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기 800년, 부산의 정문도공 배롱나무
사정없이 내려쬐는 뜨거운 여름 햇살을 살살 구슬려서 꽃을 만들어내는 나무가 있다. 초록 세상에다 꽃으 로 오뚝 선 배롱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도종환 시인의 ‘백일홍’을 읽어본다.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시인의 관찰력은 정확하다. 꽃 하나하나가 이어 달리기로 피기 때문에 백일을 피는 꽃으로 착각한 다. 멀리 중국에서 시집 온 탓에 그네들 이름은 자미화(紫微花), 당나라 때 자미성에 많이 심어서 이런 이 름이 생겼다 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를 비롯하여 충신 성삼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비들이 사랑한 꽃 나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는 부산에 있다. 부산 1호선 전철을 타고 양정역에 내려 ’화지공원‘을 찾아가면 된다. 공원 안쪽 동래 정씨 시조 묘에서 배롱나무와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약 8백년 전인 고려 중 엽 때 안일호장(安逸戶長)이란 벼슬을 지낸 정문도공(鄭文道公)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그는 동래정씨의 2 대조(祖)이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처음 묘를 썼을 때 매일 밤 도깨비가 나타나 파헤쳐 버렸다한다. 숨어서 살펴보았더니 ’임금 님의 황금 관이나 묻을 장소‘라고 저희들끼리 중얼대는 것이었다. 이에 보릿짚으로 관을 둘러싸 황금 관으 로 위장하여, 어수룩한 도깨비 눈을 속이고 나서야 겨우 묘를 쓸 수가 있었다. 이후 동래정씨 가문에는 출 세한 후손들이 많아 명당임이 널리 알려졌다. 오늘의 눈으로 보아도 여기가 ’명당’임에는 틀림없다. 부산시 가 팽창하면서 이 일대는 거의 시내 가운데가 되어 버렸으니 후손들에게 안겨준 부는 엄청나다. 요즈음이 야 이런 명당은 부동산 투기꾼들이 모두 차지하여, 도깨비가 알려 줄만한 ‘알짜 정보’는 아예 없어져 버렸 다. |
천연기념물 배롱나무는 묘소 앞 동서쪽에다 각 각 한 그루 씩를 심는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한다. 이렇게 꽃 이 오랫동안 피는 나무를 심은 뜻은, 조상의 유훈을 오래 기리라는 것으로 생각하여 후손들은 정성들여 나 무를 가꾸고 있다. 으스스한 산소에서 무서움증 때문에 혹시라도 지킴이 임무를 소홀히 할까봐, 둘을 심어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라는 배려도 돋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오랜 세월 지내오면서 원줄기는 죽어버리고 그 주변에 돋아난 싹이 자라 동쪽에 4그루, 서쪽에 3그루씩 작은 숲처럼 모여 있다. 이제는 일주일에 한번 씩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도 괜찮게 생겼다.
안내 입간판에는 원래 심은 나무가 속이 썩어버리고 껍질 부분이 세로로 갈라져 지금처럼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나무의 생리로 보아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무는 한 뼘 조금 넘는 것이 가장 굵으며 아래 서부터 가지가 돋아나 작은 숲을 이룬다. 배롱나무로서는 유일하게 천연기념물의 반열에 올랐다. 묘소를 만들 때 심었다고 보아 나이는 8백년이나, 새순이 돋아난 지금의 나무나이는 알 수 없다. 줄기의 표면은 연 한 붉은 끼가 들어간 갈색이고 얇은 조각으로 떨어지면서 흰 얼룩무늬가 생겨 반질반질해 보인다. 이런 특 별한 나무껍질을 두고 일본사람들은 원숭이 미끄럼나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이름은 간지럼나무 다.
기록으로 배롱나무가 등장하는 것은 고려중기의 문신 최자가 지은 보한집이니, 대체로 이 시대 때쯤부터 배롱나무 심기를 즐겨한 듯하다. 그러나 배롱나무는 자랄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에 ‘서울 의 벼슬아치 집안에 이 꽃이 여럿 보이더니 근래 대부분 얼어 죽었다’고 하였다. 원래 고향이 중국 남부라 추위를 싫어한 탓이다. 오늘 날 이름난 배롱나무 자람 터로는 광주 명옥헌, 강진 백련사, 경주 서출지 등 주 로 남쪽에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