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답사기

해남지방의 문화유적을 돌아보고

是夢 2006. 5. 24. 16:02
 

           해남지방의 문화유적을 돌아보고

                                                                                                               鄭時植 회원


청우회 4월 월례회의 여행지를 전남의 해남지방으로 결정하고는 회원들에게 즐겁고 보람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사전 답사를 하기로 하고 배칠근 회장과 함께 떠났다.

  20여년전에 대흥사를 가본적은 있으나 문화유적에 관심을 두지 않은 부부간의 가벼운 여행으로 즐겼기에 안내자로서의 자신이 없어서 ‘조국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아는 경북관광’의 金사장과 동행하기로 하고 귀한 時間을 얻어냈다.

  4월 6일 오후2시 성당동에서 출발하여 88고속도로를 타고 비안IC에서 내려 해남 대흥사에 도착한 시간은 6시 30분, 그랜져V6의 우수한 성능과 배회장의 노련한 운전솜씨에 유머감각이 풍부한 金사장의 안내가 잘 조화를 이루어 산천경개를 즐기면서 지루한 줄 모르고 한반도 남단에 닿았다.


  삼재가 미치지 않는 1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흥사

  우리나라의 유명사찰이 그러하듯 이곳 대흥사도 절 가까이 있는 각종 시설들을 2km정도 아래로 옮기는 새로운 단지를 조성 중에 있었다. 신단지에서 일주문까지는 셔틀 버스를 운행하고 있어 맑은 계곡 물소리를 들으면서 울울창창한 숲길을 걸을 수 있는 여유가 박탈되었으나 마음 바쁜 사람들에게는 매우 편리하기도 하다.

  우리들은 숙식을 예약한 두륜각에서 피로를 풀고 조반을 먹고는 대흥사의 일주문을 들어섰다.

  백두산의 영맥(靈脈)이 남으로 흘러 한반도의 최남단에 이르러 융기한 두륜산(일명 대둔산) 자락에 대흥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신라 진흥왕 5년(서기 544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후 수차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부처님의 품에 안긴 듯 아늑하고 포근하고 정갈스럽다. 대웅보전 앞에 서니 두륜산 쌍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찰경내의 경치가 수려하듯 13대 종사(宗師)와 13대 강사(講師)를 배출한 대가람, 더욱이 서산대사와 초의선사의 발자취를 찾아 볼 수 있어 더욱 그 이름이 유명하다.

  사찰경내에는 옥석으로 만든 천불전, 라한전, 정조가 내린 사액현판이 걸린 표충사, 서산대사 기념관, 4점의 보물과 4점의 도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천연기념물 제173호로 지정된 왕벚나무 자생지이다.

  대구에도 벚나무가 너무 많다는 일부 비판하는 시민의 소리가 있어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일본의 국화인 벚나무의 자생지가 한라산과 대둔산에서 발견됨으로써 벚나무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증명되어 일본인에게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있다.

  가사와 유물들을 이곳에 보관토록 하라’고 유언을 하여 대사의 유물들이 보관되어 오다가 박대통령 때 기념관을 신축하여 일반에게 전시하고 있다서산대사의 기념관이 여기에 있게 된 것은 만년에 묘향산 보현사에서 입적하실 때 ‘대흥사만이 병난을 비롯한 三災가 미치지 않을 땅이며 만년을 지나도록 일그러지지   않을 곳이니 나의 .


  일지암과 초의선사

  표충사에서 약 2km 떨어진 곳(약 20분 거리)에 초의선사가 41세때 일지암을 짓고 주위에 차나무를 심어 스스로 차를 만들어 마시면서 혼자서 40년간 수련을 했다.

  신라 때부터 불교와 함께 유행하여 오랜 전통을 이어오던 다도가 조선조에 들어가면서 쇠퇴하여 선방에서 명맥을 이어오다가 초의선사에 이르러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초의는 이곳에서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했으며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을 닦으면서 강진에 유배와 있는 다산 정약용과 제주도에 유배된 완당 김정희와 함께 다도와 주역을 논하고 실학사상에 심취하여 해남 대흥사를 중심으로 19세기 초에 새로운 학문의 부흥기를 맞았다.

  일지암은 초의가 세상을 뜬 후 폐허가 되어버렸으나 한국차인회에서 다도의 중흥을 위해서 초의의 일지암 복원에 나서 1980년 4월에 완공하였다. 현재의 일지암은 조자용 박사의 설계로 6.5평의 모옥, 15.3평의 다정과 3평의 부속 건물로 되어 있다.

  이번 예비답사 중에는 일지암을 보지 못하고 회원들과 함께 가기로 기약하고는 하산하여 녹우단으로 향했다.


해남윤씨(海南尹氏) 녹우단(綠雨壇)

  해남읍에서 대흥사로 가는 길목 왼쪽 아늑한 산기슭에 한눈으로 반촌이라 느껴지는 곳이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로써 시조가 입향하여 해남윤씨의 일가를 이루고, 선조3년(1472년)에 건축한 목조와가인 녹우단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로 들어가는 農路가 최근 아스팔트로 포장하여 산뜻하기는 하나 호남지방 最古最大의 民家를 찾는 답사자에게는 거부감을 주는 것은 나만의 편견일까?

  대문밖에 서 있는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의 웅장함이 이 마을의 역사를 얘기해 준다.

  고산유적기념관에는 고산의 친필저서가 진열되어 있으며 보길도에서 집필한 어부사시가와 오우가도 볼 수 있어 도록만으로 보던 걸작들을 진품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공재의 대표작인 미인도, 그리고 손수 그린 우리나라 지도와 일본지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조선조의 3재(공재 윤두서, 겸재 정 선, 현재 심사정)중 한분인 공재는 화가로서, 학자로서 그 이름이 높았으며 다산의 외증조 할아버지로서 다산에게 학문적인 영향을 가장 많이 끼쳤다고 한다.    

  다산의 외가가 바로 해남윤씨종가이며 어릴 때부터 형과 함께 이곳에서 자라면서 外家의 학문적 기풍을 이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다산초당

  교직에 몸을 담고 있다가 해남윤씨의 종손으로서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서 연동리로 돌아와 녹우단을 지키면서 선조의 유업을 기리며 새로운 고산기념관을 짓고 유적을 관리하는 고산의 14대손 윤형석씨에게 靑友會員과의 만남을 약속하고 다산초당으로 떠날려고하니 윤씨는 그곳을 관리하는 일족 윤재찬씨를 소개해 주었다.

  해남서 강진으로 가는 길목에 초당이라는 곳에서 바닷가로 꺾어져 10여리 남짓 가면 강진군 도암면 귤동에 이르러 안내표시가 있다.

  골기와 집과 스레트 기와가 섞여있는 너절한 골목길을 지나 산으로 오르는 계곡에는 맹종죽이 하늘로 치솟고 오랑캐꽃, 양지꽃이 길섶을 수놓고 있다.

  산중턱 약300m지점에 다산초당 모습이 나타났다. 다산은 1808년 이곳으로 옮겨 양쪽에 동암, 서암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초당에서 10년여 간 거쳐하면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포등 많은 저술을 허였다.

  다산초당은 해남윤씨일가가 이곳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고 자녀교육을 위해서 지은 것으로 후일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 중 10여년간 머물다가 1818년 그의 나이 58세 되던 해에 이곳을 떠났다.

  뒷산의 이름을 따서 다산초당이라 하였으며 이 초당은 일제시대에 태풍으로 붕괴된 것을 해방 후 나라의 도움으로 원래의 목재를 이용하여 그대로 복원한 것이며 해남윤씨가 처음 입향하여 유자나무로 울타리를 한 것에 유래되어 유자촌이라 부르다가 일제 때 귤동(橘洞)이라 했다고 91세난 윤재찬(尹在瓚)옹께서는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다산초당 옆 능선위에 올라서니 천일각이 남해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이지방의 최고명당자리라 생각되었다.

  누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고 한 호흡을 하고나니 한잔 술 생각이 간절하다.

  우리 회원들은 다산초당을 오를 때 반드시 한 잔술과 오징어다리를 준비하여 이곳 천일각에서 일 배를 권하오니 후회 없도록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답사를 마치고

  사전답사라는 의무감을 가진 여행이었으나 영남지방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우리의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어서 보람 있는 여행길이었다.

  대흥사를 중심으로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 그리고 완당 김정희의 만남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3대째 솜씨를 물려받은 천일식당 오현화 여사의 떡갈비와 정갈스러운 젓갈류, 산뜻한 나물반찬을 곁들인 오찬약속을 기대하면서 귀로에 올랐다.

                                                              1992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