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과 대구사랑
鄭 時 植 (大邱市 西區 副區廳長)
대구가 직할시가 되면서 가장 큰 수확중의 하나가 팔공산이 시역(市域)에 편입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라시대부터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을 두어 온 국민의 화합을 도모하는 숭산 이었으며, 6.25사변으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팔공산은 공산세력을 몰아내는 방패막이가 되어 자유를 수호한 영산이었다. 신라의 불교가 팔공산을 거쳐 경주로 전래되었으며 부계의 석굴암과 갓 바위 부처님 등 곳곳마다 모셔진 불상은 불교의 성지였음을 알 수 있으며 지금도 조개종단에서 한 개의 산에 두개의 교구 본산(제9교구 : 동화사, 제10교구 : 은해사)을 두고 있는 유일한 성산이란 것을 입증하고 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김유신 장군이 이곳 중암암의 장군바위에서 수련을 하였으며, 팔공산 자락 압량 태생인 원효 대사가 불굴암에서 득도하여 대중 불교로 승화 시켰으며,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居祖寺(은해사 거조암)에서 그 당시 불교를 개혁하는 권수정해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천하에 발표하여 흐트러진 불교를 바로 잡았다. 이러한 민족의 영산을 대구가 맞아들인 것은 우리 대구시민의 큰 자랑이라고 생각한다.
팔공산은 신라 때부터 公山으로 불리었으며 국가의 공식제사를 지낸 국가의 산, 또는 국립공원의 山이란 뜻이 담겨있다고 보여 진다. 新羅 五岳(中岳:팔공산, 東岳:토함산, 西岳:계룡산, 南岳:지리산, 北岳:태백산,)중의 하나로서 신라의 중심에 있다고 中岳이라 하였으며, 산중에서 가장 으뜸이 된다고 하여 아버지 산이라는 父岳으로도 불렀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이후부터는 八公山이라 불리고 있는데 ‘八’자가 접두어로 들어간 연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진표 스님이 미륵불로부터 얻었다는 八簡子를 동화사에 봉안했다 하여 八簡子의 ‘八’자를 공산 앞에 덧붙였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팔공산이 여덟 고을에 걸쳐있어(八公山盤據八邑之地) 그렇게 불리고 있다는 설도 있고, 고려 태조 왕건이 포석정에서 신라 경애왕를 살해하고 회군하는 후백제 견훤을 응징하려다가 오히려 대패하여 신숭겸을 비롯한 여덟 장수를 잃었다하여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八’자를 더하였다는 설도 있다. 혹자는 중국에 있는 八公山을 모방했다는 모화사상에 연유했다는 주장도 있다.
八公山이란 이름은 조선조 중종26년(1531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처음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公山은 八公山이라 일컫는데 해안현에서 북으로 17리에 있다. 신라 때 父岳이라 일컫고 中岳으로 祭를 올렸다(公山 惑稱 八公山 在解顔縣北十七里 新羅稱父岳 疑中岳爲中祀)’라고 되어 있다.
이렇듯 팔공산에 대한 이름의 유래가 구구하지만 팔공산으로 정착 된지 어언 400여 년이 넘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팔공산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대구에서 바라보는 팔공산은 동서로 길게 뻗어 병풍처럼 대구 분지를 감싸고 있으며 중앙부에는 삼존불처럼 세 개의 봉우리가 정답게 우뚝 솟아 팔공산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개의 봉우리를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主峰, 東峰, 西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것이 바른 이름이라고 알고 있다. 팔공산과 같은 명산에 멋진 제 이름을 두고도 제일 높은 주된 봉우리라고 主峰이라 하고 主峰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니 東峰이라 부르고 서쪽에 있는 봉우리라고 西峰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고유의 이름이 아니라 봉우리가 앉은 위치를 밝히는 것에 불과한 보통명사로 격하하여 부르는 것은 민족의 영산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본래의 이름은 무엇인가? 제천단을 두었던 팔공산 최고봉은 무심봉(無心峰)이라 하였으며 일명 제왕봉(帝王峰), 불교가 들어온 뒤에는 비로봉(毘盧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無心峰은 높이 1,192m이며 무심봉의 白雲은 팔공산 십경중의 제1경으로서 지금 방송국 중계탑과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일반시민들이 접근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제천단을 비롯한 자연환경이 많이 파괴되어 팔공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비로봉의 동쪽에 자리 잡은 봉우리는 미타봉(彌陀峰)이라 하며 높이 1,155m로서 날씨가 맑을 때 망원경으로 보면 동해가 보인다고 한다. 彌陀峰의 日出은 팔공산 십경중 제7경에 들어간다. 비로봉의 서쪽에 솟아 있는 삼성봉(三聖峰)은 높이 1,041m로서 자락에 있는 삼성암에서 수도한 스님 세분이 성인이 되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미래지향적인 본래의 이름을 가진 팔공산 봉우리에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어느 산악회에서 東峰과 西峰이란 표석을 설치하여 팔공산을 오르는 모든 시민에게 본래의 이름을 잊어버리게 한 것을 曺海寧 현 총무처장관이 대구시장 재임 시 이를 바로 잡아 새로이 표석을 세워「彌陀峰」과 「三聖峰」이라는 제 이름을 찾아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시민들이 민족의 영산으로 받들고 사랑하는 팔공산의 상징인 세 봉우리의 제 이름인「無心峰(毘盧峰,帝王峰)」「彌陀峰」「三聖峰」을 찾아서 바르게 부르는 것이 지금 시민운동으로 펼치고 있는 대구사랑운동을 실천하는 하나의 덕목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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