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오르지 못하면 언제 오르랴!
---聞慶의 鎭山 주흘산 등정기---
鄭 時 植(대구광역시 서구 부구청장)
새벽 다섯시부터 잠이 깨어 뒤척거리다가, 과도한 수업과 학생들 진학지도에 지친 아내가 혹시나 깰까봐 살모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일요일이면 늦잠을 자는 게 상례이나 오늘따라 42산악회의 원행을 하는 날이라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간단한 운동을 한 뒤 반가부좌를 하고는 명상에 잠긴다.
일체 생명을 살리시는 부처님이시여!
이에 임하시와 충만 하소서!
나의 삶은 나의 삶이 아니라 천지를 일관하시는 부처님의 생명
나의 행함은 나의 행함이 아니라 천지를 일관하시는 부처님의 권능
천지간 부처님의 진리를 전하러 강림하신 광명의 천사여 수호하소서!
아침마다 하는 기도문을 외운다. 마음이 가라앉고 머리가 맑아진다. 숨을 천천히 들여 마시면서 우주의 「氣」를 빨아들이는 마음으로 단전으로 밀어 내린다. 10여 초간 호흡을 정지하였다가 아랫배의 숨을 천천히 토해낸 뒤 다시 10여 초 호흡을 중단하였다가 다시 숨을 들여 쉰다.
가뿐한 기분으로 산행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겼다. 어제 저녁에 준비하여 냉동실에 넣어둔 음료수를 점검했다. 尹正稷 원장에게 배운 물보다 빨리 피로가 회복되는 음료수를 처음 만든 것이다. 냉수대신 내가 산행을 할 때 즐겨 마시는 둥굴레 차에 꿀을 넣고 감 식초를 타서 냉동시킨 것이다. 아내는 행여나 솜씨에 빠질세라 정성 들여 만든 도시락이랑 과일을 챙겨준다. 준비물을 배낭에 챙겨 넣는데 權國鉉 회원의 전화가 와 함께 가잔다. 같은 아파트에 있는 張晋榮 회원과 부인 김순희 여사와 함께 차를 탔다.
앞산 주차장에는 많은 회원들이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반가운 악수를 나누고는 金容達 회원을 마지막으로 출발하여 효성타운 앞에서 김영순 여사가 종종 걸음으로 달려와 차에 오르니 서른여섯 명! 42산악회 장거리 산행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의 참석이다. 金東鎭회장의 입이 벌어져 다물 줄 모른다.
신천대로를 벗어나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중앙고속도로의 가산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기사가 아침을 먹는 동안 휴식을 하고는 상주 경유 공갈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는 문경으로 향했다. 점촌을 지나 불정에 이르니 연탄 전성기의 탄광촌의 모습은 사라지고 광부들의 사택이 헐린 자리에는 4차선 도로를 확장하는 중기의 굉음만이 쓸쓸하게 들린다. 내가 공정계장을 하던 때인 73년도에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불정역의 연탄은 볼 수 없고 텅텅 빈 마당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다. 연료파동으로 석탄품귀현상이 일어나 천대꾸러기이던 저급탄까지도 도시로 싹 실어내던 때에 양질의 고열탄맥이 발견되어, 향토 기업인 대성그룹이 도약의 발판이 된 불정탄광도 석탄산업의 사양과 더불어 노사문제의 파탄으로 문을 닫아 옛 영화의 자취는 사라지고 잔해만 남아있다.
진남교를 돌아드니 의연하게 솟은 주흘산
성능 좋은 관광버스가 문경 8경의 하나인 진남교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면서 돌아 들어가니, 마성들 저편에 우뚝 솟은 주흘산이 의연한 자태를 단숨에 들어낸다. 「主屹山」의 「屹」은 옥편을 찾아보니 ‘의연할 모양 흘’로 풀이되고 있듯이 그 이름다운 모습이 의연하다. 문경의 옛 지명인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은 문경지방의 고장말로는 「고깔산」이라고 한다. 주흘산이 마치 고깔과 같이 생긴데서 유래된 것이리라.
문경읍이 가까워질수록 산의 모습이 뚜렷해진다. 양반들이 쓰는 유건처럼 우뚝 솟은 산 덩어리에 여러 개의 봉우리가 각각 다른 모습으로 위엄을 뽑내면서 문경읍을 포근히 감싸 안고는 뒤로는 대미산(1,115m), 포암산(961.7m), 월항삼봉(847m), 부봉(914m), 마패봉(910m), 신선봉(968m), 조령산(1017m), 백화산(1,063m)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어, 주흘산은 흡사 장병들을 거느린 우두머리처럼 그 위세가 너무나 당당하다.
버스를 타고 들어서도 앞을 가로막는 위엄에 눌리는데, 옛날 나그네가 진남교 자리에 놓였을 징검다리를 건너 개나리봇짐을 메고 마성들로 타박타박 걸어 들어서면, 멀리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주흘산의 자태를 보고, 아름답고 웅장한 산이라고 감탄하기에 앞서 어떻게 저 산을 피해 험난한 백두대간을 넘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으리라. 주흘산 왼쪽 자락으로 파고들면, 조령산 남쪽으로 이우리재(548m, 이화령이라 부르는 지금의 이름보다 얼마나 운치가 있는 멋진 우리네 이름이냐!)를 넘게 되고 조령산과 주흘산의 한가운데 골짜기로 파고들면 새재(625m)를 넘게 된다.
朴正熙 대통령이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첫 부임지인 문경초등학교와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는 정문 앞의 하숙집을 찾지 못하고 문경읍을 우회하는 새로이 개설된 도로를 통과하여 주흘관(主屹關)앞에 마련한 널찍한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공민왕의 피란처였던 혜국사(惠國寺)
버스에서 내려 잘 포장된 아스팔트길을 따라 제1관문인 주흘관으로 가는 길 몫에 박물관을 신축하여 건물은 완공되었으나 아직 개관은 하지 않고 있었다. 金회장이 공원관리사무실에 들리는 수고로움으로 우리 일행들은 전원 무료입장하였다. 관문주변이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사적지의 관리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에 무료입장이 미안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공짜는 좋은지 모두들 관문을 들어서는 모습이 의기양양하다.
주흘산을 오르는 길은 몇 가닥 있으나 일반적으로 제1관문에서 혜국사를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를 택한다. 우리도 이 코스를 택하여 주흘관에서 바로 동으로 난 곡충골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완만한 계곡길이 제법 운치가 있어 자연스러운 행렬을 만들면서 몸을 풀기에 적당한 코스다. 발바닥에 열이 나면서 새재산장 위로 제법 가파른 오름 길을 오르다가 여궁폭포 앞에서 잠시 쉬는 동안, 호기심 많은 회원들은 50m정도 계곡에 비켜 있는 폭포를 다녀왔다.
김순희(장진영) 여사가 현기증을 느껴 길섶에 누워 호흡을 조절하고 있기에, 나는 아직도 얼음이 버석거리는 비방(?)의 피로회복제를 한 컵 마시게 하고는 비상약을 한 알 꺼내 복용시켰다. 이런 현상은 오래 동안 운동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심한 운동을 하면 심폐기능이 약해져 과도한 산소를 소모시키는 뇌에 산소를 충분하게 공급하지 못하여 머리가 아프고 현기증이 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휴식을 취하면 쉽게 회복이 되나, 심하면 무리한 등산은 포기하고 그늘에서 충분히 쉬는 것이 좋다고 경험으로 알고 있다. 피로회복제 덕분이었는지 쉽게 회복한 김여사는 나를 따돌리고는 훨씬 앞서 올라 가버렸다.
소나무와 활엽수가 터널을 이루는 숲길을 기분 좋게 오르다보니 4, 50분만에 혜국사에 도착했다. 해발 550m에 있는 혜국사는 신라의 보조국사가 신문왕 8년(848년) 초창할 때 법흥사(法興寺)라 했다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에 쫒겨 안동으로 피난 가는 길에 여기서 머무른 후부터 혜국사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서산대사, 영규대사가 이 절에서 힘을 모아 승병을 일으켰다고도 하며, 사명대사의 권고로 이 산에 조령산성을 쌓았다고도 한다. 아무튼 이 절은 그 이름에 맞게 외침을 받아 위기를 당할 때마다 국난을 극복하려는 사람들과 인연을 가진 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언제 오르랴!
혜국사가 보이는 계곡에서 왼쪽으로 가는 절 입구에서 발 빠른 일행들이 절 구경을 하고는 되내려오기에 고찰과의 만남은 포기하고 잠시 쉬었다가 오른쪽으로 붙어 정상을 향했다. 가파른 길을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權國鉉, 朴海相, 그리고 산악회에 처음 나온 李正吉(카톨릭병원 의무원장 李正吉이 아닌 예일 입시학원장)과 일행이 되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강타령을 하다 보니 뒤쳐진 金永秀, 禹洪基, 徐相龍을 잊어버리고 샘이 있는 대궐 터까지 올랐다. 자신의 건강을 항상 자랑하는 金容達원장이 전날 밤의 과음에는 못 이기는지 김영순 여사의 보호를 받으면서 우리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8부 가까운 능선에 이렇게 맑고 시원한 샘이 등산객의 목을 추겨주니 산의 한량없이 넓은 아량에 감사할 뿐이다. 우물 옆에 「주흘산 등산 백번에 이르니 그 아니 좋으랴!」 새긴 표석의 주인공이 주흘산을 100번 등정한 기념으로 우물을 깨끗하게 다듬은 듯 하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덕을 쌓았으니 극락왕생하리라.
지난번 지리산 천왕봉 등산 때 무리한 등정으로 상당기간 고생을 한 權國鉉 소장이 중도 포기하려는 의사를 내비치기에 나는 “이번에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언제 오르랴!”고 몰아치면서 권소장과 같은 심정인 나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하였다. 내려오는 사람의 40여분정도 남았다는 격려의 소리에 힘을 내어 마루턱에 오르니 가렸던 시야가 확 터졌다. 몰렸던 피로가 넓은 공간으로 달아나 버리고 상쾌한 기분이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하루야마 시게오’의 이론대로 뇌내 모르핀의 생성이 활발하여 마음이 즐겁고 피로가 풀리었나 보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옛날 주흘산을 오른 기억이 난다. 22년 전인 1974년 2월경이라고 생각된다. 그 당시 ‘산맥’이라는 등산구점에서 등산객을 모집하여 許대장이라는 분이 안내를 맡아 눈이 쌓인 주흘산을 안내하여 오늘 우리가 오르고 있는 코스를 오른 기억이 난다. 그때도, 젊었으나 눈길이어서 그런지 꽤 힘든 산행이라고 생각되었다. 정상에 올랐으나 안개구름으로 주변의 경관을 보지 못하고 제2관문으로 하산하여, 주흘산의 진수를 맛보지 못하고 언젠가는 다시 찾아야지 하는 아쉬움을 남긴 산행이었다. 그때 같이 간 일행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된 분도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1,075m 고지에서 벌어진 산상오찬
마지막 핏치를 올려 주능선에 오르니 마성들이 전개되고, 주흘산 자락에 쌓인 문경읍내가 정다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올라온 길을 되돌아보니 먼발치에 혜국사의 기와지붕 곡선이 녹색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고, 거인의 치마 자락처럼 길게 뻗은 산자락 끝에 주흘관의 성곽이 새재 골짜기를 가로막아 버틴 모습이 가물거린다.
아! 장하도다! 저 멀고도 가파른 길을 나도 해냈구나! 성취의 환희가 용솟음친다.
김장호(金長好)씨가 쓴 한국명산기(韓國名山記)의 표지에 쓰인 싯귀가 생각난다
멀수록 가까운 산
다가가면 더욱 멀어져 가는 산,
하냥다짐 그리워라
더듬듯 기어들면,
우리가 어머니라 부르는 조국의 품 안
그 갈매 빛 속고갱이.
산은 그래서
발로만 밝아서 오르는 것이 아니다
머리로 아니 가슴으로 헤쳐 올라야 한다.
*ꊓ하냥다짐 : 일이 잘 되지 아니할 때에는 목을 베어도 좋다는 다짐.
*ꊔ갈매 : 짙은 초록빛. 深綠
陣 實 회원부부가 먼저 와, 절벽을 타고 앉아 땀을 닦으면서 경이로운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한 모습이 30여 년을 같이 살아온 중늙은이의 정감이 넘치는 부부다운 모습이다.
아직도 정상과의 만남은 가파른 한 고비를 더 넘어야한다. 목표가 바로 눈앞에 보이니 힘이 솟구친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마루턱에 올라서니 「主屹山 1075m」표석이 빙그레 웃으면서 “그 무거운 몸으로 용케도 올라왔구나! 그 기상이 장하도다.”하면서 반갑게 맞이해 준다.
우리 회원들도 포기하지 않고 따라 올라온 내가 가상한지 박수를 치면서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고는 귀한 소주 한잔을 권하기에 숨을 고르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아! 그 짜릿한 맛! 모 국회의원이 외유 중에 호화 쇼핑으로 항간에 물의를 일으킨 ‘루이13세’라도 이 한 잔의 소주 맛을 따를 수 있으랴! 자가 제조한 피로회복제가 아직도 차가운 냉기를 가지고 있어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의 열기를 식혀주는 시원스러움도 주흘산 정상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이리라.
김영옥 여사가 권하는 산상의 물김치 맛도 땀 흘린 자만이 즐길 수 있는 특권인가 보다. 아내가 정성스럽게 싸준 현미밥은 마치 우리들의 사랑처럼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난다. 아침도 거른 데다 세시간여의 힘겨운 산행으로 심한 공복감을 느낀 탓이기도 하지만 둘러앉은 친구들의 정겨운 환담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스스럼없는 분위기, 그리고 한없이 싱그러운 공기와 창조주가 만든 멋진 풍경이 어떤 성찬보다도 훌륭한 오찬장을 만든 것이리라.
운동화 차림의 朴海相 회원이 뒤늦게 도착하였다. 힘든 정상을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도시락이 없으니 굶고는 하산 길에 허리가 접힐까봐 이를 악물고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李正吉 회원을 남겨두고 마지막 힘을 다해 정상에 합류했다. 도시락 없는 덕분에 멋진 오찬 장에 참석을 한 것이다. 김순희 여사가 도시락을 남겨두었다가 건너 주는 눈빛이 남이 아닌 듯 하다.
물봉선과 흰진범이 가을산을 수놓고
「산은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한 현직 대통령의 재야시절에 한 말처럼 우리도 산상의 성찬을 끝내고 내려갈 준비를 하였다. 뒷자리의 흔적을 말끔히 정리하여 가져온 것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배낭에 넣는 철저한 ‘쓰레기 되가져 가기’를 실천하는 42산악회원들의 산을 보호하는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내려오는 길은 제2관문인 조곡관으로 잡았다. 오르던 길을 되돌아오다가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니 참나무류와 박달나무 등 활엽수림이 우거진 반그늘에는 야생초의 꽃이 만발하여 청초한 자태를 수줍은 듯이 뽐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연한 미색을 띤 흰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일행 중의 누가 들은 얘기라면서 그 꽃이 ‘오리꽃’이라면서 주흘산에만 있는 희귀종이라고 하드란다. 그 예기를 듣고 꽃을 유심히 살펴보니 꽃 하나하나의 모양이 마치 오리가 목을 길게 빼고 서 있는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가히 오리꽃의 별명을 들을 만 하였다. 이 꽃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흰진범」이라는 다년초 식물로서 동자꽃, 투구꽃, 촛대승마꽃과 더불어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초로서 특히 700-800m 고지대의 낙엽이 쌓인 기름진 토양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꽃의 특성은 독성이 강한 독초라는 점이다. 사약으로 사용했던 부자와 같은 성분의 맹독성을 가지고 있어 즙이 혓바닥에 닿기만 해도 혀가 마비된다고 하니 꽃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혹시나 실수하지 않도록 유의해야할 식물이다. 흰 꽃을 「흰진범」이라 하고 보라색을 「진범」이라고 한다.
내려오는 길이 매우 지루하고 피곤하였으나 「꽃밭 서들」이 잠시 발길을 멎게 한다. 완만한 왼쪽 경사면에 있는 넓은 돌밭에 공들여 쌓은 돌탑들이 아름다운 돌꽃밭을 이루고 있어 단조로운 하산 길에 흥미를 돋우었다. “아들 없는 여자가 이 꽃밭 서들에서 돌을 정성 들여쌓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어, 아들 못 낳는 여인네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정성이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었나 보다. ‘서들’은 ‘너들’의 이 지방 사투리인 듯 하며 ‘너들’은 산에 있는 돌만으로 이루어진 돌밭을 말한다.
맑은 계곡에 발을 담그고 남은 양주 한잔을 들이키니 무릉도원이 따로 있으랴! 푸른 하늘과 우거진 숲, 흐르는 물은 모두 선경이요, 옆에 있는 친구들이 모두 신선이니, 난들 어이 신선이 아니랴!
조곡관 가까이 내려오니 ‘새재등반 400회’ 기념식수가 있다. 지체부자유라는 불구의 몸으로 새재까지 400번을 오르내린 「秦相泰」씨라는 분의 의지를 기념하기 위해서 문경군에서 허가를 하여 자비로 기념식수를 하였다고 한다. 금년 76세의 고령으로 1996년 4월에 400회의 대업을 이룩하였으니, 사지가 멀쩡한 우리 42산악회 회원들은 여기서 커다란 교훈을 얻었다. 옆에 100회, 200회, 300회를 기념하는 식수도 있다.
계곡건너 주막에서 조병준 사장이 손짓을 한다. 하산 길에 힘이 빠진 다리를 쉬면서 민속주에 목을 축이고 있었다.
조곡관(鳥谷關)에서 위로 4km를 가면 제3관문인 조령관(鳥領關)이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출발지인 주흘관(主屹關)을 향해서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면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정담을 나누는 길은 마사를 깔아 곱게 손질한 새재의 관문을 잇는 도로이다. 이 길은 일반차량의 통행을 금지하여 걸음걸이가 자유스럽고 콘크리트나 아스팔트포장에 비해 발에 닿는 촉감이 부드럽고 상쾌하다.
계곡에 있는 소나무의 기상이 수려하여 눈길을 끈다. 길섶에는 분홍색의 「물봉선」이 군락을 이루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물봉선도 1년생 독초이기 때문에 소가 먹으면 설사를 한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울밑의 봉선화는 외국에서 건너온 귀화식물이나,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물봉선은 「노란물봉선」 「흰물봉선」 진붉은 「가야물봉선」과 분홍색인 「물봉선」이 있다고 金海坤 총무의 부인이 야생초 애호가답게 회원들에게 물봉선에 대한 설명에 신바람이 난다.
늦은 귀로에 몸은 지쳤으나
문경 새재가 ‘날아가는 새도 쉬어간다’고 「새재」라 하는, 국방상 천해의 요새임에도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이곳을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쳤다가,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지(선조 25년인 1592년 4월 14일) 열흘만에 새재를 뚫고 북상한 적군에 의해 전멸되는 비극을 낳았다. 새재의 관문은 전국토가 왜군에게 짓밟히는 수난을 겪은 후에야 그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고 1594년에 제2관문인 조곡관을 쌓았으나, 제1관문인 주흘관과 제3관문인 조령관은 200년 뒤인 1706년에야 쌓았으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처럼 임란 후 잠깐 틈을 타서 조곡관을 쌓고는 200년이란 세월을 보냈으니 우리들 조상의 안보 관념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버스가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회원들은 김회장의 친구인 문경군 총무국장(朴熙政)이 보내준 ‘옥수수 동동주’에 거나하게 취하여 예정시간보다 두시간이나 늘어진 7시에 출발하였다.
선산 장천에 이르니 차가 밀리기 시작하였다. 지루한 시간을 즐거운 시간으로 만들기 위해 金회장과 李甲鍾(제3대회장) 회원의 노력이 돋보인다. 김영순씨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용감한 스타트로 李甲鍾회원의 사회가 힘을 얻어 차내 분위기가 적극 참여 쪽으로 선회를 하였다. 梁成鎬 교수의 섬머타임은 산행 때마다 들어도 항상 듣고 싶은 넉넉한 음성이다. 李相正 선생의 ‘삽신교’ 강의는 金永秀 회원의 수정이론이 제기되어 열띤 토론이 벌어졌으나 모든 회원들의 암기를 위한 재 강의까지 하는 분위기는 가히 백삼선 출신다운 학구열을 보였다. 曺奉承, 禹洪基, 張晋榮 회원, 車埈載, 陳 實, 張晋榮 회원의 부인, 남편을 해외로 출장 보내고 혼자 참석한 열성파 李 弘 회원의 부인 등 대부분의 참석자가 한 곡씩 뽑는 솜씨가 노래할 줄 몰라 자는 채한 나까지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흥겨운 기분으로 앞산 주차장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다음 원행은 10월 13일 동래 금정산이란다. 기차도 타고 전철도 타고 버스도 타고 가는 정취있는 산행이란다. 이제는 버스 한대만으로는 모자라는 42산악회가 될 날도 멀지 않으리라. 50대의 건강은 등산이 최고라면서 자꾸자꾸 모여드는구나!
1996년 9월 8일, 주흘관에서 정상까지 4.5km, 정상에서 조곡관까지 5km, 조곡관에서 주흘관까지 3km, 모두12.5km의 주흘산 산행은 42산악회의 등정사에 길이 남으리라.
'***송연 글*** > 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 없는 길 (0) | 2006.06.08 |
---|---|
성인봉에서 쪽빛 동해를 보다 (0) | 2006.06.08 |
도깨비산행 (0) | 2006.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