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는 길
-황석산 등정기-
鄭 時 植
산을 좋아하는 직원들의 취미 클럽인 ‘서구청 산악회’에 동행하기로 하고 11월 세 번 째 일요일의 서 너 군데 결혼식과 42산악회의 팔공산 산행에도 참석을 포기하고는 아내가 준비한 도시락과 뜨거운 차를 넣은 보온병, 그리고 과일 몇 알을 배낭에 넣어 시간에 늦지 않게 집을 나섰다.
산행 때마다 그러하듯 목적지의 정보를 책을 통해 찾아서 몇 장 복사를 하여 챙겨둔 것을 총무에게 주면서 우리의 산행 계획이 용추계곡의 삼거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안의계곡의 농월정 상류에 있는 서하교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등산 안내서에는 일반적으로 삼거리에서 등산을 한 후 서하교로 하산하는 것이나 서하교 쪽에서 오르는 것이 완만하여 이 코스를 택했다는 총무의 설명을 들었다.
등산로 입구를 찾는데 다소 시간이 걸렸으나 동네 아이들의 안내로 제 길을 잡으니 완만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몸을 풀면서 컨디션을 조절하기에 알맞은 산행길이다. 억새풀이 있는 논두렁길의 정취를 지나니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을 건너뛰면서 늦은 가을 산행의 멋이 흥취를 돋운다. 상수리, 굴참, 졸참, 갈참, 떡갈나무 등 우리네 서민들의 된장찌개 같은 푸근한 인정미를 닮은 참나무 낙엽이 발목에 잠기도록 쌓여 인적이 드문 호젓한 산길임을 알려준다. 다른 잡목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보아 참나무류가 생존하기에 알맞은 곳인가 보다. 비단처럼 고운 낙엽송의 낙엽이 투박스러운 등산화 밑창을 지나 부드러운 촉감으로 발바닥에 와 닿는다. 서걱서걱하는 참나무 잎이 내는 소리가 시장바닥에서 들을 수 있는 질박한 서민의 소리라면 낙엽송 잎의 부드러운 감촉은 교양 있는 여인의 애교라고나 할까?
완만한 계곡길이 끝나고 능선을 향하는 가파른 비탈길이 모든 일행의 숨길을 가쁘게 한다. 다리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여 육중한 체중을 받치고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온 힘을 모으면서 가쁜 숨을 몰아쉰다. 등에서 흐르는 땀이 배낭으로 배어들고 머리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면서 연신 수건으로 땀을 훔친다. 도시생활에 찌든 노폐물을 땀구멍으로 씻어 내면서 중년들이 가쁜 숨길을 조절하여 능선에 오르니 앞서간 젊은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목적지인 황석산의 주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위엄을 갖춘 바위산의 자태가 거기서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능선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곧바로 계곡을 질러 정상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오른쪽 능선으로 붙을 것인가? 나의 산행 상식으로는 다소 우회하더라도 능선으로 붙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이 되었으나, 모두가 초행길이니 길이 좋아 보이고 질러가는 길이라 생각되는 계곡 길을 택하는 집행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완만한 경사의 계곡 길은 다시 늦가을의 여유를 즐기면서 여러 가지 모양과 색상을 가진 낙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바위에 표시한 안내 화살표를 따라가는 일행의 선두가 다시 가파른 길로 접어든다.
낙엽 때문에 길이 뚜렸하지는 않았지만 가파르게 달라붙은 길의 흔적이 때 묻지 않은 것 같으나 가로막는 나무 가지를 잘라내고 간 흔적이 있어 사․오십분 가량 다리의 근육을 다시 긴장시키면서 땀을 흘리는 고역을 치르고 오른 곳에는 능선 중허리에 며칠 전에 이장한 흔적이 뚜렸한 묘 터가 나왔다. 배낭을 내리고 큰 호흡을 하면서 올라온 길을 되돌아보니 그 흔한 소나무의 푸르름은 한 점 찾아 볼 수 없고 앙상한 가지만을 달고 있는 낙엽활엽수림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주능선에는 젊은이들의 씩씩한 ‘야-호!’ 소리가 메아리친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정복(?)의 성취감을 만끽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들에게 손짓하고 있다. 시원스러운 사과 한쪽의 맛이 일품이다. 그런데 앞선 선발대가 길이 없다는 신호가 와서 앞을 보니 거대한 바위로 된 봉우리가 막아서 있다. 주봉으로 갈려면 암벽을 타거나 오른쪽으로 비껴서 올라야 하는데 길이 없다니? 그렇다면 지금까지 올라온 길은 주봉으로 오르는 길이 아니란 말인가?
아차! 우리의 실수다. 우리가 온 길은 묘를 이장하기 위한 사람들이 낸 길로 잘못 들어 이곳에 이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계곡에서 길을 잘못 들어 가파른 가운데 능선으로 오른 것이다. 계곡의 길을 잘 살피지 못한 실수 누구를 탓할 것인가? 아내의 정성이 담긴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는 다시 숨길을 고르고 선발대가 찾아 나선 ‘길 없는 길’을 헤치며 잡목에 찔리고 바위에 미끄러지면서 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험하고 가파른 길을 만들어 간다. 모두들 그 험한 비탈길을 한마디 불평 없이 헤쳐 나가고 있다. 스물다섯 명 회원들은 길을 잃어버렸다는 위기의식과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결의가 서려 산자락에서는 허덕이던 사람도, 연약해 보이는 여직원들도 정상을 향해 굳건하게 발길을 내딛고 있다. 산행 길에 오른지 세 시간이 지난 정오가 되어 정상 마루턱에 올랐다.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길도 없는 어려운 등정을 해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우리의 인생도 이렇게 험난한 산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고난의 길을 극복해야 환희를 맛보듯, 한 스님의 험난한 구도의 길을 그린 최인호의 ‘길 없는 길’이 떠오른다.
원추형으로 생긴 1,190m의 가파른 정상에 도착하여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안의계곡, 용추계곡과 북쪽으로 보이는 거망산(1197m), 금원산(1355m)을 지나 남덕유산(1507m)에서 덕유산(1614m)으로 이어지고 남으로는 지리산 연봉이 동서로 길게 놓여 있는 백두대간의 한줄기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념에 잠겨 주변을 둘러보는 상쾌한 기분도 추위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고 기념촬영을 하고는 내려와 정상이 건너다보이는 묘 터에서 도시락을 폈다. 이렇게 높고 험난한 곳에 묘를 쓴 자손의 발복을 바라는 지극한 소망이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하면서, 권하는 한 잔의 소주 맛은 지금까지의 긴장과 피로를 확 풀어준다.
1995. 11. 19.
***대구시 문우회 제3집 “낙동강 굽이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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