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온 글***/기행문

산국(山國) 네팔. 신국(神國) 인디아/박 윤호

是夢 2008. 1. 3. 22:41
 

    산국(山國) 네팔. 신국(神國) 인디아


2005.11.20 일 : 인천 발-상해- 네팔 카트만두 착

2005.11.21 월 : 히말라야 쿠마리사원 달발관장 하누만도카 항공으로 뭄베이 행

2005.11.22 화 : 인도 뭄바이 시가지 엘레판타섬 아라비아 해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

                도비가트 간디생가. 열차로 아우랑가바드 행 

2005.11.23 수 : 엘로라 석굴 다올라타바드 힌두사원 

2005.11.24 목 : 아잔타 석굴.  열차로 보팔 행

2005.11.25 금 : 산치대탑 힌두사원 열차로 앨리 행

2005.11.26 토 : 인도문. 간디묘. 연꽃사원. 자이푸르 행

2005.11.27 일 : 앰버성 시티팰리스 바람궁전 하와마할 

2005.11.28 월 : 아그라성 열차로 오차 행

2005.11.29 화 : 제항기로 팔레스 카주라호로 이동

2005.11.30 수 : 성애사원. 항공으로 바라나시 행

2005.11.31 목 : 염불탑 초전법륜사. 다메크탑

2006.12. 1 금 : 갠지스강 일출. 빨래터. 황금사원. 네팔 룸비니로 이동

2006.12. 2 토 : 마야데비정사. 그룡못. 아쑈카 석주. 룸비니동산. 항공으로 네팔 포카라행

                페와호수 크루즈. 티벳 마을. 데빗폭포   

2006.12. 3 일 : 히말라야  보드사원 항공으로 카트만두 행

2006.12. 4 화 : 카트만두 - 상해 - 인천 착


산의 나라 네팔  2005. 11.20 (일)

여행을 잘 나선 선배들이 일흔을 넘기더니 움직이는 것을 싫어한다. 나이는 속이지 못하는 가 보다. 그런데 여행이라면 떠났고 싶은 마음이라도 남았으니 젊었나 보다. 친구들 보다 사오년 더 교직생활을 마감하고 나오니 그들은 벌써 짝짝이로 해외여행의 끝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혼자 나서기도 그러하고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찾든 차 해외여행 상품이 있다는 전갈을 받고 무릎이라도 성할 때 길을 나섰다.

2005, 11. 20일부터 2006년 12월4일까지 산의 나라 네팔과 신의 나라 인디아 코스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인도 고대문명 발상지인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유역과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미르고원을 상상하며 공부한 동경의 나라들이다.

요즘은 브리닉스 4개국으로 미래의 경제대국으로 나설 나라들이다. 인디아는 나름대로 산업기반시설과 IT인력을 선진국으로 수출한다니 우리정도의 정보화 산업은  일반화되었을 것이고 특히 핵을 보유한 국가라 기대할 만한 여행길이다.

대구공항에서 중국동방항공으로 13시에 이륙하여 얼마안가 본 시야는 서해 상공인지 간간히 섬들이 보인다. 이윽고 시간 반이나 지났을까 상하이공항이란다. 가이드는 일행보다 한발 늦어 불안하지만 상하이에서 네팔항공으로 바뀌어 타고 7시간을 만에 네팔의 수도 카드만두에 내려 주었다. 입국수속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두침침한 공항을 나오니 민수라는 네팔청년이 마중 나왔다.


다음엔 꼭  보여 주겠다  2005. 11.21 (월)

카트만두 하얏트호텔은 새벽 4시 모닝콜로 잠을 깨웠다. 에베레스트 전망대(2062m)로 가기 위해서다. 중고 버스에 기사와 조수는 우리는 인력시장의 군상들처럼 태워  일출을 놓치지 않으려고 새벽을 가른다.

우리나라의 50년대 모습이다. 숨 가쁘게 굽이굽이 돌아 도착한 전망대에는 국적 불명의 다신교도들은 경을 외우고 찬양을 한다. 모두가 일출을 열망했지만 정성이 미흡한지 에베레스트는 해를 내 보내지 않았다.

날이 밝자 녹색 산들이 이어오고 이어가고 있었다. 유럽풍의 별장 같은 집들이 이색적이다. 벽돌로 다듬어 놓은 길과 전통찻집의 한잔의 녹차가 향긋하다. 찻집의 조경들은 가난의 흔적은 전혀 없다. 

일출을 아쉬워하자 가이드는 능청스럽게 “한국에는 해가 안 뜨나요.’  “다음에 오면 꼭 보여 주겠단다.” 가이드는 한국에서 일한 해외근로자였다. 우리말이나 노래에 능숙하다. 네팔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화장하고 맏이는 삭발하고 검소한 옷을 입고 13일간 매일 1끼만 먹고 육류나 소금을 금식한다.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란다.

왕궁 건물과 목조로 우람한 사원들이 눈길을 끈다. 5 6층의 목조사원은 탑 모양이다. 흡사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의 10배나 됨직한 건축물로 20m도 넘을 것 같다. 이런 건물들이 10개가 넘는다.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의 복원을 고민하는 개구리들은 이곳에서 한 수를 배울 일이다. 탑도 절도 모든 건축물은 교류란 물결을 타고 있었다.


쿠마리사원

살아있는 여신이 산다는 쿠마리사원은 정방형 3층 목재건물이다. 옹색한 공간에서 곧 출현할 여신을 보기 위해 창을 응시하고 있다. 시간이 되자 쿠마리는 얼굴만 내밀었다. 짙은 화장에 이마에는 삼라만상의 이치와 법을 꿰뚫어본다는 신성한 눈 '티카' 제3의 눈이 그러져 있었다.

네팔이나 인도는 온통 잡신들의 세상이다. 인간이 너무 나약해서인가. 자연의 위대함에 눌려서 인가? 룸비니동산 다음으로 신성시한다는 스투파를 찾았다. 언덕위에 위치한 스투파의 중간에도 ‘티카’가 크게 그려져 있다. 물 불 흙 공기 영혼을 표징 하는 오색 깃발이 만국기처럼 매달려 있다. 한 번을 돌리면 불경을 1천 번의 읽는 공덕을 쌓는다는 마니차를 돌리며 법문을 왼다.

내일은 카트만두 발 델리를 경유하여 뭄바이 행 대여정이다. 네팔의 출국수속은  까다로워 짜증나게 한다. 7번을 확인하고 7번 점검한다. 심지어 트랩에 오르는데도 항공권을 보잔다. 이런 절차로 겨우 23 EF석를 찾아 앉은 우리에게 통성명도 없는 일행 중 한 사람이 양해도 없이 맨 뒤의 앉아 있는 일행의 여자들과 자리를 교체하란다. 얼떨결에 바꾸어 앉아있자니 편치 않다. 친구는 횡재한 듯 킥킥거린다. 흡연할 수 있는 좌석이기 때문이다. 스튜어디스는 비지너스 석으로 배려해 주어 반분은 풀었지만 약삭빠른 그도 어느새 내 뒤에 와있었다. 


신의 나라(神國) : 인도


뭄바이  2005. 11.22 (화)

인도는 계급사회로 상위카스토론 브라만(승려나 지주) 크샤트리아(군인이나 왕족) 바이샤(상인 일부의 농민) 하위카스토로 수드라(농민 서비스 상인) 제5계급(지정카스트 지정부족) 비 카스트(기타소외계층)등 카스트 계급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예 카스트 제도에 들지 못하는 아웃카스트는 살갗만 스쳐도 오염시킨다는 불가촉(不可觸) 천민(賤民)들이다. 

봄베이가 뭄바이로 불러진지는 오래인 모양이다. 하나 봄베이가 입에 베었다. 봄베이(Bombay)는 7개의 늪지를 도시로 만들었다. 그 중 가장 큰 섬이 뭄바이라 그렇게 부른단다. 시가지는 고금이 혼재되어 낙타가 끄는 수레, 소달구지 인력거 삼륜차 승용차 버스로 뒤범벅이지만 잘들 비집고 다닌다.

아라비아 해안의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는 영국식민지의 잔재로 1911년 영국 조지 5세의 인도방문 기념으로 지은 건물이지만 아직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바로 앞 건너편에는 네오클래식의 타지마할호텔은 현대식건물보다 화려하다. 우리는 중앙청(일본총독부)을 식민지의 잔재라 과거를 정리한다고 박살을 내었지만 그렇다고 식민지 통치를 받은 과거사는 없어졌는가. 소가 웃을 일이다.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 앞은 선착장이다. 엘레판타 섬으로 향한 유람선은 중무장한 기동함대로 만나더니 기울 듯 촐랑댄다. 해군요새, 해저개발시설, 화력발전소 등 은 인도의 국력이다.


엘레판타 코끼리 섬

16세기 처음 도착한 포르투갈 인이 코끼리 섬을 보고 엘레판타라 지었다. 궤도열차는 지걱대며 석굴입구까지 실어다 준다. 서기 450년부터 300년간 조성한 석굴은 망치와 정으로 깎고 파서 거대하고 정교하게 조형과 문양을 그렸다. 흡사 월악산 미륵사를 닮았다.

오다 들린 집단 빨래터 도비가트는 피난민 수용소이나 다름없다. 구정물에서 빨랫감을 휘두르며 빨래를 한다. 어제 탄 침대열차의 시트커버도 여기에서 빤 것 같아 온통 몸에서 구정물로 덮어 쓴 듯하다.


신국(神國) 인도, 모든 것에 지고

일본작가 등원신야(籐原新也)가 1984년에 쓴 ‘인도 방랑’에 머리는 아무렇게나 자랐고 튀어나온 광대뼈가 뜨거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약해 보이면서도 태양에 그을린 어깨의 피부가 작열하는 이 나라의 저항의 시간과 모습을 말해준다.

그들은 무엇에나 지고 있는 듯 살고 있다. 태양에 지고, 대지에 지고, 사람에게 지고, 햇빛에 지고, 소에 지고, 벌레에 지고, 오물에 지고, 꽃에 지고, 배고픔에 지고, 신에 지고, 냄새와 소리에 지고, 먼지와 물에 지고 시간에 져 지고 있는 삶이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러하다. 물건마다 있는 신을 맹종하는 힌두교에 옴짝달싹도 못하고 계급신분이 존속되는 한 인도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리’를 두른 아주머니들이 쇠똥을 주물고 있었다. 땔감을 만들기 위해서다. 삭정이를 찾아 하루 종일 나서니 쇠똥을 예찬할 수밖에. 2주일을 다녀도 산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땅의 나라다. 산이 없으니 나무가 없고 나무가 없으니 물이 귀할 수밖에… 씻을 물이 없으니 집이고 길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온통 먼지투성이다.

인도는 땔감을 해결하는 날 소로부터 자유로우리라. 간디는 정신적인 인도를 찾았지만 가난의 인도는 안고 무덤으로 갔다. 원인은 소다. 소는 젖을 주기 때문에 곧 엄마다. 시장판이고 기차역이고 길거리고 사원이고 간에 소들은 한가롭다. 델리나 뭄바이 같은 대도시에서는 점차 소를 몰아내고 있단다.

검은 얼굴의 현지 가이드에게 그렇다면 소를 물 좋고 풀 많은 곳에 길러야지 하였더니 그는 까만 얼굴에 흰 이를 내어 웃기만 한다. 쓰레기를 뒤져 먹는 소를 보고는 식탁에 오른 우유에 손대기는 망설여진다.

뭄바이에서 아우랑가바드까지는 침대열차로 8시간이 거린다. 역에는 개찰구도 검표원도 없다. 심한 악취의 플랫폼은 들숨조차 어려워 머리가 찌근거린다. 거지, 구두 닦기, 짐꾼으로 뒤범벅이다. 승차는 객차 옆의 승객명단을 확인하고 타야했다. 한 번도 청소라고는 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열차는 커튼이며 침대며 냉방장치며 창문은 꽤죄죄하고 차내 방송도 하지 않으니 초행길은 어디서 타고 내리는지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래도 제 시간에 도착하였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인도 철도의 현주소다.

역 대합실에는 의자도 없고 텅 빈 공간엔 집 없는 주민들이 수십 명이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역 앞에는 가로수 아래 흙먼지에서도 온 가족이 잠을 잔다. 우리도 피난 시절 상황도 이랬지만 그래도 잠은 집에서 잤다. 우리야 나그네이지만 한 평생을 살아야 할 그들에게는 조국이다.

눈만 큰 네살 박이가 눈에 밟혀 남은 동전을 다 털어 주었더니 손이 작아서인지 땅에다 흘린다. 이를 어쩌지! 곧 큰 애들이 들어 닥치면 빼앗아 달아 날 텐데.


엘로라 석굴   2005.11.23 (수) 

어제 저녁 9시에 뭄바이에서 출발한 침대열차는 다음날 오전 5시 뿌연 새벽에 아우랑가바드 역에 도착했다. 엘로라 석굴을 보기 위해서다. 인도의 관광자원은 석굴과 성(城)들이다. 엘레판타 섬의 힌두사원, 엘로라 석굴, 불교회화의 진수라는 아잔타 석굴, 카주라주 성애(性愛)사원, 산치대탑, 타지마할 영불탑 핑크시티의 바람궁전도 주요 관광 상품이다.

떼를 이룬 석굴사원들은 현무암산에다 굴로 판 자연석 건축이다. 산허리에 일자형의 석굴들은 연립상가를 연상케 한다. 굴을 판 양식들이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도리스식 건물들이 도열한 듯하다.

지금 토목공법으로도 어려운 섬세한 석굴들은 화려한 것도 간결한 것도 크고 웅장한 것들이 혼합되어 있다. 자로 잰 듯 반듯한 석실들, 원석에 그대로 조각한 메카톤급들은 부처들은 검은 현무암이라 화강암과는 색깔부터 다르지만 그 규모의 장대함과 세심함에 압도될 수밖에… 많은 인력과 능란한 솜씨로 돌산을 온통 떼거리 사원으로 바꾼 셈이다. 이것이 고대인도문명의 진수로 여겨진다. 석실에 새긴 문양과 단청들은 인도의 생활 장식품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인도인들의 참배객들도 스님도 하나 없고 옛 영화만 햇볕에 졸고 있어 쓸쓸하고 황량하다. 초등학교 때 배운 고대문명발상지 인도를 찾아 생각하며 배우며 느끼는 중이다.

‘엘로라’ 석굴은 6세기부터 11세기에 조성되어 편의상 1번부터 24번까지 번호를 매겼다. 1번에서 13번까지는 승방과 사원이다. 승방은 넓적한 가운데 홀을 중심으로 가장자리에 반 평 남직한 돌방들이 ㄷ자형으로 배치하고 한 두 명의 승려들이 참선과 명상을 했단다. 하나 석실에는 불을 켠 흔적은 없다. 좌선과 명상으로 깨달음을 얻은 몇몇 승려들이야 극락정토로 갔겠지만 거기에 대중들은 없었다. 불교가 쇠퇴한 이유로는 승려들만 명상에만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라.  

특이한 굴은 16번 힌두석굴이다. 산 전체를 위에서 밑으로 파 내려가면서 신전을 짓고 탑을 깎고 코끼리 상을 조각해 놓은 거대한 석굴사원으로 중앙신전은 복원 중이다. 뒷산에 올라가 본 사원 전체모습은 마차 형상인 거대한 건축 행렬은 이동 중에 있다. 돌산을 자유자재로 꾸민 섬세함과 웅장함은 전율처럼 흐른다. 하나 인간이 만든 솜씨는 걸작으로 남았지만 우상을 섬기며 종교적인 개인주의는 결국 페망한다는 사실이다. 


불교 예술 아잔타  2005. 11. 25 (목) 

불교 회화예술의 보고 아잔타(Ajanta) 석굴로 가는 날은 그래도 제법 산과 골짜기라도 있어 풍요롭다. 세계문화유산 지정지라 주차장이나 상가 시설은 제법 관광객을 맞을 준비로 다듬어져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활처럼 휘어진 산기슭의 지형을 따라 석굴들의 입구들이 도열하고 있다. 아잔타(Ajanta) 석굴은  BC 2- AD 7세기에 조성되어 붓다의 일생과 관련된 벽화로 유명하다. 벽화들은 암석에다 점토나 돌가루에 섬유와 쌀겨 풀잎 등을 반죽하여 두텁게 바른 다음 황토가루나 조약돌 가루에서 뽑아 낸 천연도료로 벽화를 그렸단다.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6세기로 오면서 석굴은 더 조성할 공간도 없는데다 불교가 점점 쇠퇴하자 정글에 갇혀 발걸음도 끊어진 덕택이다. 1819년 영국 마드라스 기병대의 장교 존스미스와 일행들이 사냥을 하다 우연히 계곡 건너편의 아치형 창문을 발견하여 그 모습을 찾은 것이다. 간혹 군데군데 벽화에 잘려 나간 부분은 영국군의 소행이란다.

아잔타는 엘로라의 신상조각이나 내부 규모는 비슷하다. 붓다의 일생을 그린 대형벽화의 단청과 문양이 우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0번 석굴은 불상대신 붓다의 머리카락이나 뼈의 일부를 모신 사원이라 북적댄다. 긴 반원의 아치형의 돔은 현재공법보다 더 정밀하게 굴을 팠다.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석굴 안 전체를 들어와 유리 돔처럼 환하다.

엘로라 석굴은 정방형이고 아전타의 석굴은 둥근 아치형도 있다. 29개 석굴 가운데 21번까지만 볼 수 있다. 석불 앞 절벽에 아래로 U자로 흐르는 계곡물은 햇볕에 반사되어 천 년 전처럼 반짝인다. 굴을 파며 나온 그 많은 돌들은 어디다가 버렸을까? 인력이 귀한 시대에 불가사의다.

인도의 불상은 우리의 불상처럼 비만하지 않았다. 숨을 잔뜩 들어 마시고 잠시 멈추고 있는 참선의 경지를 생각해 보라. 바로 형태이다. 우리들은 불상을 보면 풍요를 생각하게 되지만 인도의 불상들은 참선에든 듯 가난한 모습이다.

오나가나 눈빛이 퀭한 아이나 어른들은 ‘볼펜’ ‘볼펜’ 볼펜을 한 자루 달란다. 한 자루 뿐이라 줄 수도 없고 괜히 야속한 눈총만 받고 돌아서야 했다. 진작 볼펜이라도 준비하였더라도 적선을 하는 셈인데.  사방주의로는 흔한 간이음식점 하나 없다.

폐허나 다름없는 유적지를 보고 돌아설 때마다 시조 한 수를 읊조린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세상사 다 이러한 것 사람은가고 자연은 남는 것을. 또 올 것처럼 총총걸음으로 떠나지만 다 뜻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 일정을 핑계로 마음들만 바쁘다.


산치 대탑   2005. 11. 25. 

호텔에서 집어든 마하라슈트라 신문(2005.11.22 화)에 ‘데칸고원 장기간 방랑, 고난의 여행.’이 실렸다. 호텔이나 사원의 문밖을 나서면 인도는 그야말로 방랑이요 고난의 길이다. 교통이 취약하고 거리는 불결하다. 침대열차도 그렇고 겉보기가 멀쩡한 버스도 폐차나 다름없다 국토가 넓어 어쩔 수는 없지만 열차로도 8-10시간이 걸려야 겨우 다음 유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인도 타임시티지(2005.11.22) 또한 ‘Rains gone, potholes remain' 장마가다. 도로 곳곳에 구덩이 여전.’ 기사가 났다. 데칸고원으로 난 길은 어디 할 것 없이 공사로 비포장이다. 부패공무원들이 공사비를 착복하여 2차선 도로를 1차선으로 줄여 졌다고  불평들이지만 도로가운데다만 아스팔트니 마주보는 차들은 그 길을 더 점유하겠다고 브레이크 없는 차들처럼 달리다 교차하는 순간 급히 핸들로 꺾어 충돌을 피하니 등골이 오싹하다.

이런 경로 끝에 아쇼카 대왕이 기원전 2-3 C에 세웠다는 산치(Sanchi)대탑을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세계문화유산 지정 기념식에 주지사를 맞이할 준비로 경찰들은 작대기를 들고 다니며 미친 개 잡듯 분산을 떤다. 우리를 맞이하는 양 주변을 청소해 놓았다.

보팔에서 46km, 산치대탑은 호쾌하지도 않게 차분한 느낌으로 언덕위에 앉아있었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불교예술의 극치라는 탑은 흡사 왕관을 빼닮았다. 탑의 높이는 16m요 둘레는 37m다. 탑 둘레에는 4개의 탑문을 세우고 양 기둥에 3개의 기둥을 가로질려 붓다의 탄생을 의미하는 연꽃, 깨달음의 보리수, 가르침의 윤회(輪回), 현존의 발자국과 옥좌는 아름답고 섬세하다. 탑문마다 코끼리, 악마 , 배 불룩이, 부자난쟁이, 사자 상들은 가로지른 기둥을 떠받히고 있다. 그래서 코끼리문 부자문 사자문 악마문이라 부른다. 풍만한 젖가슴의 아름다운 하체의 여신상은 힌두사원이나 인도의 전통문화에 등장하는 단골 여인이다. 다산(多産)의 징표로 숭배하는가 보다. 경내에는 붉은 벽돌의 크고 작은 원형의 탑과 파괴된 돌들이 흩어져 있다. 복원하면 세계적인 문화유산일 텐데…

인도의 한 연구소장은 영국파이낸셜 타임스에 인도는 영국 식민지로 철도 항구 교육시설 등 사회 인프라와 정치 사법제도 등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냉혹한 프랑스와 머리 나쁜 스페인이나 차가운 독일의 통치를 받지 않은 것만으로도 행운이라는 기고문을 보냈다. 세계일보(2005. 12. 22) 어디나 머리가 돈 인간들은 존재하는가 보다. 영국은 식민지 인도를 신사답게 통치했나보다.

인도를 보고 있는 나로서는 야윈 옥수숫대들, 윤기 없는 가로수, 가난을 숙명처럼 익숙한 사람들, 맨발의 노인네들, 띠 잔디를 지붕으로 삼아 썩어가는 양철집들, 공사가 중단된 2층 집의 철근 구조물들을 보고 있으면 식민지 통치 시대가 좋았는지는 모른다. 보팔 발 델리로 가는 밤차는 11시간을 탈 수 있는 행운도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통치의 덕일까? 철도 여행의 낭만일까?


데칸 오디세이   2005. 11.26 (토)

어느 나라든 실상과 관광의 이미지는 거리가 멀다. 관광객들은 항공기나 철도로 셔틀버스로 자기들만의 시공간에서 여행을 나선다. 그래서 종종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나선 김에 현지인들을 만나 생활모습도 들쳐보며 어떤 생각과 방식으로 지내는지 한번쯤은 비비댈 모험이다.

하나 일행들은 한 버스에 동승하고 같은 배경으로 사진 찍고 동일 분위기에서 잠자기에 익숙하다 보면 생각도 사고도 서로 닮아가는 증후군이 된다. 제 입에 맞는 식단으로 제 몸에 적당한 컨디션을 유지하여 무엇을 본건지 어디를 거쳤는지 알쏭달쏭하다. 부리나케 기념촬영하고 안내자의 말은 뒷전으로 흘리고 몇 년 전만해도 해외여행은 가진 자들만의 것이요 꿈같은 이야기다. 이젠 제 집 드나들기보다 쉬운 세상이나 허둥대기 일쑤다.

델리는 북인도의 관문으로 시내는 사람천지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빼닮은 인도문은 높이가 42m로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위한 위령탑이다. 여기나 저기나 조국을 위해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산자들은 입만 성하여 과거사를 들추며 왜 전쟁에 참가했느냐고 왜 같은 사람들끼리 총대를 겨누었느냐고 헐�는다. 전쟁터에서 죽어봐야 알 인간들의 짓들이다. 광활한 광장너머로 국회의사당과 정부청사 대통령궁이 있다는데 가물가물하다. 너른 국토를 가진 그들이 부럽다.


바하이 사원

바하이사원은 연꽃모양의 건축물로 호주의 오페라하우스를 연상케 한다. 미국 독일 호주 등지의 유명한 건축에서 조금씩 흉내 낸 아름다운 하얀색 사원은 소박하면서도 장중하다. 계급도 종교도 구애되지 않고 누구나 기도하고 명상하는 공간이다.

여기서도 1달러에 목을 맨 아이들이 줄을 선다. 1달러에 목을 건 그곳 아이들뿐이라, one 달러에 더 집착한건 우리들이 아닌지.  1달러에 자유스러운 일행도 없었지만 생각하면 1달러짜리 웃음이라도 보내 볼 걸. 한 푼도 없다는 내 모습이 그들보다 더 가난했는지 모른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진흙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숫타니파타를 숭상한 후손들이나 만나고 올 걸.


인도 결혼 피로연  2005. 11. 27(일)

머물 호텔 정원에는 아침부터 공개음악회라도 하는 양 정원을 꾸미고 무대를 만들고 스피커를 다는 등 법석이다. 뭄바이 어느 부유층의 결혼식 피로연이라는데 열린 음악회처럼 무대를 꾸민다. 결혼 피로연을 결혼식 전날에 갖는 것이 우리와는 다르다. 곳곳의 등피로 불을 밝히고 양란 같은 생화를 엮어 나뭇가지에 매달고 붉은   카페를 깔고 그래인 장비로 이동카메라를 동원하고 있다. 밤 10시가 지나자 전통의상으로 차려 양가의 혼주며 일가친척 그리고 선남선녀들이 모여든다. 정원에는 요리사들이 음식 준비로 분산하고 한쪽에선 연주가 시작된다. 신랑신부와 하객들은 밤을 샌단다. 뭄바이에서 경비행기로 왔다니 열차로 오면 이틀을 걸릴 거리다.

계급사회의 실상이 이런 모양이다. 이쯤은 돼야 호화결혼식이란 명분이 설 것 같다.  가난하다는 인도의 환상이 뒤바뀌는 순간이다. 이런 부유층들이 인도의 국력을 좌우하는 모양이다.


코끼리 타고 엠버성 입성

우리가 탄 코끼리는 노쇠하여 뒤따라 온 코끼리들이 추월해 간다.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어, 내려서 걷고 싶었다. 무게를 들어줄 요량으로 온몸에 힘을 뺐지만 힘이 부치는 기는 마찬가지 인가보다. 짐승도 세월 앞에는 어쩔 수가 없다. 

궁성 전체를 십자군의 방패 같은 사암으로 성벽을 둘렸다. 이슬람식 엠버성은 대리석 타일로 조화되었고 자한기르의 정원은 대단하다. 술병과 꽃무늬로 치장한 타일은 흰색으로 왕실의 방들은 사방거울로 치장하여 화려하다. 

인도는 약 9세기경부터 13세기까지 이슬람교의 왕조가 열리고 1517년에는 몽고계의 바베르에 의해 무굴 제국이 건국하여 델리와 아그라를 수도로 하여 북부인도를 통치하였다. 1707년경에는 남인도까지 지배한 무굴제국이다. 힌두교의 계급사회에서 노예계급인 수드라와 계급조차도 없었던 백성들은 이슬람교의 알라 신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교리로 복음은 전파되었으리라. 

일몰을 보기위해 정상에 있는 성문으로 올랐다. 하나 짙은 노을로 헛걸음을 쳤다. 그런데 오후 6시라 아래의 시가지에서는 알라신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스피커가 온 시내에서 윙윙댄다.


영혼의 상징 타지마할  2005.11.28 (월)

11월 28일 생일이요 결혼기념일이다. 여행길에 떠나 온 자책감은 이곳 도로 사정이나 척추수술로 장거리 여행은 무리일 것 같아 권하지 않았지만 문화유적지의 문화유산 앞에만 서면 동행할 것을 하고 후회스러웠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인생 길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그런데도 남은 다 죽어도 자기는 죽지 않을 것같이 사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죽은 영혼까지 사랑하여 지었다는 아름다운 무덤 타지마할은 1631년 무굴제국의 황제 샤자한의 왕비가 죽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왕비의 무덤으로 영혼을 상징한 건축이다. 보통 능은 반원형이거나 이집트의 사각뿔 형인데 타지마할은 현대식 건물로 화려한 궁전 같다.

타지마할의 외부 흰 대리석은 한나절에는 태양에 반사되어 사진기로는 촬영할 수 없는 빛을 내뿜다가 밤에는 밤대로 구름사이로 새어 나오는 달빛이 대리석에 스며들어 건물 전체가 형광처럼 빛난다. 보름달이 뜬 타지마할은 사람의 살갗처럼 온기를 지닌단다.

러시아 중국 아라비아 등지에서 대리석과 옥돌이 수입하여 22년에 걸쳐 지었단다. 섬세한 문양이며 정교한 상감기술, 시각적으로 위나 아래나 같은 크기의 코란을 새긴 벽면이며 앞뜰은 정원이라기보다는 공원처럼 넓고 깔끔하다.

타지마할은 인도의 흰 진주 반지라 한다. 은은하듯 화려하고 담백한 듯 순백하다. 375년 전에 설계한 설계사는 누구이며 감독관들의 모습은 정원에 투영된 듯 인류의 보배요 세계적인 유산이다.

우유 빛 대리석 돔, 벽면 가득히 흐르는 분위기, 꽃과 잎, 줄기와 덩굴 문양,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빛을 토해 낸 대칭된 보석 건물이다. 네 귀퉁이의 첨탑들은 지진으로 넘어지더라도 바깥쪽으로 기울게 세웠단다. 공사에 투입된 장인들을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손목을 잘랐다니 영혼을 사랑하였다는 왕으로서는 옥에 티다.

타지마할은 아름다움보다 만든 이들의 정성이다. 이집트의 피리미드는 영원히 죽지 않은 영혼의 집으로 거대하지만, 죽은 왕비를 그리워하며 즐거움을 멀리하고 죽으면서 합장을 부탁한 것은 타지마할보다 흥덕왕릉이 아닐까?

뿌연 시야로 보이는 아그라 성은 자한기르의 궁전과 샤자한이 유폐되어 있던 페르시아식의 대리석 방과 발코니 등은 정교하고 현란하다. 타일이 빠진 자국은 영국군들이 보석을 빼간 흔적이란다.

전망대에서 본 타지마할은 태양에 반사되어 비온 날처럼 흐릿하다. 흙먼지로 인한 공기의 오염이란다, 여기서 타지마할까지 지하 통로가 있다는데도 다음에 와 볼 건지 미련도 없이 나선다.


성애(性愛)은 행복의 신  2005.11.28 (월)

카주라호 성애사원 바깥 벽면은 전부가 춘화도다. 보기에 민망할 성애의 장면들을 부조에 담았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이 사원은 950년부터 200년 동안 ‘달의  신’ 찬델라 왕조의 수도로 정착되면서 건축 되었다.

인도 예술의 독창성과 신성을 지니고 유연하고 풍만한 젊은 육체를 매끈하고 부드러운 사암과 대리석에 재현한 것은 인도조형예술의 장점이다. 힌두교는 세속은 신성하고 소멸은 불멸의 구원에 이르는 열쇠라, 성교도 곧 신의 경지라는 것이다. 성애의 절정은 소멸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단다. 그 순간만은 모든 근심 걱정을 해탈하는 경지로 아름답고 만족하며 완벽하여 인간의 쾌락과 행복이란다.

사원 벽면은 84단 sex의 자세를 목각처럼 조각하여 꼭 우리나라 경천사 13층탑을 확대한 듯하다.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다는 성애사원은 서쪽건물이다. 사원 바깥벽에는 당시 왕들의 생활상과 신들의 성행위를 도식으로 조각하였고 풍만한 젖가슴과 히프는 부끄러움 없이 묘사되었다. 멧돼지도 신으로 숭상하는 희한한 종교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사르나트 박물관은 1904년에 영국인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유물로는 아쇼카 석주와  4마리 사자 상으로 된 주두는 인도 미술의 최고 걸작이다. 야윈 몸매의 좌 불상들은 사르나트에서 발굴된 것이다. 현관에 우산모양의 사암기둥은 사자 석상위에 놓여 있어 인상적이다.


도도한 포용의 갠지스 2005.12. 1(목)

어둠이 깔린 호텔 로비에서 집어든 조간신문에는 어젯밤 이 곳에서 야당의 지도자가 피살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잰걸음으로 일출 전에 갠지스 강 가트로 가는 골목길에는 경찰관의 경계가 삼엄하다.

‘가트’는 갠지스 강둑에 만들어 진 계단이다. 여기서 관광객을 위한 새벽시장이 열린다. 건너편 강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갠지스 강은 도도하다. 선상 관광객들은 일출보다는 순례자의 기도를 들을 수 있고 소망을 담은 연화등을 파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생존 경쟁을 볼 수 있다. 가트 중간 중간에 화장하는 불길들은 한 생명이 그가 원하는 영원한 곳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화장(火葬)은 자신의 시신에 대한 진실을 못 보도록 방해하는 혼(幻)을 태워 없애는 과정으로 여긴단다. 그들은 여기서 목욕으로 야윈 삶들은 씻으며 빨래를 빨고 있었다. 신기한 이야기는 이 강물은 신성한 물이라 담아가서 이웃들과 나누어 마셔도 병이 나지 않는단다.

밭을 가는 소나 소를 모는 농부나 모두가 말라 뼈가 엉성하다. 오랜 역사가 담고 온 가난은 말조차 모르는 것처럼 살고 있다.

우리도 한 때 저축만이 살길이라 외쳤다. 하지만 저축할 돈이 없었던 것처럼 지금 인도가 그러하다. 딱한 것은 계급사회를 두둔하는 힌두교가 아직도 성황이라니 이상한 나라요 민족이다. 힌두교는 교조가 없다. 온갖 것들이 다 신이기 때문이다. 차별화를 보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는 계급은 있고 인권도 없다. 약자는 세상에 순응하는 재주라도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가난도 명상이란 차원에서 체념하고 눈을 감아 버리는 모양이다.

갠지스 강변 옥상에 승려둘이 앉아 참선을 한다. 무엇을 염원할까? 모든 것을 포용한 갠지스 강은 밤새도록 흘러오고 그리고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젓가락을 연상한 바라나시

바라나시에서 룸비니까지는 버스로 10시간이 걸린다. 비상사태로 길을 통제하여 길을 두고 돌아가란다. 시간은 걸렸지만 인도농촌을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지만 시간적으로는 2시간이나 해맨 셈이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지만 앉을 만한 지리도 쉴만한 휴게소는 그림의 떡이다. 배는 물로 채우면 되지만 급한 것은 볼 일이라 노상 방뇨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잠시 헛간 같은 간이음식점에 차를 세우고 도시락을 받았다. 아침에 준비한 반찬은  맛을 잃었다. 가로수가 싱싱한 국도를 털털거리며 또 달렸다.

룸비니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다. 각양각색의 상품들이 어스름한 불빛아래 다양하고 푸짐하다. 가이드의 술수로 입국수속은 20분 만에 마쳤다. 어디나 돈은 재주를 부린다.


석가 태실, 룸비니  2005.12. 2(금)

룸비니는 붓다의 탄생지요 네팔의 땅이다. 허기진 보릿고개처럼 태양도 차분히 내려 갈고 룸비니는 한적하다. 불교 순례지라 티베트에서 온 관광객이 법석댄다. 검은 누비옷 걸치고 색색으로 댕기를 닿고 목욕 한 번 안한 얼굴로 어디든 들어 밀어댄다. 복을 위해 오체투지를 마다 않은 사람들이다.

BC 250년에 아쇼카 대왕은 순례 기념으로 흡사 당간지주 모양의 석주 한 개와 보리수로 착각한다는 무수라는 고목 주위에는 5색으로 손수건만한 크기에 생사화복에 관한 법문을 적어 만국기처럼 달아 놓았다.

태자를 출산한 후 목욕을 시켰다는 구용연못은 현대식 수영장처럼 조성하여 신비감은 잃고 건물은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고 신발을 벗고 들어오란다. 발굴 흔적이 남은 벽돌의 좌선대며 붓다가 탄생한 발자국은 금빛 물에 잠긴 것을 보고 돌아섰지만 정작 부처의 신성한 분위기는 살리지 못한듯하다.

여기서 20여km 떨어진 카필라 성의 태수의 부인인 마야는 친정에서 출산하는 관례에 따라 친정으로 가던 중 여기 룸비니 숲 속에 들렸다가 산기를 느껴 왕자를 순산을 하지만 마야부인은 아들을 낳고 이래 만에 죽자 태수는 그의 처제와 재혼, 결국 싯다르타는 이모 손에 자란 셈이다.  


포카라, 영원 하라

룸비니 공항에서 18인용 붓다에어 경비행기는 해발 900m의 고산 포카라 공항으로 기분 좋게 비행하다. 솜으로 귀를 막고 사탕 한 알을 입에 물린다. 기내에서 본 만년설이 눈부시다. 파란하늘, 고산지대의 집들은 유럽식 별장처럼 아름답다. 안나푸르나를 배경으로 한 포카라(호수라는 뜻)도시는 지극히 평화롭고 명상적이다. 설산과 숲 쾌적한 공기, 차고 맑은 바람, 제대로 정비된 관광버스 등은 인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포근하고 칼칼하다. 최소한의 손님을 맞을 준비는 하고 있었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을 보면서 그동안 인도의 온갖 티끌과 잡신을 훌훌 털어버린 듯 상쾌하다.

만년 설산 안나푸르나 연봉에서 녹은 물들이 흘러드는 페와 호수는 명경처럼 잔잔하다. 배 띄워 부르는 인간의 노래는 이 도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임을 증명하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이 잔잔하게 잠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고를 간직한 산의 나라, 포카라는 다시 오고 싶은 충동이라 권하고 싶은 여행지이다.

세계아름다운호텔로 선정되었다는 풀바리 호텔은 낮은 경사도를 유지한 정돈된 정원과 인공미를 가미한 산책로, 곳곳의 자연적인 조형물의 내부 경관은 안나푸르나와 페와 호수의 아름다움이 후한 점수를 받았을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가꾼 그들 또한 한가롭다.

포카라 호텔은 방학을 이용한 한국인들이 여유를 즐긴다. 최 진실 연예인도 트레킹에 도전하려 왔단다. 결국 대자연에 도전하는 고통을 체험하리라. 카트만두로 갈 버스는 험한 산을 넘어 갈까 걱정이다. 군말 없이 산을 따라 가다가 산을 버리고, 강을 따라 강을 버리기를 수십 번 가파른 산맥의 허리를 떨어질 듯 휘돌면서 가쁜 숨을 뿜고 오르내린다.

욕심은 이익을 낳고 이익은 불행을 가져온다.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고 돈이 많은 사람은 마음이 없다는 네팔의 속담처럼 욕심 불행 가난 돈 마음에 매이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그 많은 신들을 믿고 신들린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지 모른다.


포카라여! 영원 하라

안나푸르나! 너의 모습 영원 하라.


네팔에서 만난 ‘니르’군  2005. 12. 3(토)

네팔에서 만난 ‘니르’군의 본명은 ‘니르 바하두르 구룽’이다. 몽골족으로 먼 할아버지 때부터 네팔에서 살아왔단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우리를 맞이하였다. 그의 첫인상은 ‘나 훈아’를 빼닮아 ‘니르’보다 ‘훈아’라고 부르겠다니 싱긋이 웃기만 한다. 두 아이의 아버지이요 부모를 모시고 사는 가장이며 맞벌이 부부로 행복해하고 있었다.

한국과는 인연은 1990년부터 5년간 경기도 안산의 한 중소공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여 우리와는 친숙하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가 쏟아 놓은 체험담은 눈물겨웠다. 그때 거기서 가장 먼저 배운 말들은 대개가 욕설이었고 푸대접이 전부였단다. 가이드를 처음 시작할 때 자기도 모르게 욕설들이 불쑥 나와 난처했단다.

한국에서 한 달 월급은 35만원으로 밥값을 제하면 남은 건 고생뿐이었단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푼돈을 모았고 나중에는 건설현장에서 막노동꾼으로 일하여 컴퓨터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배운 실력으로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컴퓨터 학원을 차렸다니 그의 의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7살 때 카트만두의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버스를 타본 것이 평생 처음이라 버스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가 하도 신기하여 어떻게 하면 라디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 방송국을 찾아 갔단다. 도전적이고 진취적이며 진지한 그의 열성이 한국어를 놀라울 정도로 구사하는 실력을 쌓을 수 있는 밑천이 아닐까?

산 따라 강 따라 난 도로에서 사고 난 모양이다.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무한정 기다리다 지루하여 그가 노래 한 가락 노래를 뽑았다. 전통악기로 연주해준 가락은 네팔의 전통가요로 사랑의 연가였다.


레슴삐리리 레슴삐리리


우세라 지우끼 단다마 반장

레슴삐리리 레슴삐리리


연인을 만나고 싶은데

멀리서라도 보고 싶은데.


날아서 갈까 걸어서 깔까

레슴삐리리 레슴삘리리


네팔에 있는 동안 좋은 관광을 위해 

머리 아프지 말고 배 아프지 말고 발 삐지 말고


날라서 갈까? 걸어서 갈까?

레슴삐릴리 레슴삐릴리’


여행길의 평안을 전통노래에 얹어 기원했다. 옛 우리의 어머니의 사설처럼 흐느적거리며 구성지게 불렀다.

결국 관광의 의미나 사람 사는 의미는 ‘본 것보다 안 본 것이 더 많고, 가본데 보다 안 가본 데가 더 많으며, 배운 것보다 안 배운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기회라고. 이것이 관광에서 얻는 소득이며 인간사라는 그의 말은 안나푸르나의 설봉보다 희고 높았다.

한국경제가 네팔 관광 사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단다. 그래서 한국의 발전을 바란다는 그의 염원은 산의 나라 네팔의 메아리인지도 모른다. 욕설로 배운 한국어가 그의 사업에 큰 밑거름이 될 줄이야 하고 의아해 하는 ‘니르’의 표정이 낯설지 않은 것은 행복을 구가하는 그의 삶이 진지해서일까? 그리워서 그럴까?



내 집 내나라 레슴 삐리리!  2005. 12. 4 (일) 

네팔 인도인의 삶들을 보면서 50년 후로 타임캡슐을 열어보고 온듯하다. 유적지이외는 아직은 먼 고생길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생각하니 오히려 내 발걸음은 호화스럽다. 불결한 침대열차에서 10시간이상을 보낸 일이며 고물버스로 이동한 장거리, 중단상태나 다름없는 맥 빠진 고속도 공사장, 언제나 마칠 런지도 모를 비포장 도로공사, 곳곳에 쌓인 도시속의 오물, 물기가 없는 모래 먼지, 인도가 시급히 해결할 과제들이다.

‘사람담은 최 민식의 사진이야기’에는 후회 없이 죽으려면 인도와 네팔을 꼭 가보란다. 참고 견디는 인내력을 배우며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의 양식과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거둘 수 있다.는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도 문화유적을 만나면서 때로는 감탄하고 위대함을 만끽하면서 지난 악조건들은 추억으로 환원할 수 없고 잊을 수 없다. 무굴제국들의 역사적인 충격, 공고한 성들의 축성(築城), 뿌리 깊은 계급사회, 가난의 대물림, 갠지스 강변에서 본 ‘생과 사’의 갈림길, 잡신을 숭상한 사원과 사람들. 책상과 걸상도 없는 학교, 1달러에 목 맨 아이들, 볼펜을 절구 하는 학생과 노인, 그들을 매몰차게 외면한 나, 모두가 지금쯤은 무엇을 희구하며 살고 있을 런지. 

아쉬운 것은 그 나라의 실제 사회경험과 관광 이미지는 멀다. 몇 년 전만 해도 해외여행은 꿈같은 일이지만 관광지에서 잠시 멈추고 또 그만큼 유명한곳으로 허둥지둥 달려들 간다. 속살은 보지 않고 겉만 구경하고 맛있는 것 찾아먹고 편안한 잠자리에서 지내다 돌아와도 내 집이 최고란다. 순간순간 나의 창조주를 찬양하면서 네팔 인도의 여행을 무사히 마쳐가고 있다.

그래도 본 것보다 안 본 것이 더 많고, 가본 곳 보다 안 가본 곳이 더 많으며, 배운 것보다 못 배운 것이 더 많은 것이 여행의 수확이지만 결국 이번 여행도 먹고 자고 찍고 한 3박자의 연속 드라마는 아니었는지. 낙오자 없이 동행 할 수 있었고 다시 돌아 올 나라와 아늑한 집과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신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잊어 질 것 같은 생각들을 주워 모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