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수상기

개구멍 덕분에

是夢 2006. 8. 30. 17:46
 

개구멍 덕분에


우리가 경북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룬 가교사 자리는 형무소 소유 배추밭이었는데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곳에 개구멍이 많았지.


나는 그때 달성국민학교 뒤에 살았는데 입학시험 치러 가던 첫날은 처음 가는 길이라 형님이 데려다 줘서 잘 갔다. 다음 날에는 혼자서 갈 수 있다고 아침 일찍 먹고 달성공원 앞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마침 어제 탔던 시영버스가 오기에 그 버스에 탔다. 버스도 같고 차장(그 후 안내양이라고 호칭이 바뀌었다)도 같았는데, 그런데 이 버스가 동인 로타리를 지난 후 수성교로 가지 않고 동촌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시골서 국민 학교 입학 전에 처음으로 대구에 왔다가 길을 잃어 버려 하루 종일 헤매다가 운 좋게 나를 찾아다니시던 외삼촌을 만나 고아신세를 면한 얼뜨기인데다가, 중앙통 동쪽은 6.25때 피난 간다고 수성다리를 건넜다가 되돌아간 기억밖에 나지 않는 미지의 세계였으니----


차장에게 왜 수성교로 가지 않느냐고 물으니 이 차는 동촌 간다고 한다. 어제는 수성교 가지 않았느냐고 항변을 하니 오늘은 배차가 동촌으로 되었기 때문이란다. 아차! 같은 버스라도 날마다 노선이 바뀌는 것을 몰랐던 것이 실수였다.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듯 불상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다가 세워준 곳이 대구공고 앞이었다.

 

철렁하는 가슴을 안고 버스를 내려 수성교를 물으니 왔던 길로 되돌아가란다. 다시 버스 탈 것은 생각도 못하고 조급한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시골서 자란 탓으로 몸이 튼튼한데다가 2년간 달성국민학교에서 남산국민학교까지 걸어 다닌 덕분에 지칠 줄 모르고 달렸다.

 

물어물어 삼덕 로타리에서 대구상고 뒷담을 돌아가니 철조망 너머로 수험생들이 줄을 서서 모여 있었다. 나는 급하게 철조망 개구멍을 찾아 들어가니 모두 교실로 시험 치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겨우 내 자리를 찾아들어가니 땀과 눈물 콧물이 범벅이다.

 

그 때 수성교로 돌아 정문으로 갔더라면 시험도 못 쳐보고 닭 쫒던 개처럼 될 뻔했는데, 그랬다면 사이 사랑방 대감들도 못 만났을 것 아닌가?

개구멍덕분에 이렇게 여러 대감들과 옛날 그 옛날이야기를, 그것도 가슴에 영원히 묻어둘 뻔한 나만의 이야기를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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