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이정웅 숲해설가

[스크랩] 지리산의 거인 조식이 심은 산천재 남명매

是夢 2007. 3. 24. 05:30
 

 산천재와 남명매

 남명기념관 내 남명 선생상

 덕천서원 내 선생의 사당


산청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어쩌면 이곳이 21세기 마지막 남은 자연과 역사문화유적의 보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리산과 경호강 등 자연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경관도 그렇지만 찬란한 철기문화를 꽃피웠으면서도 역사에 뒤 안에 묻혀있는 가야(伽倻)의 마지막 왕 구형이 몸을 위탁한 곳도 이 곳이요. 우리나라  의류 혁명을 일으킨 문익점 선생의 고향이자, 영원한 처사(處士)로 불리는 지리산의 거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선생이 노년에 이 곳에 들어와 후학들에게  성리학을 전수하기 위해 마지막 정열을 불태운 고장이며, 이 시대의 참 스님인 성철이 이 곳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점이 그럴 뿐만 아니라, 수령 100년이 넘은 우리나라 고매(古梅)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은 단속사지의 정당매를 둘러보고 남명매를 보기 위해 점심도 거른 채 시천으로 향했다. 여행 중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감정은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도로가 너무 잘 되어있다는 점이다. 몇 년 전 일본 동경에서 쯔꾸바로 가기 위해 버스를 이용했는데 어느 쯤에서는 국도가 편도 1차선이어서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경제규모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큰 일본이 왜 도로사정은 우리보다 못한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날도 그랬다. 몇 년 전 산천재를 가 본 경험이 있어 쉽게 찾으려니 하고 곧은길을 따라 들어갔더니 이미 지나쳤든 것이다. 그 사이에 우회도로가 새로 생긴 것이었다. 되돌아 나와 덕천서원에 닿으니 큰 은행나무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었다. 앞이 강당이고 뒤가 사당인 형태는 경상도 여느 지역의 서원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강당 양 처마 모서리에 심어 놓은 조경수가 차(茶)나무라는 사실이 퍽 이채로웠다. 덕천강을 따라 오면서 주변에 차나무가 더러 보여 이 곳이 지리산 아래라 하드라도 위도(緯度) 상으로는 대구보다 남쪽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난대수종인 차나무가 전남 보성이나 경남 하동과 달리 이 곳에서도 잘 자라는지는 미처 몰랐다.

그날따라 소방공무원들이 건물을 점검하고 있었다. 발길을 산천재로 옮겼다.  61세 때 노년기에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매화는 조금 전 보았던 정당매와 비슷한 품종인지 꽃의 색깔도 닮았을 뿐 아니라, 지는 시기도 비슷했다. 앞에는 맑은 덕천강이 흐르고 먼 곳에 있는 지리산이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흔히 경상도를 인재의 보고(寶庫)라고 한다. 이런 평가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退溪, 李幌 1501~1570 )과 우도의 남명 조식이 각각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이루며 경쟁적으로 유능한 인재를 길러냈기 때문이다. 이들이 뿌린 씨앗이 자라 조선조 후기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그 맥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명선생은 끝까지 벼슬을 사양했고, 퇴계선생은 벼슬길에 나아가 현실정치에 참여하였듯이 두 분의 인생관에는 다소 차이가 있어 학풍도 달랐다. 이런 면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선조 조에 일어났던 임진왜란의 대처방법이었다. 퇴계의 제자 유성룡과 김성일은 관직에 있으면서 관군(官軍)을 동원해 수습에 매진한 반면에 남명의 제자 정인홍, 곽재우, 김면은 재야에서 의병(義兵)을 모아 국난을 극복하고자 한 점이다.

어떻던 이런 두 문중의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성리학이 더욱 발전하였고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인재가 육성되었다고 본다.

남명 조식선생은 1501년(연산군 7)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토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장원급제한 아버지가 조정에 근무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자 따라가서 글을 배웠으며 단천군수로 자리를 옮기자 그 역시 아버지를 따라 함경남도로 가서 그 곳에서 경서는 물론 천문, 지리, 의약, 수학, 진법(陣法)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다. 20세에 생원 1등, 진사 2등으로 급제했다.

답안이 우수하여 시험관을 놀라게 하니 주변에서 선생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고 숙부마저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니 시대를 개탄하며 벼슬길을 단념했다고 한다.

30세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로 자리를 옮겨 산해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을 닦으니 성운, 이원, 이희안, 신계성 등 많은 유학자들이 모여들면서 기묘사화 이후 몰락한 사림의 사기를 북돋우며 학자로서 기반을 다졌다. 48세 때에는 다시 고향 합천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쌓은 경륜을 토대로 국정개혁에 관한 소를 올리는 등  사림의 영수로 국정을 비판하게 된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선생의 폭 넓은 식견을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여러 차례 벼슬을 주며 선생을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니 선생의 명망은 오히려 하늘을 치솟을 듯이 높아졌다.

61세 말년이 도어서는 그동안 갈고 닦은 학문과 도덕, 인격 등을 후학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지리산 자락 덕산으로 들어와 산천재를 짓고 고결한 꽃이 피는 매화 한 그루를 심고 마지막 거처로 자리를 잡았다. 이때 배운 제자들이 앞서 말한 왜란 시 의병을 일으킨 인물들이다. 그 후 선조가 여러 번 선생을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는 대신 정책을 건의했다. 선생의 병이 깊어진 소식을 들은 임금이 전의를 보내 치료를 해 주려고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의원이 도착하기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1572년 (선조 5) 올곧은 선비이자 지리산의 거인인 조식 선생이 마침내 유명을 달리하니 향년 78세였다. 부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이 크게 슬퍼하며 신하를 시켜 제사를 지내주고 대사간을 증직했으며 광해군 때에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다시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저서로 <남명집>과 (학기유편(學記類編)>이 있다.


“····전하의 국정이 그릇 된지 오래고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들의 마음 또한 이미 전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비유하건데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한테 파 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폭풍우가 닥치면 견뎌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는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말단관리들은 아래서 히히거리며 주색을 즐기고, 대관들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오직 뇌물을 긁어모으는 데 혈안입니다.·····”로 시작되는 이른 바 단성소(丹城疏)는 당시 정치제도나 임금과 신하관계로 보아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극언으로 죽음을 무릅쓴 각오가 된 사람이 아니고는 말할 수 없는 격한 글이었다. 조정의 중신들뿐만 아니라, 명종을 놀라게 하였으며 심지어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유학자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조선 500년사에도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했다.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도 벼슬을 더 유지하려거나, 또한 하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현실에서도 이 내용은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시대를 초월한 명언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이 심은 매화는 오늘도 산찬재 앞에서 은은한 향기를 내며 500여 년 후에 찾아온 나그네에게 무언가 말을 전하고자 하는 것 같으나 이미 속인의 때가 묻은 나로서는 들을 수 없었다.            

                              

출처 : 나무이야기,꽃이야기
글쓴이 : 이팝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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