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봉개동 왕벚나무
봉개동의 왕벚나무 자생지 |
천연기념물 제159호 |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봉개동 산78-1 | 1964.01.31 지정 |
제주도에서 개최하는 사광회 총회에 참석한 후 쨤을 내어 박상진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왕벚나무 자생지를 찾았다. 마침 제주도 출신 사진작가의 안내를 받아 쉽게 자생지를 찾았다. 날씨가 쾌청하여 한라산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두 그루의 왕벚나무가 꽃이 만개하여 우리들을 반가히 맞아주었다. 꽃의 색이 화창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이틀정도 늦게 찾은 듯하여 입도 첫날 찾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옆으로 넓게 펴진 첫번째 나무 끝자락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이 한라산 정상이다.
수형이 반듯하게 위로 펴진 두번째 왕벚나무
파란 하늘 아래 곱게 핀 왕벚나무꽃
원 줄기는 벌채되고 맹아가 자라서 두아름의 굵기와 15m가량의 고목이 된 줄기에 새잎이 피어나고 있다.
곱게 핀 왕벚나무 꽃가지 아래로 한라산 정상이 멀리 보인다.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이곳에서 찾아짐으로서 일본 꽃이 아니라 우리 꽃이라고 널리 선전되고 있다. 그래서 온통 나라 전체를 벚나무 천지로 만드는 이론적인 근거로 삼는다. 결국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벚나무를 우리가 온통 심어주는 꼴이니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박상진 교수의 "벚나무 심기 논란"에 관한 글을 참고로 게재합니다.
벚나무심기 논란 옛 우리의 선조들은 벚나무라면 껍질을 벗겨 활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 외에 꽃을 감상하였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의 정사기록에는 물론 동국이상국집, 파한집 등의 시가집에도 매화, 살구, 복숭아, 자두 등 수많은 꽃나무가 있어도 벚나무만은 찾을 수 없다. 아마 동시에 피었다가 동시에 져버리는 벚꽃의 특성이 너무 경박하여 우리의 민족정서에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조선왕조에 들어오면서 화피(樺皮)라는 나무가 기록에 나오기 시작하는데, 세종 10년(1428) '함경도 경성 관아의 버드나무에 하루는 베필(布匹) 같은 한 물건이 공중에서 길게 쭉 뻗치어 내려왔습니다. 바로 불타는 화피였습니다' 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화피는 자작나무 껍질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세종실록의 오례에 관한 내용 중에 '붉은 칠을 한 활은 동궁이라 하고, 검은 칠을 한 것은 노궁이라 하는데 화피를 바른다' 하여 여기서의 화피는 벚나무임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갑오년 2월5일자에도 화피 89장을 받았다는 내용도 역시 벚나무 껍질이다. 즉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동일한 한자인 화(樺)로 표기하고 뒤섞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사전적인 화피의 의미는 자작나무 껍질이 아니라 벚나무 껍질을 말한다. 선조들은 쳐다보지도 않던 벚꽃을 즐기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그들의 천박한 문화는 물론 기호품까지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벚나무가 우리나라에 처음 심겨지기 시작할 때의 전후사정은 조선일보에 실린 '이규태 역사에세이, 산림전쟁 이야기(99.8.12)'에 잘 나타나 있으므로 그대로 전재해 본다. <일본의 침략정책으로 우리들 기억에 사라지고 있는 '사쿠라 정략'을 놓칠 수 없다. 을사조약으로 들어선 일본 통감부는 일본 국화인 사쿠라를 서울의 도심으로부터 심어나가 전 국토를 덮게 함으로써 정서의 일본화를 꾀했던 것이다. 창경원 남산 장충단 창덕궁의 사쿠라가 바로 이 정략의 일환이었다. 이 음흉한 사쿠라 정략의 저의를 알지 못했던지 순종황제께서 벚꽃이 곱다하니 빨리 피우게 하여 볼 수 없느냐고 말했다 한다. 얼씨구나! 하고 통감부 당국자는 묘목이 아닌 지름 4치 남짓한 큰 사쿠라나무 열 그루를 군함을 동원, 일본에서 싣고 와 황제가 거처하는 문전에 심었다. 이때 황제는 손수 뜰에 나와 심는 장소를 지적해주기도 했다 한다. 이를 못마땅하게 본 궁중의 누군가가 이 열 그루의 나무에다 친일파 대신들의 직함과 성명을 적은 푯말을 걸어두어 한때 옥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 궁중 사쿠라 이식으로 명분을 얻은 제국주의자들은 관아가 늘어선 광화문으로부터 팔도 도처에 심어나 간 것이다. 이 사쿠라 정략에 반감도 대단하여 심어놓으면 뽑아 없애 길 거듭했고, 이를 방지하고자 세 그루 당 한 명의 책임경관을 두어 보호시키기까지 했다. 통감부의 당초 계획은 팔도의 모든 신작로의 가로수를 사쿠라로 할 셈이었으나 이 뽑아 없애는 저항에 굴복, 그 전국화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일병탄이 시작되고 한반도로 이주해 오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벚꽃은 방방곳곳에 차츰 심겨졌고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서서히 우리 고유의 문화처럼 되어 버렸다. 남의 나라 왕궁인 창경궁에다 동물원을 만들고 그도 모자라 벚나무를 줄줄이 심고 시민의 휴식처란 이름으로 놀이터를 만들었다. 지금도 '치욕의 벚꽃놀이'가 아니라 '추억의 벚꽃놀이'로 그때를 그리워하는 이가 많다. 1906년경 진해와 마산 지방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심기 시작하여 저들의 대륙침략 전진기지로 진해를 군항(軍港)으로 개발하면서 집집마다 거리마다 벚나무로 단장하였다. 해방 후 반일투사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시절 한때 벚나무를 베어내는 일까지 있었으나 군사정권을 거치는 동안 흐지부지 되고 이제는 마치 우리나라의 봄이 '벚꽃 군항제'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다. 요즈음에는 청와대를 비롯하여, 사찰과 역사유적지까지 벚나무는 옛날부터 그 땅에 자라던 것처럼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무슨 근거로 벚나무를 우리의 국화인 무궁화보다 더 많이 심고 있는가? 이는 왕벚나무의 원산지는 제주도 한라산이라서 바로 우리의 꽃이므로 일본 꽃으로 알고 경원시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논리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산하에 자라는 대부분의 나무는 고향이 우리나라이며 왕벚나무에 버금갈 만큼 아름다운 꽃나무도 많다. 벚나무의 뼈아픈 역사적인 의미가 단순히 원산지가 우리나라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무시될 수는 없다고 본다. 흔히들 벚나무가 일본나무이니 우리는 우리나라가 원산지라는 왕벚나무를 심으면 된다는 논리를 편다. 벚나무의 종류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벚나무, 왕벚나무, 산벚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섬벚나무, 꽃벚나무 등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고 좀처럼 구별할 수도 없는 비슷비슷한 벚나무들의 한 종류이다. 이들을 구별하는 기준이란 암술대의 모양과 꽃자루에 털이 있느냐 없느냐가 고작이어서 오랫동안 식물분류학을 공부한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일 따름이다. 문제는 벚나무가 일본의 나무로 한때 일본군국주의의 표상이기도 하였고 지금도 국민 모두가 사랑하고 아끼는 꽃으로, 또 일본을 대표하는 꽃으로 확고하게 자라잡고 있는 '현실'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장미와 튤립은 세계인이 즐겨하는 꽃일 따름이지 아무도 영국과 네덜란드의 국화라고 꺼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워싱턴 포트맥 강변의 수천 그루에 달하는 벚나무도 미국민이 모두 좋아하며 2차 대전 때 "일본 놈들은 지옥으로!!"라는 구호와 함께 42그루나 누가 베어 버렸어도 시민들은 보존하기로 하고 지켰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아름다운 벚꽃을 우리가 즐기면 그만이지 꽃나무 하나에까지 무슨 국수주의적 발상이냐고 편협함을 탓한다. 그러나 온 나라를 일본과 꼭 같은 벚나무 천지로 만들었을 때, 그렇지 않아도 서양인들의 눈에는 자연풍광에서 사람들의 얼굴까지 비슷하기만 한 일본과 무엇으로 차별화 할 것인가? 오늘날 벚꽃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으로 보아 꽃의 아름답기로 친다면 벚꽃 만한 꽃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남의 나라꽃, 그것도 우리의 현대사를 망쳐놓은 일본의 꽃으로 온 나라를 뒤덮은 것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필이면 일본을 대표하는 벚꽃의 아름다움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개살구, 살구, 복숭아, 귀룽나무, 돌배나무, 야광나무 등 찾아보면 벚꽃에 못지않은 꽃나무도 얼마든지 있다.
우리나라의 봄은 마치 벚꽃과 함께 시작하는 것처럼 진해 벚꽃 마지를 비롯하여 벚꽃축제로 부터 우리 모두를 들뜨게 만든다. 거의 동시에 이웃 일본에서도 벚꽃축제가 남쪽의 구주에서 북쪽 끝인 북해도까지 거의 한 달에 걸쳐 법석을 떤다. 그렇다면 벚꽃은 언제부터 한일 양 민족이 모두 즐기는 꽃이 되었는가?
찾아가기
제주도에는 두 곳의 왕벚나무 자생지가 있다. 이곳 봉개동과 남원읍의 신예리이다. 그러나 신예리의 왕벚나무는 숲속에 있어서 담당공무원도 위치를 잘 모른다. 봉개동 왕벚나무는 2004년 11월9일의 늦가을에 첫 알현을 했다.
제주에서 서귀포로 넘어가는 11번 도로를 탄다. 목석원-제주대학입구-산천단을 거쳐 제주컨트리클럽입구를 지나쳐 한라산 쪽으로 계속 달린다. 골프장의 철망이 끝날 즈음, 왼편에 ‘제주C.C뉴코스’로 들어가는 삼거리를 만나면 거의 찾는 셈이다. 이 삼거리에서 1~2백m쯤 서귀포 쪽으로 더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잡목을 제거한 넓은 개활지가 나오고 안쪽에 나무가 보인다. 교통량이 많은 도로이고 주차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GPS 좌표 : N 33°25′36.3″, E 126°35′57.3″
교통 : 제주시→산천단→5•16도로→제주 컨트리클럽 부근
방문정보 : 제주시 문화체육과 ☎ 064-750-7224/ 봉개동사무소 ☎ 064-750-7652
▒▒ 글, 사진 | 박상진 (경북대학교 임산공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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