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이정웅 숲해설가

[스크랩] 대구수목원에 뿌릴 내린 단속사지 정당매

是夢 2007. 3. 24. 05:19

 

 단속사지 정당매 (사진 산청군청 홈페이지)

 대구수목원에서 자라고 있는 복제 정당매

 대구수목원 복제 정당매에서 핀 꽃

 

 고사관수도 (강희안, 강회백의 손자이자 양화소록의 저자)

남도(南道) 출장은 의미 있는 여행이기도 했다.

광주에 거주하며 농장이 장성에 있는 최규섭님이 대구시가 나무를 많이 심는다는 TV 뉴스를 보고 자기 소유의 느티나무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와 내가 그 곳을 직접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었기 때문이다.

어느 하루도 바쁘지 않는 날이 없었던 나로서는 모처럼의 여유(?)에 매우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발 당일 웬 봄비가 그리도 많이 오는지 차창을 열고 이제 막 봄 기운으로 물든 남도의 산하를 마음껏 구경하고 싶었으나, 문을 열기는커녕 와이퍼가 부지런히 움직여도 한 치 앞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비가 내렸다.

다행이 현지에 도착하기 얼마 전에 간헐적으로 내리다가 최 선생을 만날 때에는 아예 그쳤다.

쓸 만한 나무가 그리 많지 않아 다소 실망스러웠으나 정성이 하도 고마워 가져오기로 하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백양사로 향했다.

안개 속의 장성호(長城湖)는 크기도 하려니와 물이 가득해 너무나 아름다웠다.

절로 들어가는 길은 단풍나무 가로수였다. 대구가 자랑하는 팔공산 순환도로의 단풍나무보다 훨씬 커서 가을에는 장관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이 고향최 선생과 깔끔한 산채정식을 맛있게 먹고 헤어진 우리 일행은 백양사로 들었다.

기묘하면서도 거대한 바위산이 야산만 밋밋하게 전개되던 남도의 다른 지역과는 확연히 달랐다.

절의 규모는 해인사나 동화사에 비길 바 못 되었으나 백제(百濟)시대에 창건되었고 주위에 자생하고 있는 아름드리 비자나무는 위도 상으로 우리나라의 최북단이라는 점에서, 대구가 원산지인 이팝나무 노거수(老巨樹)가 있어 퍽 인상적이었다.

다시 담양(潭陽)으로 나와 무등산 자락에 있는 조선중기 대표적인 정원인 소쇄원을 둘러보았다.

그리 크지 않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을 만큼 좁은 공간이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깊은 계곡을 따라 정자를 짓고 매화나 복숭아, 산수유를 심어 철 따라 꽃이 피게 하고, 푸른 대밭을 통해 외부와 단절되게 하였으니 뜻있는 선비가 속세를 벗어나 홀로 책을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들어가는 길 역시 백양사 그 곳과 같이 광주호가 바다처럼 펼쳐져 경관 또한 여간 아니었다.

또 비가 쏟아졌지만 인근에 있는, 성산별곡의 무대인 식영정에 올랐다가 발길을 재촉해 긴 여로의 늦은 저녁 지리산(智異山) 온천지구에서 짐을 풀었다.

이튿날, 88고속도로를 타면 곧바로 대구로 오겠지만 모처럼나들이이고 또한 비가 와 당분간은 산불 걱정도 없어 경남 하동으로 향했다.

아직도 바람이 차지만 양지바른 곳에는 성급한 매화가 반기고 푸른 섬진강과 하얀 모래톱 언덕 위의 그림 같은 집들이 전 국토가 공원이라는 어느 국토 예찬론자의 말을 실감하게 했다.

하동 포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의 얼이 배어 있는 선비의 고장인 산청에 들어섰다.

퇴계 이황(1501~1570)과 함께 탄생 500주년을 맞은 그를 만나기 위해 덕천서원(德川書院)을 가기로 하였으나 길을 잘못 들어 포기하고 단속사로 향했다.

백양사를 들르고 소쇄원을 찾은 것은 미답지라는 호기심도 발동했지만, 사실 오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그냥 가 본 곳이라면 단속사는 사뭇 달랐다.

지난해 아우 만농으로부터 정당매(政堂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벌써부터 별러 왔던 곳이었다.

당시 구미시청에 근무하든 아우는 영남지방 사대부들의 인맥에 관심이 많아 향토사를 연구하고 있는 내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데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나오는 단속사의 정당매를 보았느냐는 것이다.

지 못했다고 하니 “나무를 좋아하는 형께서 어찌 그 곳을 가보지 않았느냐”고 했었기 때문이다.

선초(鮮初) 시, 글씨, 그림에 능한 강희안(姜希顔 1417~1465)은 직접 화초를 기르면서 체험한 지식을 정리해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식물에 관한 이론서인 <양화소록>을 펴낸 분으로 그 책의 '매화' 편에



우리 선조 통정[通亭, 할아버지 강회백(姜淮伯 1357~1402)을 말함]이 어려서 지리산 단속사에서 책을 읽었다. 그 때 절 마당 앞에 손수 매화 한 그루를 심어 놓고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천지의 기운이 돌아가고 또 오니 / 하늘의 뜻을 납전매(臘前梅 세한에 피는 매화)에서 보는 구나 / 바로 큰 솥 가득 맛있는 국을 끊이는데 / 하염없이 산속을 향해 졌다가 또 피는 구나”라고 하였다. 공이 과거에 합격한 뒤에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조정에 있을 때 옳고 그름을 분간하여 바로잡고 조화로 서로 돕고 구제한 일이 매우 많아서 당시 사람들이 시참(詩讖, 시를 쓴 것이 뒷날 뜻밖에 들어맞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속사의 스님이 공의 덕과 재주를 사랑하며, 깨끗하고 높은 인격을 흠모하여 매년 뿌리에 흙을 북돋아 주고 매화의 품성에 따라 재배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계속 전해져 정당매(政堂梅)라고 부른다. 그 가지와 줄기는 굽어져 온갖 모양을 이루고 또한 푸른 이끼가 감싸고 있으니 ‘매보’에서 말하는 고매(古梅)와 차이가 없다. 이것이 진정 영남의 고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로부터 왕의 명령을 받들어 영남으로 가는 사대부(士大夫)는 이 고을에 이르면 모두 절을 찾아 매화를 둘러보고서 운(韻)을 빌려 시를 지어 처마 밑에 걸어 두었다.

 

라고 했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정당매는 강희안의 조부 통정이 고려 말에 심었다는 것과 조선조 초 이미 영남의 명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정황을 볼 때 이 매화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이자 심은 이가 분명한 다시 말해서 족보가 뚜렷한 매화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매화는 난, 국화, 대와 함께 사군자의 하나로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단속사는 5세기 전에 이미 폐사가 되어 대웅전 앞에 있었을 두 3층 석탑(보물 제72호와 73호로 지정되었음)만 없었다면 거기가 신라의 천재 화가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있었고, 통정이 학문을 연마했다는 단속사 터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렸으나 문제의 정당매는 보이지 않았다. 동행한 김종학님이 빨리 오라기에 가 보니, 골목 안 마을 한복판에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려 하고 있었다.

뜨거운 감회에 가슴이 달아올랐다. 가장 오래되었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강회백이 심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에 기록된 매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행운 때문이었다.

동행한 김장길님으로 하여금 몰래 가지를 끊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접목 전문가 정옥님 여사에게 부탁해 당해 년에는 3그루를 생산하고 이듬해 이 세 그루에서 20여 그루로 늘렸으며 농장을 하는 친구 박원재 군에게 후계목을 키워 이 귀중한 매화를 일반인들에게 보급하라고 했더니, 쾌히 내 권유를 받아들여 묘목을 생산하고 있다. 당초 생산한 3그루 중 2그루는 2003년 3월 2일 내가 정성들여 조성했던 대구수목원에 심었다.

꽃이 피면 매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할 것이지만 지리산이 아닌 이곳 대구의 천수봉 아래에서 또 다시 600년을 이어 갈 것이다. 또한 대구 사람들이 먼 산청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곳 대구수목원에서 정당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을 버텨온 단속사지의 정당매가 어느 때 고사라도 하는 날이면 대구수목원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단속사의 복제(複製) 정당매를 보존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자주 수목원을 찾을 수 없는 나는 그 곳에 근무하는 최영근님에게 꽃이 피면 사진을 찍어 보내 달라고 부탁했더니 고맙게도 2005년 3월 하순 사진을 보내 왔다.

두 번째 단속사를 갔을 때는 너무 늦어 몇 송이만 겨우 남아 있던 꽃을 촬영 했었는데 보내 온 사진을 보니 그때 모습과 똑같았다. 지난  가을 장정걸 시설담당이 산림문화전시관을 새로 짓고 곧 개장하려는데 정당매를 1그루를 그 곳 조경지로 옮기자고 하여 승락했다. 안터넷을 검색해보니 꽃이 핀 정당매 사진이 올라왔다.불현듯 정당매 생각이 나서 2007년3월 11일 수목원을 찾았더니 아직 만개는 아니지만 꽃이 피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삽수를 끊어오고 이듬해 갔을 때는 다 지고 한 두송이만 핀 것을 보고 지난해 사진으로 본 것이 전부였었는데 대구에서 복제하고는 처음으로 실물을 보니 기쁘기 그지 없었다.


출처 : 나무이야기,꽃이야기
글쓴이 : 이팝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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