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수상기

국궁 소고

是夢 2006. 8. 29. 14:50

국궁 소고 

 

 직장생활을 하는 셀러리맨에게는 새벽 시간이 매우 소중한 시간이다. 전날 야근으로 과로를 하거나, 업무상 과음을 한 날의 새벽 시간은 늦잠으로 피로를 푸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책을 보면서 실력을 쌓고 소양을 넓히거나, 운동으로 자기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특히 퇴근시간이 일정치 못한 중견간부급 이상이면 더욱 소중한 시간이 된다. 직장 분위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주어진 일이 끝났더라도 윗사람 눈치 보지 않고 시간 맞춰 퇴근할 수 있는 소신파 월급쟁이는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 모처럼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보고 싶은 친구나 업무상 필요한 사람을 만나 소주잔 놓고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직무와 관련된 교제를 하는 등 사회생활에 필요한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느라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뜻대로 쓸 수 있는 소중한 새벽시간을 건강유지를 위한 시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테니스장에서 땀을 흘리면서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고산골 약수터에 가서 약수 한잔 마시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하다가 근자에는 골프를 치지 않으면 사람 구실 못하는 것 같아서 다소 힘에 겹더라도 친구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아침마다 인도아에 나가 제법 재미를 붙여 남과 어울릴 만한 정도에 이르러 휴일 날만 기다렸다.


국궁과의 인연

 

 그러나 문민정부의 신한국 창조를 위한 개혁의 바람이 불면서, 사회적 분위기가 골프장 드나들기가 어려워져서 인도아에 나가는 것도 흥미를 잃게 되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벽등산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치른 전국체전을 위해 마련한 체육시설을 점검하려고 범어공원에 있는 국궁장인 팔공정에 들렀다. 많은 재정을 투입하여 만든 궁도장에 이용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회원이 많지 않아 신입회원을 환영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체육시설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은 점에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좋은 시설을 이용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이러한 연유로 지난 7월부터 새벽운동으로 매일 145m 거리의 과녁을 향해 화살을 시위에 먹여 힘차게 당기고 있다. 처음에는 활을 당길 힘과 요령을 터득하기 위해서 보름정도 빈 활 당기기를 하다가, 깍지를 끼고 줄에 매단 화살을 당기는 과정을 거쳐 비로써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게 된다.

 

  처음으로 화살을 과녁에 명중시키는 것을 득중(得中)이라 하며, 득중을 하면 입문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사우(射友)들에게 한 턱 내는 관례가 있어, 나는 열흘 만에 得中하여 아내의 솜씨를 빌려 조촐하나마 정중하게 선배들을 대접하고는 궁도인(弓道人)이 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왼쪽 발끝이 과녁을 향하게 하고 오른 쪽 발을 70도 정도 벌려(非丁非八:丁字도 아니오, 八字도아닌 자세로 발을 벌려 서는 활 쏘는 자세) 바른 자세로, 양다리에 힘주어 사대(射臺)를 굳게 딛고는 화살을 시위에 먹여 천천히 과녁을 향해 거궁(擧弓)을 한 후, 천천히 시위를 잡아당기면서 숨을 빨아들여 단전에 힘을 모우고, 4-5초간 숨을 중지하고 겨냥을 한 후, 줌손(오른손잡이의 경우 활을 잡은 왼손)을 태산같이 힘껏 밀고, 깍지 손(시위를 쥔 오른손)을 당기면서 가볍게 놓으면(前推泰山 後握虎尾) 시위를 떠난 화살은 새벽공기를 가르면서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과녁에 명중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힘차게 돌리는 시동(矢童)의 흰 깃발을 보는 쾌감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화살 다섯 개를 한손이라 하며, 아침마다 열손씩 내게 되는데 화살 한 개를 쏘는데 드는 운동양은 대개 쌀 한가마니 드는 힘이라고 하니, 매일 아침 쌀 쉰 가마니씩 드는 운동양이라 할 수 있다.  한손을 쏴서 다섯 개 모두 명중시키는 것을 몰기(沒技)라하며, 몰기를 한 사람에게는 접장(接長)의 칭호를 주어 궁도인(弓道人)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가지게 되는데, 나는 지난 11월 8일 오전 7시에 이 몰기(沒技)의 영광을 갖게 되어 접장(接長)의 칭호도 받았다.

  이렇게 하여 궁도와 맺게 된 인연을 계기로 하여 국궁에 대한 역사와 현황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 소개하고자 한다.


 국궁의 역사와 현황

 

  인류가 활을 사용한 것은 구석기시대의 말엽인 1-3 만년전이라고도 하고 일부 학자들은 10만년  전부터 사용해 왔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류가 먹이(食物)을 얻기 위한 생활의 도구로서 발명한 활은 차차 그 용도가 많아져서 수렵뿐만 아니라 전쟁무기로 발달되어 그 위력을 발휘하였으나, 화학의 발명으로 총이 등장함으로써 그 위력을 빼앗기고 운동경기의 성격을 띠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우리민족을 일컬어 동이족(東夷族)이라 하여 東夷의 夷는 ‘大’와 ‘弓’의 합성어로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이라는 뜻인바, 이는 우리 민족의 弓術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불려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에게는 활은 가장 중요한 무기였으며 궁도(弓道)는 가장 대중화된 무예였다.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誌東夷傳)에 보면 “부여(夫餘)는 궁시(弓矢)와 도(刀)와 모(矛)로서 병기를 삼으니 집집마다 기장(갑옷과 무기)이 있었다.”라 하였으며, “예(濊)는 모(矛)를 만드니 길이가 삼장(三丈)이라 이것을 여러 사람이 함께 들고 보전(步戰)에 사용하였으며 낙랑단궁(樂浪檀弓)이 이곳에서 나온다”라고 하였으며, 위지진한전(魏志辰韓傳)에는 “진한(辰韓)은 국명(國名)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을 호(弧)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삼국이전(三國以前)의 고조선에 예속되었던 부여, 옥저, 예와 이들 세력과 대립한 삼한(三韓 : 馬韓, 弁韓, 辰韓)에서 궁시(弓矢)의 사용이 활발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단궁(檀弓)은 고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한국 목궁(木弓)의 시초라 볼 수 있으며 그 재료는 박달나무이나 점차 전해내려 오면서 산뽕나무와 산비나무(애기찌나무)가 대신 쓰였다.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인은 경당을 만들어 미혼의 자제를 함께 거처하게 하면서 경(經)을 읽고 활 쏘는 연습을 하게 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는 부여의 풍속을 따라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夢)이라 하고 국민교육에 경서(經書)의 학습과 동등하게 궁술(弓術)의 연마를 중요시 하여 모든 국민에게 사풍(射風)을 보급시켰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비류왕(比流王) 17년(320년) 가을에 궁서(宮西)에 사대(射臺)를 세우고 매월 삭망(朔望:초하루 보름)에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나 고이왕(古爾王)이 서문(西門)에 나와 활쏘는 것을 살펴보았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백제도 궁도에 주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서(隨書)에 “신라에서는 8월 15일에 음악을 연주하고 관인으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말과 베로서 포상하였다”라는 기록과 그 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등의 기록으로 보아 신라가 궁전(弓箭)으로 인재를 등용하였고 이미 벼슬길에 오른 자일지라도 활 쏘는 재주를 시험하였음을 볼 때 신라에서도 궁도가 자연적으로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상무(尙武)를 숭상해 왕이 친히 나와 재경장교(在京將校)의 사어(射御)를 살펴보거나 양경(兩京:평양과 개경)의 무관을 소집하여 사예(射藝)를 익히게 하였으며 활을 배우고자 하는 일반인들을 위해서 사장(射場), 즉 활터를 만들어 활쏘기를 장려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무과(武科)를 실시하였으며, 무(武)를 장려하고 활 쏘는 것을 권장함에 힘썼음을 엿볼 수 있다. 태종 8년부터 처음 시행한 무과의 선발과목에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유엽전(柳葉箭 : 120보의 표적에 8돈 화살을 쏘게 한 무기), 기사(騎射 : 5개의 표적을 각각 50보 거리에 세워 놓고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게 한 것)등 궁도(弓道)를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한국의 궁도, 특히 조선의 궁술은 국가방위의 중요수단이라는 그 자체 성격 때문에 관(官)의 주도아래 과거제도(科擧制道)를 통해 발전해 왔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이 스포츠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은 한일합방 이후이며 일본은 완전한 식민지를 구축하기 위해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를 말살 시키려 했고 그 결과 수천 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 내려 온 궁도는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우리 전통무예인 궁도의 맥을 잇기 위한 몇몇 뜻있는 인사들의 노력에 의해 조선궁술연구회(朝鮮弓術硏究會)를 만들게 되었다. 1922년 7월 11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 산1번지의 황학정(黃鶴亭)에서 발기인 35인이 모여 조선궁술연구회를 창립했으며, 1926년 5월 20일에는 조선궁도회(朝鮮弓道會)로 개칭하였다.


  일제치하에서 명맥만을 겨우 유지해 온 조선궁도회는 1946년 2월 10일 조선궁도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다시 그해 8월 25일 대한궁도협회(大韓弓道協會)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대한체육회가 발족하면서(1954년 8월 25일) 그 가맹단체로 가입하였다.

 

  1962년에는 우리의 민속궁(民俗弓)이 아닌 양궁(洋弓)을 도입하여 각급 학교에 보급시키는 한편 국제궁도연맹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였으며(1963. 7. 27) 이 양궁은 세계 선수권대회와 올림픽대회에 출전하여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어 세계 양궁 강국으로서의 기틀을 만들었다.

 

  1983년 3월에는 양궁분야를 대한양궁협회로 분리시켰으며 우리 전래의 궁도만을 전담하게 된 대한궁도협회에는 1992년 8월 현재 15개의 시도지부와 아르헨티나에 1개의 해외지부를 두고 있으며 그 산하에 있는 250여개의 사정(射亭)에서 9천여 명의 궁도인이 우리의 전통무예인 활을 쏘면서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있다.


  대구의 궁도 현황

 

  대구는 분지로서 금호강과 신천이 도심을 흐르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출토된 무문토기로 보아 최소한 3,000년 전에는 큰 취락지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후 1세기경 형성된 ‘遠句火’ 또는 ‘達句伐’ 부족국가는 이러한 집단취락의 확장을 통해 이루어진 듯하다. 대구라는 이름은 이 지역이 신라로 복속되면서 757년에 개칭된 것이다.

 

  1601년에 낙동강을 경계로 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가 합쳐지면서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행정, 산업, 군사를 통괄하는 관찰사가 상주하는 경상감영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활의 사용과 더불어 활터(射亭)도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과문한 탓으로 활터와 射員의 현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元老  弓士를 찿아 구술(口述)로 듣고 백방으로 관련 자료를 찾아 금세기의 대구의 궁도현황(弓道現況)의 대강을 살펴본다.


  먼저 궁사들의 주무대인 射亭의 위치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단기 4286(서기1953년) 경북체육회에서 발행한 “慶北體育” 창간호(丁海文氏 所藏 : 前 觀德亭 射頭)의 弓道편(180-182쪽, 경상궁도연맹 총무 石在玉 집필)에 대구의 관덕정(觀德亭)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大邱의 觀德亭을 回顧컨대 鍊武場을 第一次로 龍頭防川에서 볼 수 있었고 第二次로 大明洞 相子澄에서 운동을 繼續 하든바 故 徐昌圭氏의 發起로서 自己所有인 靈仙池畔基地를 射亭으로 建築케 한바  甲戌年 四月 十六日에 竣工되어 只今까지 鍊武場으로 使用되고 있다.>

 

  이 기록으로는 사정이 용두방천에서 대명동 相子澄으로 옮겼다가 지금부터 60년전(1934년 4월 16일)에 영선못에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원로 궁도인인 黃一龍(전 경북궁도협회 회장)씨의 구술을 종합해 보면 영선못으로 가기 전에 염매시장 앞(현 동아쇼핑자리)에 射臺를 두고 적십자병원 뒤에 있는 천주교 순교기념관인 觀德亭자리에 과녁을 둔 射亭이 있었다고 증언을 하고 있으며 현재의 그 위치에 지은 건물의 이름을 觀德亭으로 한 것으로 보아(천주교 순교기념관측에 의하면 과거에 이 자리에 있던 연병장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함) 이 증언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염매시장으로 옮기기 전에는 동인동 승마장(현시청사 북편)에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영선 못으로 옮기기 전의 射亭의 위치는 故人이 되신 石在玉씨의 기록과 생존해 있는 黃一龍씨의 증언의 차이는 앞으로 확인해 봐야할 과제이다.

 

  6.25로 인한 피난민과 인구증가로 영선못 부근에 인가가 들어서자 射亭을 봉덕동 고산골에 있는 徐昌圭씨 재실 옆으로 옮겨 亭도 없이 활을 쏘다가, 1955년경에 달성공원으로 옮겼다.  달성공원내의 위치는 현재의 관풍루(觀風樓) 서편에 있는 연못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사대(射臺)를 두고 서편에 과녁을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 궁사(黃某氏)의 失射로 인해 시동(관덕정 관리인 張氏의 딸로서 당시 11~12세)이 死亡하는 사고로 3년여 만에 다시 팔달교로 옮겼다. 팔달교에 인접한 하류좌안에 있는 배추밭 3000여평을 매입하여 亭을 다시 짓고 운동을 하다가 제43회 전국체전을 준비하기 위해서 1962년에 범어동에 있는 시민공원(수성구 만촌동 416-6번지. 亭으로 쓰던 건물을 현재 가정집으로 사용하고 있음)으로 옮겼다. 팔달교의 부지 매각 대금과 도의 지원으로 3000여평을 매입하여 亭을 짓고 전국체전을 치루었으나, 이 지역이 구획정리사업으로 개발되면서 옮겨야 할 처지에 이르렀을 때, 제56회 전국체육대회를 대구에서 개최하게 되어 현재의 앞산공원으로 이전하였다.(현 팔공정  射頭인 朴元準씨와 黃一龍씨 증언)

 

  관덕정(觀德亭)은 남구 대명동 산304-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지면적 2,631평 건축면적 75.29평의 2층 건물로서 1975년 8월 12일에 준공하였다.

 

  궁도인구의 증가와 제72회 전국체전 경기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새로운 궁도장을 범어공원 내에 건립하여 팔공정(八公亭)이란 현판을 달고 개정(開亭)하였다. 八公亭은 수성구 범어동 산175번지에 위치하고 1,778평의 부지에 74.92평의 2층 건물로서 1992년 6월 26일에 준공하였으며, 대구직할시 궁도협회 사무실이 2층에 입주하였다.


  영선못 시대의 弓道人은 “慶北體育” 창간호에 <俊工當時는 全會員이 三十餘名에 達한바 其後 移去 或은 死亡으로 現在 會員은 十人以內이다. 六.二五前에 新加入 靑年會員 五,六人이 熱心히 運動하던중 六.二五亂으로 中止되고 其亦是 分散되었다. 聯盟委員長 許혼氏의 熱意로써 五,六人이 閑暇를 利用하여 心身鍛鍊을 繼承中임으로 前途의 新氣運을 觀視할 수 있다>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지방유지 30여명이 전통무예의 脈을 이어 오다가 6.25동란으로 흩어지고 許혼(영생병원 원장. 경상북도 보건과장으로 재직 중 궁도에 입문하여 연맹위원장 역임), 石在玉, 하재룡(금성연탄 사장), 吳大興(염매시장 포목상회, 현 팔공정 사원인 오종환씨의 三從祖父), 黃一龍씨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黃一龍씨는 1951년 10월에 입문하여 협회 창설의 일익을 담당하고 초대 사무국장, 협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52년부터 경북대표선수로서 활약하였으며 항상 1번 선수로 출전하여 初矢를 貫中시켜 팀의 사기를 높이기로 이름난 선수였다고 한다. 1983년까지 활동하다가 身病으로 은퇴한 후 게이트볼에 심취하여 지금도 80세의 老人답지 않은 건강한 모습으로 중구 게이트볼협의회 회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朴元準, 黃一龍씨 증언)


  국궁이 전국체전 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1954년에 개최된 제35회 대회부터이며(전국체육대회경기기록집 : 대한체육회 발간), 경북선수가 等內記錄으로 나타나는 것은 제40회 대회에서 여일반 궁도자유참가종목에서 1위 박춘당(6/15), 2위 조귀례(4/15)(위 기록집 139쪽)이며, 1962년 대구에서 개최된 제43회대회에 출전한 향토선수는 감독 황일룡, 주장 신덕기, 남자선수 강주필 김규호 안봉준 신덕기 권세철 이호우, 여자선수 박춘연 박춘당 박숙희 왕은수 등이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현재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궁도인은 관덕정에 70여명, 팔공정에 50여명의 회원이 등록을 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과 비교해보면 경기도의 53개정 경남의 52개정에 비할 바 못될 뿐 아니라 서울의 11개정, 부산의 다섯 개정, 인천의 여덟 개정, 광주 대전에 각각 세 개정과 비교해도 궁도인구가 적은 것을 알 수 있으며, 경상북도 지역도 16개정에 불과해 다른 도와 비교해 궁도인구가 적은 것으로 짐작된다. 대구 경북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궁도인구가 적은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관심을 가져 볼만한 일이라 생각된다.


  맺는 말

 

  궁술이 우리에게 운동으로서 어떤 효과가 있는가를 살펴보면 “弓術이 運動으로서 人體에 주는 影響은 腦筋을 發達케하며 肺와 心臟을 强化케하는 것인바 우리에게 持久力을 주고 나아가서는 筋의 發達과 특히 全體의 運動을 현저히 한다. 吸氣排氣를 통해 肺活量을 크게 함으로서 血色의 淸新을 기할 수 있다. 또한 情神的 統一에는 무엇보다도 弓術이 第一이라 할 수 있다. 孟子는 精神的 修鍊과 함께 具體의 修鍊도 主張하고 養氣의 必要도 論述하였다. “養氣라함은 身體的 修鍊으로 부터 精神的 鍊鍊에 到達한다는 말이다”라고 石在玉씨가 “慶北體育”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신체적 단련은 물론 정신통일에도 큰 효과가 있다.


   우리 선조들이 열심히 익혀 심신을 단련하고 외적을 막아 민족과 국가를 보위한 국궁은 우리 전통의 무예이며, 오늘에 와서는 정신을 집중시키는 全身運動으로서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생활스포츠라고 생각되어 회원들에게 권유하고 싶다.


  *궁도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참고가 될까하여 대구의 궁도 현황 편에서 자료의 인용 출처, 증언자를 밝혀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료수집과 증언에 협조해 주신 丁海文 선생님, 朴元準 射頭님, 黃一龍 회장님에게 감사드립니다.


                                                        1994년 1월


                                                 大邱廣域市 文化體育擔當官 鄭 時 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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