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그 날을 회고한다._그 당시 나의 일기장을 중심으로
청사에 길이 빛날 2.28 학생의거
대구 시민의 자랑으로만 남았던 우리의 '2.28'이 국민의 품안으로 돌아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법의 개정을 통해 2.28에서 3.15 와 4.19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효시로 당당히 자리잡은 것이다.
세계의 역사에서도 고등학생의 민주의거는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은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물러나고 장면 민주당 내각이 들어서기까지,
한국 현대 정치사의 큰 흐름을 바꾸어 놓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듬 해 5.16으로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그 의미가 다소 퇴색된 것은,
작은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이기도 하다.
1960년 우리들이 경북고등학교 2학년 말 때의 일이었으니 올해가 50주년이 된다.
반백년 만에 국가공인의 민주화운동 기념사업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개가 무량하다.
70노인이 되어서야 우리의 젊음과 정의 그리고 민주와 자유를 되찾았으니 말이다.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청사에 길이 빛날 2.28 학생운동으로 승화되길 바란다.
그 날을 회고한다._ 나의 일기장을 중심으로
나의 일기장에는 2월 12일(Fri. fine)부터 선거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당시 자유당은 미움의 대상이고 민주당은 모두가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학생이 정치에 초연해야 하지만 자유당 정권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들이었다.
2월 13일(Sat. fine)은 정부통령 후보자등록 마감일인데,반공민주수호연맹의 추천인,
장택상, 박기출후보가 정체불명의 괴한들에 의해 등록서류를 탈취 당했다는 내용이다.
이와같은 백주의 테러사건으로 짐작해 볼 때 3.15공명선거가 심히 우려된다고 적고 있다.
2월 16일(Tue. fine)에는 천만 뜻밖의 사건,조병옥박사의 서거소식이 자세하다.
이 비통함은 유가족의 문제, 민주당의 슬픔이 아니라,국가민족과 자유세계의
불운이라고까지 쓰고 있었다.
이보다 4년 전 해공 신익희선생의 심장마비로 인한 서거사실도 함께 언급되어 있다.
2월 17일(Wed. fine)에도 조병옥박사에 대한 국민들의 슬픔과 원한이 신문을 메웠고,
여야 모두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말았다는 슬픈 정치현실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2월 20일(Sat, cloudy)도 마찬가지로 조병옥박사의 유해 공항도착을 알리고 있었다.
"낫는 대로 속히 달려 오리라"했지만 싸늘한 시신만 돌아왔다고 비통해 했다.
2월 26일(Fri. fine)부터 사태의 심각성은 표출되기 시작한다.
학교측의 지시로 일요일도 등교하라는 선생님의 전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급우들의 불만과 항의는 빗발치듯 했고 교실은 비난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분명한 등교이유를 알지 못하는 급우들의 분노는 교문을 나설 때까지 이어졌다.
2월 27일(Sat. fine)은 일요일 등교문제로 온 종일 술렁이고 들썩거렸다고 했다.
대의원들의 모임인 운영위원회조차 흡족한 결정을 통보해주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우리 반은 등교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으나 1시간에 걸친 담임선생님의 만류로,
결국 등교로 결정이 바뀌었고 고산골에 토끼잡이 가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고 했다.
2월 28일(Sun. fine)의 날은 밝앗다.
본관 앞의 좁은 마당에는 교문에까지 격앙된 분노의 얼굴들이 학교를 성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날의 김영기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설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학생들의 젊은
용기를 북돋우고 있는듯 들렸다.
난데없이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함께 교문으로 몰려들었고 대오는 이미 길거리를 달렸다.
이 날 일기장의 첫머리와 데모상황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 적어 본다.
_校門을 박차고 거리를 질주하는 勇者들,
正義에 불타고 血氣 衝天하는 우리들의
前路엔, 그 뒤의 危險과 恐怖를 생각할 바 아니었고
앞을 가로막는 개미새끼 하나 許容치 않았다.
우리들의 피는 끓었다. 正義와 不義를 判斷하고
義를 貫徹하는 慶高 健兒의 혈관은 터졌다.
政黨에 쥐여진 民主敎育의 破壞狀을 어찌
우리들이 默認할 수 있었겠는가!
校門 앞을 지나던 張 副統領과 民主黨 遊說班員들은
우리들에게 더한층 힘을 돋우었다.
數百의 慶高生, 自由에 굶주린 우리들은
"學園에 自由를 달라"는 口號 等을 외치며 中央通을 질주했다._
_중략_
每日新聞社 앞에서 口號를 외친 우리들은
바로 道廳에 들어가서 宣言文을 낭독했다.
이때였다. 정문에서는 정복경찰관의 곤봉이 하늘로 튀었다.
너무나도 돌연한 뜻밖의 사태는 流血劇을 벌리게 되었다.
前半部는 正門을 뛰쳐 나갔으나 後半中의 나는 정말 놀람과
두려움에 가득차 망서렸다.
빠질 곳을 살피다가 싸우고 엎어지고 급히 일어나 정문을
나설 때는 그 경찰이 다른 학생과 한창 씨름 중이였다.
용케도 한은지점 앞으로 와 일행과 합세하였다.
그러나 끝내 공포에 쌓였을 때 경찰 백차 몇 대가 최선두를 향하고
있어 사태는 심히 곤란하게 관측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급히 옆 골목으로 몇 아이들과 빠졌다.
잠깐 정신을 돌려 멈췄을 땐 전신에 먼지와 흙투성이였다.
_ 永遠히 잊히지 않을 오늘의 데모, 永遠한 하나의 歷史_
역전으로 가는 行路에 나오자 백차에 本校生을 태우고 내려오고 있었다.
또 한번 놀라 돌아섰을 땐 벌써 본채 안 본채 지나가 버렸다.
급히 역전에 다달아 bus에 올랐으나 다리는 절리고 땀은 계속 흘렀다.
구석, 거리 요소 할 것없이 경찰 형사들로 들끓었고
실려가는 경찰 백차 위 학생들에 대한 울분이 온 몸에 소름을 일으켰다.
_중략_
신문에 나타난 우리들의 데모광경엔
또다시 의문과 쾌감과 우려의 여러 曲線들이 뒤틀리고 있었다.
慶高生의 흥분과 社會에 던진 學生의 기풍과 勇氣는 말할 것 없거니와
社會惡을 지적한 우리들의 要求에 관심을 集中하는 國民들의 여론과
世界의 여론 그리고 政客들의 논란이 뒤범벅이 된데 만족할 수도 있었다.
2월 29일(Mon. fine)에는 전국의 신문들이 보도한 '2.28 대구학생 데모사건'을 적었다.
국내외의 동요와 자유 민주 양당의 싸움에 원인제공이 되었다고 보았다.
학생에겐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며 학교측의 처리에 맡긴다는 문교부측 성명을 듣고서야
마음을 놓았다고 했다.
'학원에 자유를 달라'라는 제목으로 손바닥 만하게 3면에 게재함은 물론 1,3면을 뒤덮은
동아일보를 보고는 이와같이 일이 크질 것은 상상도 못했다고 그 감회를 적었다.
3월 1일(Tue. fine)의 표현이 재미있다. 짤막해 여기에 옮겨 본다.
이 聖스러운 날, 民族精氣가 흘러내려 고인 오늘.
왜 우리들이 擧式을 하지 못했는가!
학생데모에 밀려버린 三一節 記念行事
우리의 罪는 아닌 것을 明白히 하고 싶다.
三一의 靈魂이여! 고이 잠 드소서-.
3월15일(Tue. fine)에는 마산사건은 언급이 없었다.부정투표에 대한 일기를 옮겨 본다.
말썽 많던 第四代 大統領, 第五代 副通領 選擧.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는 不正과 矛盾.
번호표 받지 못해 投票 못한 國民,
民主黨員, 投票場에서 추방당한 事實,
反共靑年團員들에 의한 구타, 상해,
무엇보다도 '三人組, 九人組의 公開投票'
一部 民主黨의 선거포기,多種多樣한 不法行爲,
이 속에서 이 배달겨레는 꾹 참아야만 하는지~?
3월 17일(Thu. fine)에는 국민들과 민주당의 비난이 극도에 이르는 가운데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부통령엔 리기붕 국회의장이 90%와 70%득표로 당선됐다고 적고 있다.
'國民들의 한숨과 탄식소리는 점점 높아만 가고 갖은 不正과 不法行爲는 계속 露呈되고,
그들의 當選과 選擧無效運動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고도 했다.
3월 31일(Thu. fine)에는 체념에 가까운 심사를 적고 있다.
不安定한 狀態와 政界의 混亂속에서 國民들은 지쳐버린 듯(?),
'될 대로 되라'라는 힘없는 말투엔 너무도 無責任하고 안타깝다.
民主黨 新舊派, 自由黨의 또 하나 혁신파,
그러나--, 정말--, 너무나도 애닯다--.
4월 18일(Tue. fine)에는 더욱 간단하다.
서울에서 4,000여명의 高麗 大學生 데모,
市民들의 熱烈한 拍手갈채, 一大混亂 뒤범벅.
이럴수록 우리들의 2.28은 값이 올라가는데--.
4월19일(Wed. fine)은 서울의 대학생, 고교생, 일반시민들의 반정부데모를 쓰고 있다.
살인 방화 파괴등 대혼란을 지켜보면서 경무대로 뛰어들다가 총격에 쓰러진 고귀한 청춘이
100여명이나 되었다고 적고 있다.
부산 광주 대전에서도 궐기하는가 하면 신문사 경찰서 파출소가 전파되고,
소방차를 탈취하여 무기를 휘두르는 등 사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결국은
비상계엄령(사령관 송요찬)이 선포되어 마음이 아프다고도 했다.
4월26일(Tue. fine)에는 하야소식과 정부공백을 우려하고 있었다.
'第二의 解放'이라고 적고있어 이채로웠다고 할까.
4.19사태 이래로 연발하는 데모대에 굴복
드디어 李承萬氏 大統領織을 棄하고 下野.
世界史上 最大의 民主革命, 죽은 靑年학도 150여명,
그들이 흘린 피 헛되지 않았으니
새로운 民主大韓 건설한 民主의 피.
世界에서는 박수갈채, 생각하지 못한 정국추이,
공백상태의 이 나라를 누가 인도할려는지--.
4월 28일(Thu. fine)은 '以外의 號外'라고 하면서,
李起鵬 가족과 함께 景武臺 別館서 自殺
(이강석이 권총 發, 박마리아, 강석, 강욱)
國會議員 總辭退.
4월 30일(Sat. fine)은 4.19 이후 10일간의 휴교를 마치고 등교한 이튿날로 적고 있다.
2.28 후유증으로, 당시 선생님들의 책임문제가 계속 거론되었고, 당시 '학생위원'이었던
나는 도시락까지 준비한 4시간의 회의를 가졌지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고 쓰고 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봐도 관련 선생님(이발형 학생과장, 양갑석 교무과장)들이
자신의 인사 불이익을 수락할 리 없음은 너무나 분명했으리라 여겨진다.)
급기야 학생위원 10명이 저녁 8시에 삼덕우체국 앞에 집합하여 김영기 교장선생님 댁을
예고도 없이 방문했고,사모님의 제사음식으로 밤늦도록 대화가 오갔다고 적고 있다.
교감 선생님과 몇몇 선생님들은 인사이동시 꼭 참작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도 했다.
에필로그
그 당시의 일기장, 노트 한권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2.28의 전후 관련내용만을 간추려 보았다.
고교 2학년 수준이라 부끄럽기도 하지만 2.28을 회고하는데는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그 때 왜 그리 한문을 많이 썼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공부삼아 쓴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담당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에게 너무나 무례했다는 생각도 든다.
사모님의 제삿날, 쳐들어 가다시피해서 약속을 받아냈고 실제로 인사발령은 바로 이루어졌다.
더군다나 졸업여행은 절대 원행을 허락하지 않겠다던 그 인자하신 교장 선생님을 욱박질러
한산도와 다도해를 둘러 부산과 경주까지 다녀온 것은 만감이 교차하는 부분이다.
2.28 이후 3학년은 대학입시준비에 금쪽같은 시간을 다 쏟을시간인데,학생위원을
그만두고 팽개칠까하는 마음을 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일기장을 보는 순간,
내 마음에서는 웃음이 절로 나왔고, 그런 것이 다 씨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대학 때는 한일굴욕외교반대를 주도했고,사회에 나와서도 몇 번 회장선거를 치루었으니 말이다.
이제 우리들의 2.28 민주역사는 밝은 천지에 영광스럽게 쓰여지고 있음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우리 모두 우리를 길러 준 모교에 다시한번 그 당시를 생각하며 경의를 드려야 한다.
오늘 이렇게 우리 모두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국가와 민족에게도 감사를 올리자.
좀 길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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