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830년의 적천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402호)
문무왕 4년(664) 원효대사가 토굴을 짓고 수도했다는 적천사 대웅전
보조국사 영정
몇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청도 적천사(積天寺)를 들렸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진노랑 이파리를 수 없이 달고 서 있는 장대한 은행나무와 그 나무에서 떨어진 노랑 잎이 융단처럼 땅을 덮고 있는 풍경이 고즈넉한 산사(山寺)와 파란 가을 하늘이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연출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은행나무가 오늘 날 한국불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조계종의 중흥조(中興祖)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스님이 심은 나무라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청도 화악산에 위치한 적천사는 신라 문무왕 4년(664) 원효(617~686)스님이 토굴을 지어 수도하던 곳에 흥덕왕 3년(828) 심지화상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명종 5년(1175)에는 보조국사가 주지로 있으며 대가람을 이루었다는 사기(寺記)가 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접하며 적천사가 보조국사가 심은 나무가 있는 사찰이라는 점 이외 이들 두 스님으로 인해 동화사와 이절이 세상에 알려 지지 않는 깊은 관련이 있지 아니할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흔히 심지왕사(心地王師)로도 불려지는 스님은 출생부터 여느 스님과 다르다. 신라 제41대 헌덕왕의 아들로 태어나 15살 나든 해에 팔공산에 들어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왕자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던 그였겠지만 운명적으로 당시 신라 왕실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의 한 복판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이 되어 엄청난 그 비극을 해원(解寃)이라도 하려는 듯 동화사를 중창(832)하여 미륵본사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부속 비로암에 신라 제44대 민애왕(?~839)을 추모하는 삼층석탑을 조성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랐던지 팔공산의 동서남북에 당신이 주관하여 파계사(832년), 묘봉암(834), 환성사(835) 등의 여러 절을 지어 팔공산을 불국토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한 스님이 이 외진 곳까지 와서 왜 적천사를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황해도 서흥 출신으로 일찍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장래가 보장된 스님이었지만 승려로서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다 버리고 팔공산 거조암으로 들어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타락한 고려 불교를 개혁하기에 앞장선 분이다. 고려 명종 20년(1190)에는 동화사에 머물며 4창에 관여 동화사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또 다시 남도 송광사로 자리를 옮겨 당신을 포함한 16명의 국사(國師)를 길러내니 오늘날 송광사를 승보사찰(僧寶寺刹)로 자리매김 되도록 한 큰 스님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은 두 스님의 연표(年表)나 사기(寺記)에 의하면 그들이 각기 동화사 중창과 4창에 관여하기 이전에 이미 적천사에서 활동하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을 두고 볼 때 현재 적천사의 절 규모나 사세(寺勢)가 비록 동화사에 비할 바 없이 초라하고, 그마져 말사(末寺)로 전락했지만 한 때는 동화사보다 더 격이 높은 사찰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천사 앞뜰에는 큰 은행나무 2그루가 있다. 그 중에서 높이가 25m 둘레가 8.7m나 되며 지상에서 3m 정도 올라간 지점에서 다시 3개의 가지가 돋아난 은행나무로서 전형적인 수형을 갖춘 수령 830여 년의 오른 쪽의 나무가 천연기념물 제402호로 지정(1998,12,23)되었다. 몇 년 전 맨 처음 이 나무를 본 후 다시 한 번 보러 갔었으나 아쉽게도 잎이 다 떨어져 가지만 앙상하게 들어낼 때였다. 언젠가 노랑 잎을 흐드러지게 달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찾기로 하였으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 정확히 그런 날을 맞출 수 없었다. 그러던 차 송연 정시식 선배의 카페에 이 나무의 사진이 올라 있었다. 바로 이때다 싶었는데 때마침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도동서원 내 한강 정구(1543~1620)선생이 심은 은행나무가 단풍이 잘 들었다고 하는데 알고 있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잘 모른다고 대답하고 카페에 올려진 적천사 은행나무사진이 마음에 들더라고 하였더니 지난 주 갔었는데 옳게 단풍이 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금주가 사진 찍기 더 좋을 것이라고 하여 평년보다 기온이 훨씬 내려가 몹시 쌀쌀했던 지난 입동(立冬) 때 아내와 함께 적천사를 찾았다. 팔조령을 넘어서니 길가 곳곳에 청도 반시(盤柿)를 파는 임시 판매소가 듬성듬성 나타나는 것이 이 곳이 감 주산지임을 실감케 했다. 역전에서 잡어 추어탕으로 요기를 하고 적천사를 향했다. 다른 차라도 만나면 비켜가기도 어려울 만큼 좁고 꼬불꼬불한 길이었고 평소 조심스럽기만 한 아내였지만 이미 와본 경험이 있어 그런지 그날따라 주저 없이 운전을 했다.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하늘에 닿은 듯 높게 눈앞에 서 있어 감격스러웠다. 비록 첫 대면 때의 그 환상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장관이었다. 사진을 찍고 찬찬히 나무를 살펴보면서 아내에게 떨어진 은행을 줍게 하였다.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아름다운 자태를 담아내려고 노력하였지만 서툰 솜씨라 작품(?)을 만들 수가 없었다. 돌아와서 쉬고 있는데 아내가 구은 은행 알을 내밀었다. 웬? 은행이냐고 물었더니 적천사에서 주은 것이라 한다. 아뿔싸 주은 열매를 심어 2세를 보려했는데 아내는 그런 내 마음을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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