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 사진***/사람사는 이야기

대구읍성 성벽돌

是夢 2006. 10. 25. 15:03

대구읍성 성벽돌

 

최초의 대구읍성은 토성이었으나 허물어지고 그 후 선조23년(1590년) 축성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끼나가에 의해 허물어졌다.

 영조 12년(1736년)에 다시 축조한 대구읍성은 1907년 일본 거류민단의 성벽 내외간의 교통이 불편하다는 건의에 의해 철거되고 그 성벽자리에 도로를 만든 것이 대구도시계획상 제1차 순환로인 남성로 동성로 북성로 서성로이다.

그 때 허문 성벽의 잔해인 성벽돌로 동산병원내에 있는 선교사 주택의 기초돌로 사용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돌계단과 주택의 기초돌로 사용한 대구읍성 성벽돌

 

대구읍성은 처음에는 토성이었습니다. 대구부읍지(大丘府邑誌)에 의하면 최초의 대구읍성은 부사 윤방이 선조(宣祖) 23년(1590)에 완성했고, 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21일 왜군 가운데 제일 먼저 대구에 입성한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倭軍)에 의해서 파괴되었으므로 그 이상의 구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영조(英祖) 12년(1736)에 읍성을 재축(再築)하고 축성비를 세웠는데, 이 축성비(築城碑)에 의하면 "부치(府治)의 북(北)쪽에 토성유지(土城遺址)가 있으나 언제 창축되었는지 알 수 없다."라는 기록이 있다.

축성비에 나타난 규모를 영조척(營造尺)을 기준하여 미터법으로 산정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성 의 둘 레 : 약 2,650미터(2,124보)
△ 성곽의 높이 : 서남 약 3.8미터(18척)
동북 약 3.5미터(17척)
△ 성 의 폭 : 약 8.7미터(7보)
△ 여 첩(女 牒) : 819개, 여첩 1개의 길이는 약 3.23미터

대구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이 있었는데 이름과 위치는 다음과 같다.

동문(東門)을 진동문(鎭東門 : 동성로 제일은행 대구지점앞 네거리)
서문(西門)을 달서문(達西門 : 서성로 조흥은행 서지점 앞 네거리)
남문(南門)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 남성로 대남한의원 앞 네거리)
북문(北門)을 공북문(拱北門 : 북성로 벽산 대구지점(옛 조일탕) 앞 네거리)

그후 다시 중수하게 된 것이 134년 뒤인 1870년 대원군의 군사정책으로 보수, 중수되었으나 1907년 일본 거류민단이 대구성벽이 성 내외를 격리시켜 교통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도시의 성장에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주장하여 대구읍성을 철거하고 대구 시가지도로를 개통했습니다.

이때 대구 관찰사 서리로 있던 박중양이란 사람이 일본거류민단으로 부터 철거건의를 받고 철거 허가를 먼저 내리고 보고는 그 후에 조정에 했으나 조정에서 박중양의 의견이 타당성이 없어 철거허가를 하지 않았는데, 이미 그때는 철거가 반 이상 진행이 되어~ 중단이 불가능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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