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잘 익은 앵두 열매. ② 경복궁 영제교 주변의 앵두나무 꽃. ③ 경복궁의 앵두나무. [사진 황영목·박상진]
옛사람들은 제철이나 되어야 과일을 먹을 수 있었다. 겨울이나 봄날 내내 생과일을 먹지 못했다. 초여름에 만나는 첫 햇과일이 바로 앵두다.
앵두는 지름 1㎝ 정도의 동그란 열매다. 속에 딱딱한 씨앗 하나를 품고 있으며, 겉은 익을수록 반질반질 윤이 나며 매끄럽고 말랑한 빨간 껍질로 둘러싸여 있다. 모양새부터 먹음직스럽다. 달콤새콤한 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해준다. 옛사람들에게는 귀한 간식거리였다. 잘 익은 앵두의 빨간 빛깔은 미인의 입술을 상징했고, 앵두같이 예쁜 입술을 앵순(櫻脣)이라 불렀다.
그래서 이 자그마한 과일이 역사서나 시문집에 흔히 등장한다. 조선 성종 때 편찬한 우리나라 역대 시문선집 『동문선(東文選)』에는 최치원이 앵두를 보내준 임금에게 올리는 감사의 글이 실려 있다. ‘온갖 과일 가운데서 홀로 먼저 성숙됨을 자랑하며, 신선의 이슬을 머금고 있어서 진실로 봉황이 먹을 만하거니와 임금의 은덕을 입었음에 어찌 꾀꼬리에게 먹게 하오리까….’
앵두는 이렇게 임금이 신하에게 선물하는 품격 높은 과일이었다. 앵두는 꾀꼬리가 먹는 복숭아라는 뜻으로 앵도(鶯桃)라고 하다가 앵도(櫻桃)로 변했다. 지금은 국어 맞춤법에 따라 ‘앵두’다. 하지만 옛 문헌에 앵(櫻)은 벚나무로 읽히는 경우가 더 많다.
조선 세종과 성종은 앵두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효자로 이름난 문종이 세자 시절, 앵두를 좋아하는 아버지 세종에게 드리려고 경복궁 후원에 손수 앵두를 심었다고 한다. 세종은 맛을 보고 나서 ‘바깥에서 따 올리는 앵두 맛이 어찌 세자가 직접 심은 것만 하겠는가’라고 했다. 문종이 머무는 동궁을 궁녀들은 ‘앵두궁’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런 고사에 따라 오늘날 경복궁에는 앵두나무를 많이 심어두었다.
성종 19년(1488) 앵두 두 소반을 승정원에 내려주면서 ‘장원서(掌苑署)에서 올린 앵두가 민가에서 진상한 것보다 오히려 못하다. 담당 관리들은 앵두 키우기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한다. 또 성종 25년(1494)에는 철정이란 관리가 앵두를 바치자 ‘성의가 가상하니 그에게 활 한 장을 내려 주도록 하라’ 했다. 이 관리는 연산군 3년(1497)에도 역시 임금께 앵두를 바쳐 각궁(角弓) 한 개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앵두 한 쟁반으로 임금님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순박한 시대도 있었다.
앵두는 제물(祭物)로도 귀하게 여겼다. 『고려사』에 제사 의식을 기록한 ‘길례(吉禮)’를 보면 ‘4월 보름에는 보리와 앵두를 드리고…’라고 했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도 태종 11년(1411) 임금이 말하기를 ‘종묘에 앵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의례의 본보기로서 5월 초하루와 보름 제사에 올리게 되어 있다’고 했다. 익는 시기가 빠르고 맛 또한 달콤하여 조상에 바치는 과일로서 손색이 없었다.
앵두나무는 중국 북서부가 고향이다.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키가 2~3m 정도 자라는 작은 갈잎나무이며 줄기가 밑에서부터 갈라져 포기처럼 자라는 경우가 흔하다. 4월 초·중순께 매화를 닮은 꽃이 하얗거나 연분홍으로 핀다. 이후 불과 두 달 남짓이면 벌써 익어버리는 초고속 열매 만들기를 한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