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문효공 하연이 심은 감나무
기념표석(1986년에 설치하면서 수령이 580년이라고 새겨 놓았으니 올 해로 601년이 된다)
조선 초기의 문신. 하연과 소래산 묘소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는 경북의 하회마을 같은 곳이다. 이씨, 최씨,하씨들이 모여 사는 전통마을이지만 특히 두드러진 점은 진양 하씨들의 발상지라는 점이다.
고려 정·문종 양 대에 걸쳐 사직(司直)이라는 벼슬을 했던 시조 하진(河珍)의 8세손 하즙(河楫, 1303~1380 )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 여러 벼슬을 거쳐 마침내 공신이 되어 오늘 날 진주(晋州)의 다른 이름인 진천(晋川) 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해지고 원정(元正)이라는 시호를 받은 분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후 공의 많은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아가 공직자로서 본분을 다하며 가문을 빛냈을 뿐 아니라, 특히 증손 대에 와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을 배출함으로 남사리가 진양 하씨의 텃밭이라는 사실을 더욱 공고히 했다.
공이 매화를 좋아해서 집 뜰 앞에 심어 놓고 완상(玩賞)하며 시를 지었듯이 증손자 하연(河演,1376~1453)도 감나무를 심어 601년(1986년에 설치한 표석에는 580년으로기록되어 있으니 올해가 601년이 된다) 이 지난 오늘 날까지 전해 온다는 사실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비들이 국화, 난,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라 하여 매화(梅花)를 좋아하는 것은 이해가 되나 왜 감나무냐에 대해서는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다. 대추, 밤, 감이 제사상에 오르는 3과실이라는 데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좋은 감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고염나무에 접을 붙여야 하듯이 자식들을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여느 나무와 달리 뿌리가 깊이 뻗는 나무인만큼 후손들은 몸을 잘 보전하여 대를 이어가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 중에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심었는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고 다른 나무보다 감나무가 좋아서 심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감나무의 정령(精靈)이 보살펴 주어 훗날 큰 인물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감나무를 심은 경재(敬齋 하연의 호)는 포은 정몽주 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웠다고 한다. 20대 초반에 이미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관, 집의 등을 지냈고 특히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여 태종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세종 조에 이르러 대사헌으로 있으면서는 불교의 7대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합하고 사원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국고로 환수하는 시책을 펼쳤다. 경상·평안도관찰사로 잠시 외직에 나갔다가 파직되어 귀양살이도 했으나, 곧 풀려나와 병조참판,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에도 여러 직책을 맡았다가 고희에 이르러 좌찬성이 되고 이어 우·좌의정을 거쳐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1451년(단종 1)에 78세에 돌아가시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은 문(文)이고, 자혜하고 어버이를 사랑함은 효(孝)이다’ 하여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463년(세조 9)에는 공직자로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청백리로 뽑혔다. 저서로는 경재집(敬齎集)이 있고 경상도지리지 등의 편찬에 간여했다.
사관(史官)이 쓴 인물평을 보면 “성품이 간단하고 어버이 섬기기를 효성으로 하며 친족에게 화목하기를 인(仁)으로서 하고····글을 즐기고 시 읊기를 좋아하며 재산에 힘쓰지 아니하고 소리와 여자를 기르지 아니하여 가정이 화목하였다. 관료로 있으면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밝게 살피기를 힘쓰고,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 하지 하니 하였다.” 라고 했다. 사후(死後) 합천의 신천서원, 문의의 우록서원, 진주의 종천서원, 장연의 반곡서원, 무주의 백산성원 등 여러 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묘는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 12번지에 있으며 시흥시 향토 유적 제3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입구에는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선생이 말년에 이 곳에 미리 유택을 정하고 손수 심었으며 오늘까지 살아오는 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문효공이 죽은 지 약 100여 년 후 인천고을에 부사로 내려 간 사람마다 하루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변고가 세 번이나 되풀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따라서 모두들 인천부사가 되는 것을 꺼려하게 되자 조정에서도 난감해 하면서 담이 큰 사람을 골라 부사로 보냈다. 새로 임명된 부사는 부임 즉시 관사 주위에 보초를 세우고 밤에는 대낮같이 불을 밝혔다. 그런 어느날 밤늦은 시각에 정승 복장을 한 노인이 나타났다. 그 위엄이 보통 아니어서 정면으로 처다 볼 수가 없어 엎드려 절을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정승 하연인데 내 묘가 소래산에 있으며 묘 아래 내가 살아 있을 때 심었던 느티나무가 있어 잎이 무성한 달밤이면 내 혼령이 즐겁게 노니는데 그 나무가 어느 날 소금장수에 팔려 잘리게 되었다. 이런 처지를 부사에게 알리려고 가면 말도 하지 아니하였는데도 부사가 지례 겁을 먹고 죽으니 참으로 난감하다. 오늘 밤 이제 새로 부임한 당신에게 부탁하니 내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했다.' 부사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잠깐 존 사이에 꾼 꿈이었다. 다음날 부사는 꿈 속에서 하연이 일러준 소래산을찾았다. 그 곳 나무 밑에는 많은 사람들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부사가 웬 사람들이냐고 물으니 자기들은 인천에 사는 소금장수로 나무를 베러 왔으며 어찌된 일인지 이 나무 밑에 만 오면 잠이 와서 자다가 돌아가는 데 오늘도 그렇다고 했다. 부사가 이르기를 이 나무는 명재상 하연이 손수 심은 것인데 내가 나무 값을 줄 터이니 베지 말라고 하며 소금장수들을 돌려보내고 나무를 살렸다고 한다.
그 후에도 하연의 혼령이 고맙게 해준 그 부사를 도와주기 위해 자주 꿈에 나타났으나 겁이 많은 부사는 하연의 혼령이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귀신들이 싫어하는 복숭아를 상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의 혼령은 그 복숭아를 다 먹으며 부사(府使)가 이렇게도 내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한탄하면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는 문중 자료에 실물 사진이 있어 시흥시청에 전화를 걸어 이 나무가 현재 어떤 상태로 있는지 알아보았더니 보호수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연선생이 돌아 가신지도 어언 550여 년 젊을 때 심었다는 남사리의 감나무도 줄기가 썩는 등 생육상태가 좋지 못하다. 하루 빨리 후계목을 생산하여 하연 대감의 혼이 깃든 유서 깊은 나무가 대를 이어 사랑을 받았으면 한다. 또한 이 감나무는 우리나라의 토종식물인 만큼 유전자원 확보 차원에서도 보존이 필요한 귀중한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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