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봄날의 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산벚나무 꽃.② 가로 숨구멍이 특징인 산벚나무 줄기.③ 산벚나무로 만든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산벚나무 목재를 이용한 것 가운데 백미는 팔만대장경이다. 전체 8만1258장의 경판(經板)에 쓰인 나무의 약 3분의 2를 산벚나무로 만들었다. 그 밖에 돌배나무 등 다른 나무들이 조금씩 섞여 있다.
경판 대부분을 산벚나무로 새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나무 재질이 균일하고 너무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아 글자 새김에 알맞아서다. 둘째는 주위에 흔하고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나무껍질의 독특함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무와 달리 산벚나무는 숨구멍이 가로로 배열되어 있어서 멀리서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을 새길 당시에는 온 나라가 몽골 군에 유린당하고 있던 때다. 대놓고 나무를 베어 오기는 어렵다. 껍질이 금방 눈에 띄는 산벚나무는 몰래 한 나무씩 베어 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옛 문헌에서 산벚나무를 비롯한 벚나무 종류를 찾아보면 화(樺)와 앵(櫻)으로 기록했다. ‘화’는 원래 자작나무이나 산벚나무도 같은 글자를 썼다. 둘은 전혀 별개의 나무지만 껍질을 벗겨 활을 만들거나 장식용으로의 쓰임이 같았기 때문이다.
성종 때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은 ‘조선에서는 화피로 만든 활을 좋아한다’고 했다. ‘앵’으로 기록하는 경우는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 ‘경덕왕 24년(765), 깨끗한 승복을 차려입은 한 스님이 앵통(櫻筒)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누각 위로 맞아다가 그 통 속을 보니 차 끓이는 도구가 담겨 있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앵통은 나무의 굵기나 특성으로 보아 앵두나무 통이 아니라 산벚나무 껍질로 장식한 통이다.
그 외 백제와 신라의 다툼이 심했던 앵잠성(櫻岑城)은 성 주변에서 산봉우리까지 산벚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앵곡(櫻谷) 역시 산벚나무가 많이 자라는 계곡이다. 정약용 선생의 『다산시문집』에 나오는 산앵(山櫻)은 시의 내용에 ‘열매가 검다’ 하였으므로 산앵도가 아니라 산벚나무다.
이렇게 옛 문헌에 산벚나무는 자주 등장하지만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우리 선조들에게 산벚나무를 비롯한 벚나무 종류는 꽃나무가 아니라 나무와 껍질을 이용하는 자원식물이었을 뿐이다. 벚꽃놀이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새로운 문화다. 광복 후 한때 벚나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으며 1984년 궁궐을 복원할 때는 벚나무를 모두 잘라냈다. 그러나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제주도라고 알려지면서 벚꽃놀이는 널리 퍼져 나갔다. 다만 우리의 전통에는 벚꽃놀이 문화가 전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주와 같은 옛 도시에서의 벚꽃축제가 타당한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간단히 벚꽃이라고 하지만 벚나무는 우리나라에 10여 종류나 자라고 생김새도 거의 비슷하다. 산벚나무는 잎과 꽃이 거의 같이 피고, 우리에게 익숙한 왕벚나무는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진 다음에 잎이 돋는 것으로 개략적인 구분을 할 수 있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