간다. 사랑마당에 있는 별당 채는 남향건물로서 마루와 방을 여럿 둔 것으로 보아 많은 손님이 이 집을 찾았음을 알 수 있어 인심도 매우 후하였으리라. 별당에서 바라본 몸체의 부드럽게 흘러내린 지붕선의 아름다움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
아름다운 몸체의 지붕을 배경으로 하여 기념사진을 촬영하고는 돌아서 나오면서 보니 대문채에는 다섯 개나 되는 광만 있어, 몸채에 딸린 광까지 합치면 여덟 칸이나 되어 다른 집에 비하면 광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집의 규모가 아흔 아홉 칸이나 되었다는 것과 광의 비중으로 보아 북촌 댁의 경제력이 대단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이 거처하지 않아 훈기를 잃어버린 북촌 댁의 대문을 나서니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은 토담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촌 댁에서 만송정 가까이 까지 배치되어 있는 초가토담집들은 소작인이나 부리는 사람들인 북촌 댁에 딸린 아랫사람들이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하회마을의 초가는 경제적, 사회적 지체를 자랑하는 집 근처에 동심원을 그리며 몰려 있음을 볼 수 있다.
대종택 양진당(養眞堂)과 거미줄 같은 토담길
사람들이 흐르는 방향으로 토담길을 따라 가니 오른쪽에 정남향으로 자리를 잡은 양진당이 대택다운 위치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좌우로 행랑채를 거느린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엄청나게 큰 글씨로 쓴「立巖古宅」이란 현판이 압도한다. 대종택을 상징하는 이 현판의 글씨는 진사 최동진(崔東鎭)의 작품이라고 한다. 입암(立巖)은 정주목사,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겸암과 서애의 부친으로서 58세에 사망했다고 한다.
퇴계선생이 도산에 서당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 배움을 청하여 대 유학자가 된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의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선조조의 명신이자 퇴계의 학통을 이은 서애 유성룡이 태어난 곳에 내가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사랑채의 대청을 오르려니 다섯 단의 높은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종택의 사랑채가 지닌 품격을 그 높이와 대청의 규모를 통해서 고스란히 발휘하고 있다. 이 사랑채는 입향시조인 전서공이 처음 지은 건물로서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모방한 것으로서 실용성보다는 종택의 권위를 중요시한 1600년대의 건축물로 추정하고 있다.
대청에는 해동 제일의 명필인 한석봉(韓石峯)공이 쓴「養眞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양진당은 겸암의 6대손인 류영(柳泳)의 호로서 종가의 당호로 삼았던 것이다. 유영은 유실된 겸암의 유고를 모아 문집을 간행했으며, 풍산 류씨 족보를 처음으로 편찬했다. 겸암정을 복원하고 종택과 선산의 재실을 보수하는 등 가문을 위한 업적이 많아 종택의 당호를 立巖이라 하지 않고 養眞堂이라 하였나 보다.
사랑채와 붙어 있는 안채는 ㅁ자형으로 현재 종부가 살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양진당은 현재 보물 제30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거미줄 같은 방사선의 토담길을 따라 동서남북으로 두루 향하고 있는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하회마을이 다리미나 삿갓을 엎어 놓은 것처럼 가운데가 볼록하고 사방이 차츰차츰 낮아지기 때문에 지형 따라 앞을 내다 볼 수 있도록 집을 배치하다 보니 집의 방향도 마을의 중심부에서 바깥을 향해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있으며 길도 집과 집을 잇도록 거미줄 처럼 방사선으로 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하회의 집과 집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담장의 특징은 돌담이 귀하고 토담이 주를 이루고 있다. 토담이 많은 이유는 첫째 하회는 강변에 위치하므로 돌이 없다. 둘째는 행주형(行舟形)이자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는 풍수지리설 탓이다. 배에 돌을 실으면 배가 가라앉고, 물 위에 뜬 연꽃에 돌를 쌓으면 연꽃이 상하기 때문에 돌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하회에 우물을 파지 않고 화천의 물을 길어다 먹듯이, 돌담을 쌓지 않고 흙담을 쌓는 까닭이라고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흙으로 쌓은 토담의 유연한 흐름과 누런 흙으로 이루어진 황토빛 색깔의 조화가 이 마을의 토속적인 인상을 더욱 물씬하게 풍긴다.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서애의 종택 충효당과 영모각
양진당 솟을대문을 나와 바깥마당을 지나 길 건너 충효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겸암과 서애 형제분이 이웃하여 살면서 우의를 돈독히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양진당이 정남향으로 자리를 잡은데 비해 충효당은 앞에 보이는 화천과 원지산의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서애가 생존하여 살던 당시의 집은 소박하고 단출한 초가였으나, 충효당(忠孝堂)은 서애의 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공이 창건하고 이후 증손인 눌재(訥齋) 류의하(柳宜河)가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대문채 앞에 있는 바깥마당에서 一자로 늘어 선 열두칸의 행랑채를 거느린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사랑채의 대청 정면에 미수(眉搜) 허목(許穆)이 쓴 「忠孝堂 」이라는 전서체(篆書體)의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안마당으로 열린 대청문을 통하여 사진작가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처녀들의 천진스런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사랑채에 가린 안채는 다른 종가들과 같이 ㅁ자형의 집이나 부엌위의 다락방이 유난히 커 보인다. 부엌에서 불을 집히고 있는 나이 많은 아낙네의 부지런한 손놀림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많은 관광객의 출입이 없으면 너무나 쓸쓸한, 옛 영화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보여 내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느낌이 든다. 지금은 서애의 14대 종손인 유영하씨가 충효당을 지키며 종가의 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대문간 채에는 위병실과 두 칸의 마구간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것은 서애의 8대손인 류상조(柳相祚)가 병조판서를 제수 받고 군사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기 때문이란다.
안채 남쪽 뜰에는 서애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영모각(永慕閣)이 있다.
지금의 영모각은 1975년도에 건립한 것이다. 이 영모각이 있기 전에 있었던 숨은 이야기를 김택규 박사의 증언을 토대로 남기고자 한다. 1958년부터 하회마을에 대한 관심을 가진 김교수는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마을연구에 착수하였다. 연구과정에서 충효당을 비롯한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을 보고 유물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관심 있는 지역인사들과 협의하여 유물관 건립에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그 결과 건축설계의 대가인 김인호 교수가 우리나라 전통적인 건축양식인 맞배집의 처마선을 지붕선으로 한 건축설계를 무료로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건축비(1백 2만원이라고 기억)중 당시 도백이었던 김인(金仁) 지사가 도비에서 반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마을에서 현지의 자재와 노력부담으로 건립키로 약조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유물관의 위치는 동사무소 앞 공지에 건립하여 하회마을의 모든 유물을 전시토록 권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65년도에 지어진 집은 충효당 안에 김인호 교수의 설계와는 무관하게 초라한 집이 되어버렸다. 그 후 당시 문화재위원회 김상기 위원장(서울대학교 역사학 교수)이 현장을 방문한 기회에 유물관을 보고는 격에 맞지 않는 너무나 초라한 집이라면서 박대통령에게 재건축을 건의하여 지금의 영모각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김인호 교수의 설계가 유물관으로서는 하회마을과 어울리는 걸작이었다고 하면서 그 설계도면이 빛을 보지도 못하고 그마저 분실되었다고 김택규 교수는 안타까워하고 있다.
영모각에는 서애 류성룡 선생과 관계된 유물들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이 유물은 선생이 직접 집필한 징비록을 비롯한 문적과 선생이 사용하던 유품, 조정에서 내린 각종 문서와 모부인(母夫人)의 분재기(分財記)로 대별할 수 있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징비록(懲毖錄)」은 선생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한가롭게 거쳐할 때 전란 중의 득실을 필사본으로 남긴 임진왜란 7년간(1592년 - 1598년)의 전쟁수기(戰爭手記)로서 임진왜란 전후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고 있다.
보물 제160호로 지정된 류성룡종손가문적(柳成龍宗孫家文籍)은 징비록 외에도 선생이 자필로 기록한 임진왜란 관련 문건과 수집한 각종 사료로 종손가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자료를 일괄 지정한 것으로 임진왜란 연구의 귀중한 사료이며 원본은 영모각 금고에 보관되어 있고 별본이 일반에게 공개 전시하고 있다.
보물 제460호로 지정된 류성룡종손가유물(柳成龍宗孫家遺物) 14종 18점은 선생이 직접 사용하시던 갑주(甲冑)와 가죽신, 상아홀, 갓끈, 각종 관자, 유서통, 동국지도서애선생수택본(東國地圖西厓先生手澤本) 등은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을 추측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유물이다. 그리고 선조와 왕세자인 광해군, 정조의 치제문(致祭文)은 선생이 국가에 기여했던 위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한석봉의 글이라고 전해져 오는 해서(楷書)로 쓴 광국공신록권(光國功臣錄券)을 비롯한 공신록권(功臣錄券), 교지(敎旨), 제문(祭文) 등이 이 전시관의 무게를 더해 주고 있다.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西厓先生母夫人昆文記)는 겸암과 서애의 어머니인 정경부인이 자손들에게 재산상속을 기록한 분재기(分財記)로서 조선 중기의 상속 제도를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곤문기는 김택규 교수가 하회마을을 조사할 때 충효당의 서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꾸겨진 한지(韓紙)에 행서(行書)로 쓴 길고 큰 두루마리(362cm×67.2cm)를 발견하여 뒤적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종손이 집에 가지고 가서 보라면서 선물로 주는 것을 집에 가지고 와 살펴본 결과 정경부인의 재산상속문서라는 매우 귀중한 자료임을 알고 깨끗하게 배접을 하고, 서경보 선생(서예가, 당시 영대 교수)이 발문을 써 종가에 되돌려주어 지금 영모각에 전시되고 있다.
강 건너 부용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충효당 사랑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면서 영모각에서 하회탈을 볼 수 없다는 서운함을 간직한 채, 동네를 빠져나와 화천이라 불리는 낙동강 둑에 올라섰다. 강 건너 원지산 아래에 있는 상봉정(翔鳳亭)이 보인다. 물길따라 발을 옮기니 대구에서 온 사진작가들과 조우를 하였다. 그 중에는 아는 사람도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휴일 하루를 우리나라 최고의 반촌에서 문화적 사색을 함께 할 기회를 공유한 것만으로도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제법 규모가 큰 초가집들도 민박이나 민속음식을 파는 간판들이 나붙어 있어 민속마을로서의 품위를 많이 떨어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마을 주민들도 년 간 40여만 명이 몰려드는 관람객들로부터 받는 안락한 생활권을 침해당한 보상책으로 그들을 상대로 뭔가 수입이 되는 일을 하는 것까지 막을 수야 없겠지만----
수백 년이나 된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한 만송정 너머 강 건너에는 수려한 부용대(芙蓉臺)가 있고, 부용대 서쪽 강물이 크게 감돌아 굽이치는 절벽위에 남향으로 자리 잡은 겸암정사(謙菴精舍)에는 후진양성을 위해 노력한 겸암의 고고한 인격의 유학자다운 훈장의 흔적이 서려 있으며, 부용대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는 옥연정사(玉淵精舍)에는 징비록을 집필하는 서애의 우국충정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강 건너 부용대에 올라야 물돌이동(河回)의 절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하는데, 30여년간 나룻배를 저어 강을 건너 주던 뱃사공 권득수씨는 새 길이 나고 학교가 없어지면서 이용객도 줄어 든데다가 칠순이 넘은 나이에 힘에 부쳐 노를 던져버리고 배를 백사장에 세워 둔 채 흰 머리카락만 날리고 있으니 부용대에 오르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수년전 박물관대학 재학 중 실시한 첫 번째의 준비 없는 답사에 비해 두 번째의 탐방이라 할 수 있는 이번 하회 나들이에서는 그래도 차분히 생각하면서 자료를 검토할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이 되어 「하회에서 느낀 소감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던지고, 그 답을 나름대로 자료를 조사하고 글을 쓰면서 정리해 보았다.
하회는 ‘물돌이동’이라 불리는 산과 물과 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자연」과 충신․효제의 모범을 보이며 성리학의 한 줄기 맥을 이은 겸암이나 서애와 같은 선비들로 이어지는 「사람」과 유교문화의 전통이 빚어낸 양반, 선비들의 동성 반촌, 그리고 지금까지 전승해 오는 민중들의 하회탈과 하회탈춤, 별신굿놀이와 전형적인 한옥들을 본래의 모습으로 잘 보존해 내려온 「전통문화」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한국 최고의 반촌이라는 결론을 내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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