省墓길의 想念
鄭 時 植 會員
추석에 고향을 찾는 것은 내가 태어난 곳을 가보고 싶다는 귀소본능과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뵙고 뿔뿔이 흩어진 형제와 친지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옛정을 나누면서 어린 아이가 어머님의 품에 안기듯 각박한 객지생활의 아쉬움을 쓸어내기 위해서 지옥 같은 교통전쟁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는 것이리라. 그러나 고향을 찾아드는 것은 이러한 살아 있는 사람과의 만남 못지않게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선조와의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추석에 고향을 찾는 것은 전자보다는 오히려 후자 쪽에 더 큰 비중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건강이 나빠지신 선고께서는 농사를 포기하시고 큰 형님 댁으로 옮겨오셔서 중풍으로 고생을 하시다 막내아들(필자)의 손자를 보신 해에 돌아가셨다. 나는 그때 서울에서 6개월간의 장기교육을 받느라 임종도 하지 못한 불효자가 되었다. 또한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대구로 나왔으므로 학연으로 인한 친구가 없을 뿐 아니라 어릴 때의 코 흘리게 동네 친구들도 모두 도시로 나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삶을 영위하느라 모두 잃어버려, 고향에서 나를 반기는 사람은 종형, 재종형과 몇 분 남아계시는 가까운 친지들뿐이다.
그러나 나는 매년 명절의 성묘와 묘사를 지내러 고향을 찾는다. 올해도 형님내외분들, 조카, 조카며느리, 큰집 손자 손녀를 앞세우고 고향 동네를 지나 뒷동산을 돌아 삼 형제 내외분의 유택이 있는 선영을 찾았다. 전에는 산소로 가는 길이 훤히 잘 나 있었으나 요즈음은 인적이 드물어 희미한 오솔길마저도 가시 덩굴이 얽히고 나무 가지가 앞길을 막아 헤쳐가야만 한다. 때로는 소름이 끼치는 뱀도 지나가고 살찐 장끼가 퍼드덕 날아 놀래기도 한다. 금년(1996년)의 지독한 가뭄으로 아버님의 산소에 잔디가 마르고 향나무와 백일홍 몇 그루가 죽어 흉물스럽다. 밤나무도 견디지 못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어 매년 밤송이에 찔려가며 밤알을 까던 맏손자의 노리개도 올해는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우리 6남매를 낳아 기르신 부모님은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 증손자, 증손녀를 반가이 맞아 주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얼마나 서운하시랴! 셋째 아들 가족들은 서울에 있어 못 온 대신 지난여름에 다녀가셨으니 이해하시리라. 그러나 아직도 건장하여야 할 예순 여덟의 둘째 아들이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8년 전에 먼저 온 고명딸과 저승에서 자리를 함께 하시고 그 손자들만의 절을 받으시니 얼마나 마음 아프실까? 세월이 가면 언젠가는 6남매를 모두 거두어 드려야 하시겠지만----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겼다가 성묘를 마치고 울적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온다. 조상들의 산소를 찾는 젊은 부부가 제수품을 들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손을 잡고 오솔길을 헤집으면서 오르고 있다. 산을 오를 때에도 아이들을 앞세우고 산소를 찾는 젊은 부부들을 여럿 만났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도 선조와의 만남을 위해 그 다음 세대를 앞세우고 조상을 찾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조상에 대한 경애와 일체감은 영원한 미덕으로 남아 세계 속으로 뻗어 가는 우리 국력의 원동력이 되리라 확신하면서 성묘 길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진 성주국도를 따라 대구로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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