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관음송, 가운데; 청령포, 아래: 장릉(단종릉)
어린 조카 단종(端宗,재위기간1452~1455)을 몰아내고 수많은 반대파를 무참히 죽이고 왕위(王位)에 오른 조선의 제7대 왕 세조(世祖)는 두 그루 소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 한 그루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충북 보은군 소재 정이품송(正二品松)이고, 다른 한 그루는 왕에서 쫓아내는 것까지도 모자라 사약(賜藥)으로 죽인 단종의 한을 품고 자라는 영월 소재 관음송(觀音松)이다.
양자 모두 수령이 600여년으로 전자(前者)는 천연기념물 제103호(1962,12,3지정)로 높이가 15m, 가슴높이줄기둘레가 4.7m, 가지가 동쪽으로 10.3m, 서쪽으로 9.6m, 남쪽으로 9m, 북쪽으로 10m터나 뻗었고, 후자(後者)는 천연기념물 제349호(1988,4,30지정)로 높이가 30m, 가슴높이줄기둘레가 5m, 가지가 동서로 23.3m, 남북으로 20m나 되는 전자보다 더 큰나무다. 또한 전자는 피부병을 앓던 세조가 요양 차 속리산을 찾는 길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자 이를 피하기 위해 나무 밑으로 가마를 옮기려 하자 가지에 걸려 움직일 수 없을 때, 지켜보던 세조가 ‘허 가마가 가지에 걸렸구나!’ 하자 스스로 가지를 들어올려 일행이 수월하게 비를 피할 수 있게 되자 세조가 정이품(正二品)의 벼슬을 주었다는 데서 이름이 부쳐진 나무이며 후자는 그런 낭만과 달리 슬픈 사연이 담겨있다. 누구보다도 훌륭한 후견인이 되어야할 세조가 도와주기는커녕 강압적으로 단종을 몰아내고 그 부당한 왕위찬탈을 지적하는 여론이 들끓고 성삼문 등 일부 인사들이 마침내 복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오히려 역모로 몰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면서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을 때 그를 지켜 본 관음송이다.
그 후 금성대군이 또 다시 복위운동을 전개하나 발각되면서 희생자는 더 늘어났고 단종은 다시 서인(庶人)으로 격하된다.
청령포는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나라 어느 지역보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가진 곳이다. 그러나 남, 동, 북의 삼면은 강으로, 서쪽 한 면은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 나룻배 등 특별한 교통수단 없이는 내왕이 불가능한 오지 중의 오지이다. 이런 깊은 산골 외진 곳으로 보내 놓고도 안심이 안 된 세조는 금표비(禁標碑)를 세워 단종이 배회할 수 있는 거리마져 제한했다.
지존(至尊)의 자리에서 억울하게 쫓겨나 울분을 삭이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던 단종은 유배지 중에서도 비교적 높아 조망이 가능한 일명 노산대(魯山臺)에 올라 할아버지 세종으로부터 귀여움을 받던 추억이며, 두 살 위이지만 오누이 같이 지냈을 왕후 생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유난히도 더웠던 지난여름이 꼬리를 내리려 하는 가을의 초입, 황 계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난 봄 동백꽃을 보기위해 거제 지심도를 가던 길에 영월 청령포를 갔다 왔다기에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으며 기회가 되면 단종이 유배생활을 지켜보고(觀), 그의 울분의 소리(音)를 들었다는 관음송(觀音松)이 있다는데 꼭 보고 싶다고 하였더니 잊지 않고 있다가 가보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대구에서는 꾀 먼 거리였으나, 이 여사가 운전을 잘해 예상보다 일찍 영월에 닿았다.
장릉(莊陵,사적 제196호=단종의 능)을 먼저 보는 것이 청령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견에 따라 장릉을 먼저 들였다. 사약(賜藥)을 받고 강물에 던져진 시신을 삼족(三族)이 멸하는 죄를 지우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호장 엄흥도가 수습해 비밀리에 묻은 것을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찾아내 정비한 곳이라 한다.
그날따라 관광객이 꾀 많았고 그 외 영월군이 해마다 ‘단종문화제’를 개최하여 지역민을 결속시키고 또 관광수입을 올려 지역의 경제에 기여하도록 한다하니 이런 비극의 현장도 가꾸기 나름이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재(齋)를 올리는 정자각을 가는 길이 신도와 왕도로 구분해 놓은 점과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정력각이 장릉의 경내에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차를 돌려 준비한 정심을 먹기 위해 청령포와 유배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짐을 풀고 자리를 잡으니 사약을 가지고 온 금부도사(禁府都事)로 단종을 잃은 슬픔을 시로 남긴 왕방연의 시비 앞이었다. 청령포(淸泠浦)는 여전히 물이 맑다. 참으로 오랜만에 목선(木船)을 타고 유배지를 찾았다. 수행원들의 거소며, 단종이 머물었던 곳이 잘 정비되어 있었고 주변 솔숲이 매우 아름다웠다.
특히 그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관음송이었다. 지표면에서 1.2m 부분쯤 가지가 둘로 갈라졌다. 이 갈라진 부분에 단종이 걸터앉아 놀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국을 통치하던 왕에서 불과 몇 년 사이에 서인으로 전락해 이 깊고 깊은 산속에 유배된 단종은 오만가지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속내는 이 관음송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를 잘 증명하는 것은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지금 서슬이 퍼런 세조의 순행(巡行)길을 도와주었던 정이품소나무는 가지가 부러지는 등 수세가 약해지는 데 비해 단종의 한을 품고 자라는 관음송은 수피(樹皮)가 붉은 것이 전형적인 한국소나무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을 뿐 아니라, 돌보아 주는 이 없어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진리를 말없이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단종은 유배생활의 소회를 한 편의 시로 남겼으니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묻은 채/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속에서/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해매는 데/푸른 숲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냇물은 돌에 부딪혀 소란도 하다/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는다.”
라고 했다.
어린 나이에 졸지에 왕의 자리를 내 주고 죄인의 신분으로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적막한 오지(奧地)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외롭게 생활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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