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지와 경정 주일재
정영방이 광해군 5년(1613)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연못과 정자이다. 자양산의 남쪽 완만한 기슭에 위치한 연못을 중심으로 경정·주일재·수직사·남문 등의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경정은 넓은 대청과 방 2개로 되어있는 큰 정자이며, 주일재는 ‘운서헌’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 서재이다.
주일재 앞에는 연못쪽으로 돌출한 석단인 사우단을 만들고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를 심었다.
연못은 사우단을 감싸는 U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연못의 동북쪽 귀퉁이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만들었고, 반대편의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을 만들었다.
각양각색의 형태로 솟아있는 연못 안의 크고 작은 돌을 서석군이라 하는데, 이 연못의 이름은 서석군에서 유래하였다. 돌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이 있어 정영방 선생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거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 보충설명
광해(光海)ㅡ 인조(仁祖) 연간에 진사로서 은거하던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1577ㅡ1650년)의 별서(別墅)이다.
영방의 우(宇)는 경보(慶輔), 호(號)는 석문(石門), 본(本)은 동래(東萊)이며 진사 원충(元忠)의 손자인데 계종조(季從祖) 원건(元健)의 아들 조에게로 입양(入養)되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수학(修學)하여 성리를 탐구하고 또 선시(善詩)하였는데 당체(唐體)를 얻었으며 우복의 칭상(稱賞)을 들었다고 한다. 선조(宣祖)38년(1605),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이 즉위후 실정을 거듭하므로 벼슬을 단념하고 낙남(落南), 이곳(진성(眞城) 임천동(臨川洞))에서 학문연구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의 묘소는 안동 임하면 송천동(지금 안동시 송천동) 선영(先瑩)에 있으며 또 예천군 용궁면 마산리사(馬山里社)에도 제향 되고 있다 한다.
이 별서(別墅)는 그가 36세시인 광해군 5년(1613)에 축조하였다고 하며 인조반정시(仁祖反正時)에는 추능영의정(追贈領議政) 약봉(藥峰) 서성(徐성)이 광해 5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유배중 이곳에서 풀려났었다고 한다. 이 별서(別墅)는 배산인 자양산(紫陽山) 남록(南麓) 완만한 기슭에 자리 잡았으며 연못을 중심으로 경정(敬亭), 주일재(主一齋)(운루헌(雲樓軒)), 수직사(守直舍) 남문과 담장이 에워싸고 있는 작은 향원(鄕園)이나 주위 산천이 모두 청수(淸秀)하다는 호조건을 갖추고 있다.
연못의 사벽(四壁)은 막돌 석축이며 북변에는 지중으로 돌출한 방형소석단(方形小石壇)을 내 쌓아 단을 이룩해서 4우단(四友壇)이라 이름지었다. 단의 뒤편으로 물려서 3간(間)맞배집을 지어 주일재라 호하였는데 이 집은 온돌이 2간, 마루가 1간의 홑처마 맞배집이다. 마루에는 “운루헌(雲樓軒)”편액(扁額)이 걸려 있으며 4우단에는 송죽매국(松竹梅菊)을 심었다고 한다. 서편 못가에는 4간대청과 2간의 온돌방이 있는 경정을 두었고 경정의 뒤편에는 수직사 2동을 부설해서 연당(蓮塘)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사우단이 중심부에 돌출하였으므로 연못의 전체 모양은 ㄷ자형이 되었다. 못의 동북 귀퉁이에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 읍청거를 내었고 그 대각 귀퉁이인 서남우(西南隅)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 토예구(吐濊口)를 마련하였다. 못의 이름은 지중의 암반인 서석군(瑞石群)에 유래한다. 서석군은 주로 동북편에 많고 수면에 그 기괴한 형상을 드러내거나 얇게 잠겨 있어 각기 그 특이한 형상에 따라 명명(命名)되어 희귀한 수석경(水石景)을 이루고 있다. 돌빛은 대개 흰편이어서 수중석(水中石)이라도 선명(鮮明)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서석군이 집중되어 있는 동편 지제는 영귀제(詠歸堤)라 부른다. 서석들의 명호(名號)는 19종에 이르는데 서편 경정하(敬亭下)의 열석(列石)들을 옥성대(玉成臺), 그 북쪽의 삼석(三石)이 상경석(尙絅石), 그 동하(東下)에 낙성석(落星石), 사우단(四友壇) 앞이 조(調)(조(照))천촉(天燭)이다. 동편수중(東便水中)에 집중되어 있는 서석들은 수륜석(垂綸石), 어상석(魚狀石), 관란석(觀瀾石), 화예석(化蘂石), 상운석(祥雲石), 봉운석(封雲石), 난가암(爛可岩), 통진교(通眞橋), 분수석(分水錫), 와룡암(臥龍岩), 탁영석(濯纓石), 기평석(棋坪石), 선유석(僊遊石), 쇄설강희절암(灑雪강戱절암)등의 이름을 지녔다. 이 서석군과 정사를 포함하는 경정잡영삼십이절(敬亭雜詠三十二絶)과 주위산천에 의탁(依托)한 임천잡영십육절(臨川雜詠十六絶)은 석문(石門)이 이곳에서 추출해낸 자연과 사상과 은둔생활을 읊은 시라 하겠으며 연당·서석지(瑞石池)와 주변산천 경개(景槪)의 정수(精隨)를 굴절 없이 노래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 서석지 에는 광해5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連累)되었던 판서 서성 호 약봉(藥峰), 추증영의정(追贈領儀政), 시호(諡號) 충숙(忠肅)이 부근에 유배되어 인조반정(仁祖反政)을 맞기까지 10여년간 자주 내왕하며 석문과 연유(連遊)하였으므로 착지축실초(鑿池築室初)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을런지 추측해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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