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글***/수상기

'느림'을 즐긴 남도여행

是夢 2010. 2. 12. 23:21

'느림'을 즐긴 남도여행

 

*지난 1월 25일~29일 여덟명의 노익장들이 모여 50년을 되도린 여행을 하고 돌아와 기고한 글이

주간매일에 게재되었기에 그 영광을 함게 나누고자 올립니다.

 

테마여행

                느림을 즐긴 남도여행

 

대구->부산->제주 올례길->추자도->완도->목포->대구

 

‘빨리빨리’ 탈출

걸음걸음 ‘여유’를 딛는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슬로우 시티(Slow City)인 오르비에토(Orvieto)를 작년에 방문한 적이 있다. 이 작은 도시는 바티칸에 위기가 닥치면 교황이 피난하기 위해서 절벽 위에 세워진 곳이다. 케이블카로 올라가 대성당까지는 걷거나 셔틀 버스를 타야 겨우 갈 수 있다. 대성당까지 걷는 동안 자가용은 한 대도 보이지 않았고 주민들은 자전거를 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모든 생활에서 빠름과 경쟁보다는 삶의 리듬을 반 박자쯤 늦추는 듯 했다.

 

부산-제주-추자도-목포 4박5일

이번 남도여행은 오르비에토가 보여준 슬로우 시티 운동처럼 느림의 여행이었다. 우선 제주도엘 간다면 으레 비행기를 타던 관습에서 벗어났다. 새마을 열차와 밤배를 탔으며 올레 길을 걷다 지치면 버스를 타는 등 50년 전 학창시절에나 하던 여행을 그대로 반복했다.

부산서 오후 7시 밤배를 타기위해 5시간 전인 오후 3시에 동대구역을 출발했다. 부산역에서는 택시 대신 셔틀버스로 부두까지 가는 느림에 어깨의 배낭이 무거웠다. 그러나 이 무거움도 출항시간을 기다리는 사이시간에 자갈치 시장의 구수한 꼼장어 맛을 볼 수 있었으니 느림이 결코 손해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부산서 제주로 가는 배는 처음 제주도로 갔던 48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11시간이나 걸렸다. 세상은 모든 정보가 한 순간에 넘나드는 인터넷시대인데도 제주도 뱃길은 11시간의 전통을 지키고 있으니 나는 대학 2학년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느림은 여유를 동반해야 제 가치를 발휘한다. 느림에 여유가 없으면 낭패를 보기 마련이다. ‘새벽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늑장을 부리다 용두암의 아름다운 여명을 놓치고 말았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던가? 신지도에서는 해 뜨는 방향과 일출을 볼 수 있는 정보를 미리 얻어 꽤 괜찮은 일출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몇 척의 배가 파도에 일렁이는 포구에서 여명을 보고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려 제대로 셔터를 눌렀으니 분명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사전 준비와 여유, 그리고 기다림이 가져다 준 결과라고 생각하니 느림은 여유를 동반해야만 진가를 발휘하나 보다.

 

짜릿짜릿 뼈째 먹는 ‘자리돔’ 일품

이 느긋함은 먹을거리를 즐기는 것에서도 철저하게 지켜졌다. 우리는 렌터카 기사의 유혹에 가까운 안내와 훈수를 뿌리치고 최고의 맛 집만 찾아다녔다. 서귀포 오목동에 있는 자리 돔 전문집인 어진이네횟집은 40년간 제주도에서 관광안내를 했다는 운전기사도 미처 모르는 숨어 있는 명품집이었다.

자리 돔의 지느러미와 꼬리까지 살린 강회의 뼈와 함께 씹히는 쫄깃쫄깃한 살점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구이, 물회, 무침 등 어느 것 하나 수준에 미달되는 것은 없었다. 자리 돔 요리로, 반주를 곁들인 오찬은 별미중의 별미니 숨겨두고 소중한 사람들과 즐기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

완도에서 굳이 목포까지 3시간 버스를 타고 간 까닭은 제철인 민어회의 맛을 봐야한다는 일념 때문이다. 여행 중 가장 비싼 요리였지만 영란횟집의 민어회는 우리들의 미각을 만족시킬 만 했다.

 

시장에서 마련한 장거리로 특유의 맛

5일간의 여행 중에 몇 끼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끼니는 대부분 시장에서 마련한 장거리로 스스로 해결해 비용을 줄이면서 그 지방 특유의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요리솜씨를 뽐내는 주방장, 어느 스님이 사용하던 골동품 수준의 ‘발우’를 가져와 각종 술로 칵텔을 만들어 돌리는 바텐더, 분리수거에 열을 올리는 녹색주의자, 부족한 재료들을 사다 나르는 심부름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젖은 손으로 설거지를 자청하는 가정부가 있는가 하면 무슨 일이던 트집을 잡고 핀잔을 주어 좌중을 웃기는 재담꾼, 칠순을 바라보는 여덟 명의 노익장들이 만들어내는 느림의 맛 여행이었다.

제주의 방어 회, 추자도의 참조기 탕, 완도의 홍돔과 상어 회를 비롯하여 생선회를 뜨고 남은 대가리와 뼈로 끓인 찌개 맛도 좀처럼 잊어 질것 같지 않다.

이번 여행의 백미는 역시 저녁마다 ‘발우’를 중심에 앉힌 술자리다. 다양한 삶을 살아온 경험담을 익살스럽게 나누는 이야기와 다음 여행지를 정하면서 때와 장소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분위기는 70여년을 살아온 성숙함이 깃든 인생의 향기가 있어 정말 좋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앞만 보고 너무 ‘빨리 빨리’ 달려왔다. 이젠 한가롭게 아름다운 조국산천을 거닐면서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때론 권태와 나태도 즐겨야 할 것 같다. 이번 남도여행은 무한 속도경쟁의 디지털 시대에서 여유로운 아날로그적 삶을 추구하는 그런 여생을 살아가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그런 소중한 기회였다.

 

정시식<수필가 sisik@hanamil.net>

 주간매일(제1379호 2010.2.11(목)

 

 제주 ‘말미오름’에서 바라본 성산포 일출봉.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하늘의 구름이 마치 여름의 뭉개구름이 시원스럽다.

 

 풍랑이 심해서 출어를 못하고 추자항에 정박하고 있는 어선들.

 

해를 맞이하는 고기잡이배와 작업 선박. 하늘과 바다가 물들어 있다.

 

제주 올레 1코스를 걸으면서 제주의 이색적인 풍광인

묘지의 울타리에서 잠시 쉬는 일행

 

말린 가오리가 영처럼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처연한 모습

 

 

동네 담벼락에 말리는 마재기

 

제주의 한 횟집이 자랑하는 요리.

왼쪽부터 자리돔 구이, 자리돔 강회, 자리돔 무침

 

'***송연 글*** > 수상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42년간의 긴 여정을 마치고  (0) 2007.03.19
40년만의 만남  (0) 2006.11.14
청우 30주년을 보내면서  (0) 2006.10.12
꽃샘추위 유감  (0) 2006.09.26
자연을 사랑한 유년시절의 친구  (0) 2006.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