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정 회화나무(왼쪽잎이떨어진 나무) 정귀령이라는 분이 당초3그루를 심었으나 2그루는 죽고 1그루만 남았다
삼수정 (경북 문화재 자료 제486호)정귀령님은 이 정자 이름을 자기호로 삼았다
동래정씨 집성촌 경북 에천군 풍양면 우망리
조선 왕조 500년을 통하여 가장 많은 22명의 정승(政丞)을 배출한 가문은 전주이씨이다 그 다음은 23대 순조, 24대 헌종, 25대 철종 등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면서 60여 년간 세도정치로 한 시대를 풍미(風靡)했던 안동김씨로 19명이다. 따라서 이들 가문은 타 성씨들이 이루어 낼 수 없는 대단한 일 즉 고급관료를 배출했음에도 왕족 또는 왕실의 외척(外戚)이라는 점에서 이룩한 성과에 비해 낮게 평가되고 있다.
반면에 미관말직부터 차례차례로 단계를 밟아 이른 바 실력을 바탕으로 정승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동래정씨이다. 특히 동래정씨는 시조가 본디부터 왕이었거나 개국공신이었든 지체 높은 가문이 아니라 동래호장(戶長)으로 오늘 날 면장 정도에 불과한 한미한 가문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고려조에 이미 착실하게 기반을 쌓아 족세를 넓히기는 했으나 조선조에 와서 17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 판서 20여명, 문과급제자 198명을 배출함으로 명문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기록을 접하면서 그 가문의 번영이 어떤 이유보다 나무를 사랑하는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과 그 기반이 부산 동래가 아니라 한적하기 그지없는 외진 시골 마을 경상북도 예천의 풍양면 우망리(愚忘里)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조선 전기 결성현감을 지낸 정귀령(鄭龜齡)이라는 분이 같은 지역의 용궁현 구담리라는 곳에서 우망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낙동강이 굽어보이는 언덕에 장차 그의 자손이 번창 할 것을 염원하며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분은 세 그루의 회화나무 옆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당호를 삼수정(三樹亭)이라 하고 자신의 호(號) 역시 삼수정으로 삼았다.
이 식수(植樹)작업에서 주목되는 점은 수많은 종류의 나무 중에 왜 하필이면 회화나무를 심었느냐 하는 것이다.
모란은 부귀(富貴)를, 석류는 다산(多産)을, 소나무는 절개(節槪)를 상징하듯 나무마다 특정의 의미를 상징하는 데 회화나무는 학자나 벼슬을 상징한다. 삼수정 어른은 나무를 심을 당시에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든 것 같다. 80회 생신을 맞아 이곳 삼수정에서 연회를 베푸니 참석한 자손들이 모여 관복(官服)을 벗어 걸어 놓으니 세 그루의 회화나무에 울긋불긋 오색 꽃이 핀듯하여 보는 이들이 감탄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두 그루는 죽고 힌그루만남았는데 공교롭게도 소나무가 3그루 자라 외로운 회화나무와 동무를 하고 있다.
특히 후손 중 처음으로 영의정에 오른 분이자 동래정씨를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고 할 수 있는 수부(호)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은 폭군 연산군에게도 극간(極諫)을 서슴없이 하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던 올 곧은 관료이자 조좡조와 그를 지지하는 신진개혁세력들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많이 희생될 때에도 역시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면서도 그들을 두둔하는 입장에 서서 이후 집권을 한 사림(士林)들로부터 절대적으로 존경받는 훌륭한 분이었다.
그 후 수부의 후손에서 모두 12명의 정승이 배출되어 동래정씨가 배출한 17명의 정승 중 대다수를 차지했다. 특히 수부(守夫)의 손자이자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유길은 관상을 잘 보아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다가 안동인 김극효(金克孝)를 만나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사위로 맞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대와 달리 김극효는 크게 입신(立身)하지 못하였으나 아들 김상용과 김상헌(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를 지은 분) 형제가 정승이 됨으로 그의 에측이 맞아들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안동김씨가 왕족이외로서는 유일하게 가장 많은 정승을 배출하고 후기 조선사회를 주도한 세도정치를 펼치게 된 이면에는 동래정씨 그 중에서도 삼수정 후손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이 고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나무를 대하고 살았지만 회화나무 3그루가 한 가문뿐만 아니라, 나라전체에 이렇게 영향을 끼친 사례는 아직까지본 적이 없다.
3월 입춘이 지났지만 추위가 가시지 않는 8일 전직 상관이자 이곳 출신으로 삼수정 어른의 후손인 정지영님과 직장 동료였던 권춘경, 서일교님과 함께 우망리를 찾았다. 그 곳은 생각보다 더 깊은 오지였다. 삼수정 앞에 서니 감개가 무량했다. 이 곳을 오기위해 얼마나 벼르고 벼렸든가? 삼수정은 낙동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약간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익히 알고 있던 데로 회화나무 한 그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고 있으며 주변에는 저절로 자랐다고 하나 누군가 심은 것이 분명한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었다.
현존하는 회화나무에 대해 어떤 자료에는 원래 심은 나무가 죽고 그 나무에서 새로 움이 돋아 자란 것이라 했으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500여 년이란 수령에 비해 다소 굵기는 떨어지는 것 같으나 원래 심은 나무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기념 촬영을 하고 현장을 물러나왔다.
주변에 조경용으로 새로 심은듯한 일본산 가이즈까향나무가 눈에 몹시 거슬린다.기회를 봐서 없애고 대신 회화나무 두 그루를 보식하여 옛날 삼수정 어른이 가문의 번영을 염원하며 심었듯이 동래정문이 다시 500여 년 번성하여 가문의 영광은 물론 나라에 기둥이 될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게기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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